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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사냥꾼 (73/112)


73. 사냥꾼
2022.06.12.


차로 이동하던 도중 뒷좌석에서 잠시 잠이 들었던 성호는 묵직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몽롱한 정신으로 창밖을 바라보다가 일순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 오래 살긴 했나 보군. 차에서 잠을 다 자고.”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차에 올라타 최 기사가 건넨 따뜻한 차로 입가를 적신 성호는 얼마 가지 않아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 잠이 들었었다.


“나도 이제 늙었는지 쓸만하지 못하네.”

뻐근한 눈가를 문지르며 성호가 낮게 읊조렸다.

이렇듯 종종 노화가 피부로 느껴질 때마다 더욱더 절실해지는 건 한평생 일군 회사를 맡아 경영할 제 핏줄이었다.

회사를 키우기 위해 많은 이의 피와 땀이 희생되었고, 그들을 밟고 여기까지 올라왔다.

결코 이 결실을 헛되이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뻣뻣한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고개를 돌리던 성호는 문득 운전을 하는 최지훈 기사를 보고 멈칫했다.


“최 기사, 어디 아픈가? 왜 그렇게 땀을 흘리나.”

“아, 아닙니다. 머리가 조금…… 죄송합니다.”

계속해서 식은땀을 흘리는 최 기사에게 성호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차며 팔짱을 꼈다.


“윗사람 보좌한다는 놈이 자기 몸 관리도 못 해서. 안 그런가, 김 실장?”

“예, 맞습니다.”

“……정말 죄, 죄송합니다.”

조수석에 앉은 김 실장이 낮게 답하자 최 기사가 다시금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떨리는 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운전대를 꽉 움켜쥔 최 기사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붉은 신호 앞에 차량이 잠시 정차하고, 김 실장과 강 회장의 눈치를 살피던 최 기사가 몰래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다급하게 문자를 보내는 손가락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지금 가고 있습니다. 삼척까지 이제 2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빠르게 작성한 뒤 서둘러 전송을 누르자마자 뒷좌석에 앉아 있던 성호의 목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최 기사, 누구한테 문자 하나?”

“네? 아…….”

당황한 최 기사가 이마로 흐른 땀을 닦으며 어수선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집사람한테 잠시 문자를 했습니다.”

“거, 신혼도 아니면서 운전할 때 문자 보내지 마라.”

“예……. 죄송합니다, 회장님.”

속으로 안도한 최 기사가 서둘러 휴대전화를 슈트 재킷 안으로 밀어 넣었다.


 

***



-거, 신혼도 아니면서 운전할 때 문자 보내지 마라.

-예……. 죄송합니다, 회장님.

한편 최 기사를 은밀히 포섭해 차량에 작은 도청 장치와 위치추적 장치를 붙이도록 지시한 시후는 강성호 회장의 목소리를 들으며 표정을 굳혔다.

GPS로 차량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길쭉한 검지로 테이블을 두어 번 두드렸다.


“도착까지 2시간이라…….”

그들이 지시한 일을 2시간 이내에 제대로 성공시킬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아 초조했다.

위험한 도박수였기에 실패한다면 더없는 재앙이 찾아올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연락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억눌린 호흡을 뱉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뜬 시후가 두 손을 모아 열 오른 이마를 눌렀다.


“대표님, 신재환 팀장님 오셨습니다.”

각종 상념을 뚫고 홍 비서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고 해.”

마이크 버튼을 누르고 답하자 곧바로 재환이 안으로 들어왔다.

부쩍 피곤해 보이는 시후에게 각종 현황 보고를 마친 재환은 나가보라는 시후의 말에도 버티고 서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대표야, 너 요즘 괜찮은 거냐?”

“뭐가.”

“너 대표이사직 내려놓는다고 기사 뜬 거 말이야. 겨울 씨랑 이혼한다고도 떴고……. 그 이후에도 지금까지 해명 기사는 따로 없는 것 같은데.”

“…….”

“대표직 내려놓는 거 아니라고 네가 말하긴 했어도 직원들 분위기가 영 뒤숭숭해. 사실무근이라고 정정 보도가 전혀 안 뜨니까.”

“뜰 거야, 이제.”

낮게 시선을 내리깐 시후가 단호하게 답했다.


“뭐?”

“이르면 오늘, 늦어도 내일 안에는 정정 보도 뜰 거라고.”

“뭘 어떻게 하게?”

재환의 물음에 시후가 말없이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대로 창가 쪽으로 몸을 튼 시후가 도심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올라가야지, 머리 위로.”

 

***

강 회장의 차는 오랜 시간을 달려 강원도 삼척에 위치한 외딴 의료원에 도착했다.

허둥지둥 차에서 내린 최 기사가 뒷좌석 문을 열어주자 뒷짐을 진 성호가 차에서 내렸다.

60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하도록 위엄 있게 어깨를 편 성호의 주위로 매서운 기운이 감돌았다.

의료원의 풍경을 천천히 바라본 성호가 묵직한 걸음을 옮겼다.


“창영이 놈 상태는 어떤가.”

강 회장 뒤로 김 실장이 따라붙으며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계속 그대로라고 합니다.”

쯧, 혀를 찬 성호가 주름이 자글자글한 미간을 세차게 구겼다.


“하여간 못난 놈…….”

사실 교통사고로 인해 식물인간 상태가 된 둘째 아들을 죽었다고 공공연히 공표하고 장례식까지 치른 이유는 단순히 회사의 주가 때문이 아니었다.

교통사고가 나기 직전, 신원을 알 수 없는 이로부터 익명의 제보가 들어왔었는데, 그건 바로 창영과 서진이 함께 작당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정보였다.


“감히 이 강성호의 회사에서 나 모르게 뒷주머니를 차?”

아무리 친아들과 마누라여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누군가 창영과 서진이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언제든 터뜨리면 회사에 커다란 타격이 될 터였다.

……차라리 죽어서 ‘공소권 없음’ 처리되는 게 나을 만큼 말이다.


“문 열어라.”

“예.”

창영이 입원해 있는 병실 앞에서 성호가 지시하자 김 실장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베드에 누워 있는 것은 창영도 그 누구도 아닌 공처럼 뭉쳐 있는 이불뿐이었다.

놀란 성호의 눈이 커다랗게 뜨여졌다.


“……김 실장, 이게 어떻게 된 건가.”

미간을 좁힌 성호가 김 실장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 파악조차 되지 않았다.


“그, 그게…… 저도 잘…….”

“……뭐?”

“죄송합니다. 빠르게 경위를 파악하도록 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창영의 실종에 당황한 김 실장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베드를 향하던 성호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 김 실장에게로 꽂혔다.

섬뜩한 시선에 등골이 오싹해진 김 실장이 딱딱하게 굳었다. 입술을 벌려 더듬더듬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회장…… 컥!”

곧바로 김 실장의 얼굴이 왼쪽으로 세차게 돌아갔다.

성호는 무표정으로 한쪽 얼굴만 다섯 번을 내리 후려쳤다.

입술에서 핏물이 터지고 한쪽 눈 혈관이 파열되었으나 성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돌연 얼굴을 무자비하게 얻어맞은 김 실장이 비틀거리다가 두 손을 모아쥐고 똑바로 서서 고개를 조아렸다.


“꿇어.”

싸늘하게 귓가에 박히는 음성에 김 실장이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대었다.

동시에 성호가 날렵한 구두코로 그의 복부를 잔혹하게 걷어찼다.


“네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한 모양이구나.”

“아…… 아닙니다…….”

“창영이 놈이 살아 있다는 게 밝혀지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라?”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 분을 이기지 못한 강 회장이 옆에 놓인 화분을 들어 그대로 벽으로 내던졌다.

거친 파열음이 들려오고 산산조각 난 화분의 잔해가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그 파편에 맞은 김 실장의 이마로 붉은 선혈이 흐르고 헛숨을 터뜨린 강 회장은 시가를 꺼내 입에 물었다.

공포에 질린 채 딱딱하게 굳은 모습으로 뒤에 서 있던 최 기사에게 눈짓하자 그가 서둘러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주었다.

한 모금 빨아들여 삼킨 성호가 매서운 눈을 번뜩이며 김 실장을 내려다보았다.


“의식도 없는 산송장이 제 발로 걸어갔겠어? 누군가 빼돌린 게 틀림없지.”

“…….”

“어디서 정보가 어디서 새어나간 건지…….”

천천히 시선을 돌린 강 회장이 입에 물린 시가를 내리며 최 기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매끄러운 양복 위로 담뱃불을 눌러 끄자 섬찟한 최 기사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바들바들 경련하며 떠는 최 기사에게서 시선을 뗀 성호가 김 실장을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당장 창영이 녀석을 찾아! 오늘 안에 못 찾으면 다들 옷 벗을 준비해.”

“네, 회장님!”

큰 소리로 답한 김 실장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성호가 김 실장의 넥타이를 끌러 제 주먹에 묻은 피를 문질러 닦았다.

대충 아무렇게나 버린 뒤 병실을 나서려는 찰나, 성호의 휴대전화가 길게 진동하며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뭐야?”

신경질적으로 휴대전화를 꺼낸 성호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성호의 동공이 거칠게 뒤흔들렸다.


“……이, 이게 무슨……!”

막 전송된 사진은 여전히 의식이 없는 상태로 알 수 없는 곳의 침대에 누워 있는 창영의 모습이었다.

연로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고, 곧이어 걸려온 전화를 받은 성호가 으르렁거렸다.


-강시후, 이 미친 자식이!!!

짐승의 포효처럼 거대한 음성이 수화기 너머로도 쩌렁쩌렁하게 울렸으나 시후는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너 강창영 얻다 빼돌렸어!!!

태연하게 휴대전화를 귓가에 갖다 댄 시후가 차가운 음성을 내었다.


“나도 이제 회장님 식대로 해보려고 합니다.”

-뭐야?!

“누누이 말씀하셨던 대로, 나는 회장님 핏줄이 맞습니다. 발버둥 쳐도 그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러니 나도 당신 핏줄답게.”

서늘하게 내리깐 시후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이빨을 보이려고요.”

낮지만 거센 음성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바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시후는 덤덤했다.


-이 자식이……. 원하는 게 뭐야!

“겨울이와 이혼한다는 기사, 내가 KU그룹으로 들어간다는 기사 전부 내리게 지시하세요.”

-겨우 그딴 것 때문에 이딴 일을 벌여……?!

“지금 당장 사실무근이라는 정정 보도 통과시키고, 앞으로 겨울이와 그 가족들에게 손끝 하나 대지 마세요.”

묵직하게 숨을 흘린 시후의 까만 동공이 차가워진 공기를 꿰뚫었다.


“그땐 나도 내 동생을 어떻게 할지 모르겠으니까.”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생각했으면 오산이라고 하셨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거친 숨소리가 뚝 끊겼다.


“그깟 이빨 몇 개, 있든 없든 그래 봐야 짐승인데…….”

천천히 목을 뒤로 꺾었다가 내린 시후가 점잖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차피 사냥당해 숨통 끊어질 존재 아닙니까?”

나지막한 음성이 끓어오르는 듯했다.


“내 취미가 사냥입니다.”

섬뜩한 목소리가 늙은 짐승의 살과 뼈를 발기듯이 흘러나왔다.


“가죽까지 모조리 벗겨 드리죠, 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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