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내 손을 놓지 말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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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내 손을 놓지 말아줘
2022.06.15.
수화기 너머로 강성호 회장의 찢어질 듯한 고함이 들려왔으나, 시후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휴대전화를 내린 시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욱신거리는 미간을 손으로 주무르며 고개를 내리자 산소호흡기에 의지하여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이복동생 강창영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단 급한 불을 끌 수 있는 카드로 그를 데려오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아버지의 레이더망을 피해 창영을 숨겨두는 것은 언제 발각될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도박이었다.
“그러니까 그 전에 물증을 잡아야 해…….”
단번에 강성호의 숨통을 틀어쥘 수 있는 약점을 잡아야 했다.
그래야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있고…….
이제 시후는 겨울을 위해서라면 못 할 짓이 없었다.
***
강성호와의 통화가 종료되기가 무섭게 인터넷에서는 겨울과 시후의 이혼을 비롯하여 시후의 대표이사직 사임에 대한 정정 보도가 올라왔다.
여러 기자의 입을 통해 사실무근이라고 확실히 입장 표명을 하니, 일전에 올라왔던 허위 기사에 관한 루머는 빠르게 종식되었다.
그렇게 폭풍을 지나 찾아온 일요일 오후, 시후는 강성호와의 문제 해결에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미뤄뒀던 업무를 보기 위해 회사에 출근했다.
밀린 일들을 차례로 처리하고 뻐근한 목을 들어 올리자 어느덧 창밖의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했다.
잠시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 굳게 닫힌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시후와 함께 주말 출근을 감행한 재환이었다.
짧게 보고를 마친 그가 유독 피곤해 보이는 시후의 눈매를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안 피곤하냐? 그러다 쓰러지겠어.”
“……어. 괜찮아.”
시후의 대답에 재환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게 확실한데, 말해주지 않고 침묵을 지키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오랜만에 술 한잔할까?”
재환의 말에 곧바로 거절의 의사를 전하려던 시후가 멈칫했다. 조금 전 겨울에게 도착한 문자를 확인한 탓이었다.
[오빠, 나 오늘 친구들하고 저녁 먹고 밤 늦게 들어갈 것 같아.]
그날 이후, 여러 일이 몰아닥치는 바람에 겨울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고, 당연하게도 서먹한 사이가 계속되었다.
“……그래. 그러자.”
시후는 재환을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겨울에게 짤막한 답장을 보냈다.
[알았어. 이따 집에서 보자.]
***
주형의 세미나가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오랜만에 겨울과 희수, 주형은 한자리에 뭉쳤다.
연일 매스컴에서 화제로 다루어졌던 겨울을 배려하여 개별 룸이 존재하는 프라이빗한 이자카야에서 잔을 기울였다.
며칠간 계속해서 시달렸던 겨울을 위로하기 위한 자리였으나, 정작 주인공은 말도 없이 잔을 내리 비우기만 했다.
“겨울아. 이제 그만 마셔. 이러다 뭔 일 나겠다.”
걱정으로 가득 찬 주형은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술을 들이켜는 겨울을 말렸다.
“무슨 일인지는 정말 말 안 해줄 거야? 너 잃어버렸던 기억도 다 돌아왔다며. 뭐가 문제야?”
희수의 물음에 힘없이 잔을 내려놓은 겨울이 고개를 떨구고 자그마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별거 아냐. 기억 돌아오긴 했는데……. 그냥 집에만 있으니까 자꾸 우울해져서. 바깥 공기 쐬고, 뭐라도 마셔야 좀 나을 것 같아서…….”
말꼬리를 길게 늘이는 겨울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희수가 작게 한숨 지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시자! 마셔! 힘들 땐 그냥 죽어라 마시고 토하고 뜨끈하게 지지는 게 직방이야.”
“뭐? 야, 말리진 못할망정 부추기지…….”
“네, 알코올 쓰레기 박주형은 조용히 계시고요! 건배!”
희수는 주형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케를 겨울의 잔에 따라주며 건배를 외쳤다.
오늘만큼은 모든 시름을 잊고 싶었던 겨울이 무력하게 건배를 한 뒤 단숨에 술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러나 한잔, 두잔, 세잔, 잔이 늘어날수록 더욱더 깊어지는 것은 시후에 대한 마음뿐이었다.
***
한편 시후와 재환도 넥스트게임즈 본사 근처의 조용한 위스키 바에서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야, 시후야. 솔직히 말해봐.”
“뭘?”
“너 대체 요즘 무슨 일이야?”
대표와 직원 사이였지만 동시에 10년도 넘은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힘든 일이 있다는 것쯤은 서로의 얼굴색만 봐도 알았다.
“네 말대로 해명 기사도 제대로 떴고, 겨울 씨하고 이혼도 아니라면서. 이제 뭐가 문제야?”
“…….”
시후는 차마 대답할 수 없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겨울과의 사이에 걸림돌이 되는 문제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겨울에게 원래부터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거짓말을 해서 그녀가 배신감을 느낀 것도 문제였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겨울의 집안을 망하게 만든 배후라는 사실을 그녀가 알게 되면 얼마나 더 상처 입고 충격을 받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미 너무도 힘들어하는 겨울의 앞에서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아 아직도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겨울 씨와 관련된 일이지?”
시후가 말없이 고개를 떨구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재환이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지금 네 마음이나 생각을 전부 털어놓는 게 어때?”
“…….”
“선택이나 판단은 상대방 몫이니까.”
위스키 잔을 가볍게 흔든 재환이 시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중에 가서 후회할 일 만들지 않으려면, 소중한 사람한테 거짓 없이 솔직하게 부딪쳐보는 게 최고더라.”
그 말에 시후의 검은 눈동자가 고요하게 흔들렸다.
진한 한숨과 함께 잔을 들어올린 시후가 쓰디쓴 알코올을 들이켰다.
***
“잘 가, 조심히 들어가!”
“응, 희수 너도.”
술자리가 파한 뒤, 희수는 택시를 타고 돌아가겠다며 떠나고 집 방향이 같은 주형과 겨울은 함께 차에 올라탔다.
운전대를 쥔 주형은 조수석에 지친 기색으로 앉아 있는 겨울을 배려하여 조심스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내부에 고요한 침묵이 흐르고, 겨울의 눈치를 살피던 주형이 한참 만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번에 그 말은 뭐였어?”
“……무슨 말?”
“그…… 너 쓰러진 날.”
주형이 머뭇거리며 작게 뒷말을 이었다.
“응급실에서 일어나자마자, 강시후 씨가 네 남편이 아니라고 했던 얘기 말이야. 결혼이 다 가짜라고 했던…….”
“……아, 그거?”
얼마 전의 일을 떠올린 겨울이 숨소리처럼 헛웃음을 터뜨렸다.
“다 거짓말이었어.”
“뭐가?”
“우리 쇼윈도 부부였어.”
겨울의 말에 놀란 주형의 눈동자가 뒤흔들렸다.
“그 남자는 나한테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여서 결혼했다고 거짓말했고.”
“……뭐?”
“괘씸해서 배신감 들고 원망스러웠는데…….”
겨울은 축축하게 젖은 뒷말을 흐렸다.
눈가가 욱신거리며 가슴에 물기가 차오르고 심장이 깨질 것처럼 아팠다.
‘날 사랑한다는 그 마음이, 도저히 가짜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겨울은 속으로 아릿하게 말을 삼켰다.
아니, 가짜일 수가 없었다.
만에 하나 그의 사랑이 가짜였다면…….
사랑하지 않았다면.
굳이 그 먼 미래에서 겨울을 살리겠다고 찾아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전부 날 위해서…….’
내가 무서워하지 않도록, 내가 죽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미래에 우리의 사이가 멀어진다는 얘기로 둘러대고 연기했을 정도로…….
내가 받을 상처 하나까지도 마음 깊이 신경 써주는 남자가…….
하나부터 열까지 머릿속에 나밖에 없는 남자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겨울은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러한 겨울의 생각을 무참히 밟아 버리듯, 진동하는 휴대전화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강시후로부터 온 문자였다.
지금의 그가 아닌, 미래에서 온 서른아홉의 강시후.
[이것만 기억해. 너는 날 버려야 살 수 있어.]
마치 지금 겨울의 마음을 꿰뚫고 있듯이, 그는 또다시 겨울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넌 절대 내 곁에서 살 수도, 행복해질 수 없어. 너도 곧 그걸 알게 될 거야.]
……대체 왜.
왜 우리가 함께할 수 없다는 건데.
그깟 내가 죽는 미래, 바꾸면 되는 거 아니야?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으니까 대처하면 되는 거 아니야……?
왜 그렇게 나를 떨어뜨려 놓지 못해서 안달인데…….
입술을 깨물며 휴대전화를 움켜쥐자 곧바로 문자가 뒤이어 도착했다.
[아마도 지금의 나는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겠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겨울의 미간이 슬며시 좁아졌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글쎄. 무슨 말일까.]
휴대전화를 쥔 겨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설마, 내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 더 있는 건가……?
[잘 찾아봐. 지금의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너한테 숨기는 중일 테니까.]
……아직도 숨기고 있는 게 있다고?
그 말에 겨울의 심장이 뾰족한 것에 긁힌 듯이 욱신거렸다.
점차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느끼며 겨울이 휴대전화를 세게 움켜쥐었다.
***
재환과 헤어진 뒤, 대리운전 기사를 불러 아파트에 도착한 시후는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집으로 올라가는 길이 이토록 두렵고 막막했던 적이 없었다.
‘나중에 가서 후회할 일 만들지 않으려면, 소중한 사람한테 거짓 없이 솔직하게 부딪쳐보는 게 최고더라.’
재환의 말이 맞았다. 언제까지 숨기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선택이나 판단은 겨울의 몫이었고, 그녀가 헤어나올 수 없는 충격과 상처를 받더라도 진실을 알려야만 했다.
위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바라보며 시후는 긴장으로 땀이 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잔혹한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뼈아프도록 어렵겠지만, 그녀의 선택이 어떻든 받아들여야겠지만…….
이기적이게도 여전히 겨울이 제 손을 놓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와 이루어질 수 없는 수백 개의 이유를 상쇄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너무도 컸기에.
비록 용서를 받을 수는 없더라도, 서로 사랑할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고 믿고 싶었다.
……부디.
진실을 알게 되어도 나를 버리지 말아줘.
제발 내 손을 놓지 말아줘…….
시후는 그렇게 속으로 수없이 되뇌며 굳은 각오로 비밀번호를 눌렀다.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밀며 내부로 들어섰으나 집안은 어두컴컴했으며, 여린 숨 조각 하나 없이 고요했다.
아직 집에 오지 않은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신발을 벗고 복도를 따라 걷자 저 멀리 문틈 사이로 하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겨울아?”
시후는 빠르게 뛰기 시작한 제 심장을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 서재의 문고리를 잡았다.
천천히 문을 열자 새하얀 조명을 받은 겨울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로 시후를 바라보았다.
파랗게 질린 겨울의 눈동자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두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소름 끼치도록 고요한 실내로 한참 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더없이 잔혹한 예감이 든 시후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
심장이 추락하여 아래로 처박혔다.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어 숨을 쉴 수 없었다.
겨울이 보고 있었던 PC에 연결된 USB는 시후가 서랍에 넣어두었던 그 USB였다.
제이지코스메틱의 합병 프로젝트 파일이 담긴.
“말해.”
무표정한 겨울의 눈가에서 투명한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언제부터 나, 갖고 놀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