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각자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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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각자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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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각자의 사정
2022.06.19.
서른아홉의 강시후에게서 문자를 받은 후로부터 겨울의 마음은 내내 심란했다.
‘잘 찾아봐. 지금의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너한테 숨기는 중일 테니까.’
……대체 뭘 또 숨기고 있다는 걸까.
우리가 절대 함께할 수 없는 이유란 게 도대체 뭔지…….
한없이 깊은 상념에 빠져 있자 어느덧 주형의 차는 겨울의 집 앞에 도착했다.
“조심히 들어가, 겨울아.”
“응. 고마워. 다음에 보자.”
주형에게 인사한 뒤 눈에 띄지 않게 모자를 푹 눌러쓴 겨울은 걸음을 재촉해 아파트 안으로 들어섰다.
빠르게 상승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붉은 숫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이상하게 초조한 기분이 몰려왔다.
최고층에 도착해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동안에도 손에 땀이 차올라서 몇 번이고 삐끗하다가 겨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온 집안의 불이 꺼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시후는 귀가하기 전인 듯 보였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자 묘한 한기가 겨울을 휘감았다.
‘……강시후가 나한테 숨기고 있는 비밀이란 게…….’
그게 대체 뭘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그가 침실에서 조용히 나와 서재로 향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 겨울이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 시후의 서재로 들어가 불을 켰다.
“…….”
방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컴퓨터를 가만히 바라보던 겨울이 무거운 걸음을 옮겨 전원 버튼을 켰다.
밝은 화면의 불빛이 망막을 두드리자 홀린 듯이 각종 파일을 무작위로 클릭해보았다. 그러나 전부 업무 자료에 관한 것뿐, 유달리 이상하게 느껴질 만한 것은 없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일순 남편을 믿지 못해 그의 컴퓨터나 뒤지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후가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정리하고 서재에서 나가기로 하며 PC의 전원을 끄려던 순간이었다.
문득 두 번째 서랍이 미세하게 열려 있다는 걸 눈치챈 겨울이 멈칫했다.
가만히 바라보던 겨울은 저도 모르게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서 발견한 것은 작은 USB 하나였다.
“…….”
원인 모를 불길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서늘해진 가슴을 부여잡은 겨울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 USB를 PC에 연결했다.
단자를 끼워 넣자마자 화면으로 떠오른 창에는 수많은 파일이 가나다순으로 빼곡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KU그룹 자료 같은데…….”
넥스트게임즈와 관련된 문서일 것으로 추측했으나 완전히 빗나갔다. USB에 들어 있는 파일은 모두 KU그룹과 관련된 자료들이었다.
“……이걸 왜 오삐가 갖고 있는 거지?”
각종 계열사의 재무제표와 기밀로 추정되는 프로젝트 자료들은 전부 시후에게 필요한 것들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빠르게 스크롤을 내리던 겨울은 문득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제이지코스메틱 합병 프로젝트.]
그 글자가 겨울의 머리를 총알처럼 관통했다.
……제이지코스메틱?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아버지의 회사 이름에 겨울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일순 호흡이 가빠지고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이 머릿속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마른침을 삼키자 뻐근해진 심장이 쿵쿵 아프게 뛰었다.
사정없이 떨리는 동공으로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그 파일을 눌렀다.
“…….”
겨울의 심장이 엄청난 속도로 박동하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혼란에 빠진 갈색 동공이 풍랑을 맞은 듯이 요동쳤다.
도무지 믿기 어려운 내용을 읽어내려가는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문서는 아버지의 회사인 제이지코스메틱을 인수하기 위해 강성호가 뒤에서 손을 쓴 기록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마우스를 쥔 손이 거칠게 떨렸다. 파랗게 물든 겨울의 입술이 파르르 경련했다.
말로 채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파도처럼 몰아치고 겨울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대체 이게 무슨 문서야.
스크롤을 내리며 문서를 읽어내려갈수록 겨울의 호흡이 점점 더 가빠졌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 때문에 암전된 머릿속은 좀처럼 굴러갈 기미가 없었다.
……혹시 조작된 문서인가? 아니면 정말 사실을 기록한 문서?
하얗게 질린 겨울은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으로 스크롤을 끝까지 내렸다.
“처음부터…….”
이 모든 게 강성호의 계획이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겨울의 예상대로 아버지의 횡령죄마저 전부 그 인간이 꾸민 계략이었다.
일순 겨울의 머릿속으로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것은 억울하다고 외쳤던 어린 시절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현실감이 없을 만큼 잔인한 진실이었다.
휑한 얼굴로 문서를 바라보고 있던 겨울은 문득 서재의 문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겨울아?”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온 시후의 얼굴을 겨울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딘가 불길함을 느끼는 듯이 그의 동공이 가늘게 떨리더니 이내 겨울이 켜놓은 PC 화면으로 향했다.
겨울의 심장이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제발 아니라고 해줘.
이 문서는 강시후 너도 모르는 내용이었다고 말해.
아니, 차라리 이 문서가 전부 거짓이라고 말해…….
그러나 겨울의 실낱같은 희망은 시후의 표정을 본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놀란 듯 딱딱하게 굳은 채 말없이 겨울을 바라보고 있는 시후의 창백한 얼굴은 이 문서가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백 마디의 말보다 그 표정 하나가 모든 걸 말해주는 듯했다.
울컥 감정이 몰려오며 눈가에 뜨겁게 열이 올랐다.
……결국 나는 또 너한테 놀아난 거구나.
“말해.”
볼 위로 흐르는 눈물을 느끼며 겨울이 고저 없는 목소리를 내었다.
“언제부터 나, 갖고 놀았는지.”
이보다 암담하고 참혹할 수는 없었다.
대체 강시후라는 남자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 걸까.
날 사랑한다고 했던 말도, 날 소중하게 안아주었던 그 온기도…….
모든 게 거짓이고 연극이었던 건가?
이토록 몇 번이고 견딜 수 없는 배신감을 안겨준 남자는 그가 처음이었다.
“……당장 말해. 여기 적혀 있는 게 전부 사실이야?”
부정하고 또 부정하며 물었으나 시후는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우리 집이 그렇게 된 게…… 전부 오빠 아버지 계획이었다는 거야?”
“…….”
“우리 아빠를 억울하게 쫓아내서 죽음으로 몬 것도…… 다 네 아버지가 벌인 일인 거고.”
끝없이 이어지는 침묵은 무언의 긍정이었다.
허탈해진 겨울이 공허한 숨을 터뜨렸다.
“……다 알고서 결혼했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온몸의 수분이 다 증발하는 기분이었다.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다 설명할게.”
시후가 손을 뻗어 겨울의 어깨를 붙잡으려 하자 그녀가 거칠게 뿌리치며 물러났다.
“나한테 손대지 마. 소름 끼치니까.”
“…….”
표독스럽게 뱉어진 말에 시후는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 섰다.
“더는 거짓말할 생각 하지 마.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말해.”
“……우리 여행 갔다 온 날, 그때 강 회장 집무실에 있는 금고에 들어갔다가 알게 됐어.”
그날은 이혼한다는 기사가 뜨고 겨울이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은 날이었다.
“하…….”
헛숨을 터뜨린 겨울이 이를 악물었다.
어쩐지 그날 집에 왔을 때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진실이 숨겨져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럼 그때 바로 말했어야지!”
기가 찼다. 토악질이 나왔다.
“다 까발려서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게 했어야지! 왜 지금까지 입 다물고 질질 끌었는데?”
이건 명백한 배신이자 기만이었다.
“난…… 나는…….”
감정이 북받친 겨울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모든 걸 감수하고도 오빠 옆에 있으려고 했어. 강시후 널 떠나야 하는 수백 개의 이유를 다 뒤로 하고……! 사랑이란 감정 하나만으로 네 옆에 있으려고 했다고.”
울컥한 겨울이 두 손으로 머리를 붙잡으며 절규했다.
“근데…… 그런 날 또 병신으로 만들어?”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토록 초라하게 느껴질 수는 없는 법이었다.
“대체 왜 말 안 했어, 왜!”
“말하려고 했어.”
괴로운 음성이 억눌린 성대를 태우며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때 네가 잃어버렸던 1년간의 기억까지 돌아와서…… 이미 괴로워하는 너한테 더 큰 충격을 줄 수 없었어.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어. 네가 받을 상처가 무서워서…….”
솔직하게 털어놓았으나 겨울은 전혀 납득할 수 없었다.
어둠에 젖은 얼굴로 시후를 똑바로 응시하던 겨울이 또다시 허탈한 숨을 뱉었다.
“그 상처 준 사람, 강시후 너야. 지금 이 사실을 또 숨겨서 나한테 비수 꽂은 것도 너고!”
“……미안해.”
“하지 마. 듣고 싶지 않아.”
“정말 미안해…….”
“하지 말라고!!!”
참아왔던 감정이 터져 확 내지른 겨울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어 격양된 빛이 창백한 얼굴 위로 만연했다.
“강시후 네 아버지는 쓰레기라는 말도 아까울 정도의 악마야. 그리고 넌 그 아들이고! 난 원수도 몰라보고 좋다고 네 품에 안겼고!”
차라리 전부 거짓이라고 누군가 말해줬으면 좋겠다.
이게 다 질 나쁜 꿈이라고 아무나 속삭여줬으면 했다.
그러나 피부로 와닿는 서늘한 새벽의 한기는 지금 이 상황이 더없이 잔인한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 겨울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시후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해야 복수할 수 있을까?”
“…….”
“내가 여기서 목매달아 죽으면 네가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울까?”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시후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맥 풀린 얼굴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겨울이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모든 게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이 집에 그와 함께 남아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조차 치가 떨렸기에 무작정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
한편 술자리가 파한 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희수는 왠지 속이 답답해서 무작정 길거리를 따라 걸었다.
집까지 보도로 가기에는 무리가 있는 거리였으나 조금 우울한 기분을 타파하기 위해 다리를 열심히 움직였다.
“그래도 난 겨울이 네가 부럽다…….”
그렇게 죽을 만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그 사랑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게…….
그게 얼마나 부러운 일인지.
픽 웃음을 터뜨린 희수의 입꼬리가 소리 없이 잦아들었다.
‘……내 사랑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으니까.’
그것도 초라하게 식어서 보잘것없이 사그라들었으니까.
입술 끝을 깨문 희수가 상념에 잠긴 채 신호등 앞에 섰다.
가만히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일순 어질하게 현기증이 몰려와 비틀거리다가 건널목 쪽으로 휘청거렸다.
흐려졌던 시야가 다시 돌아오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저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는 택시 한 대였다.
빠아아앙!!!
놀라 다리에 힘이 풀린 희수가 그대로 바닥에 털썩 넘어졌다.
엄청난 속도로 질주해오던 차는 다행히 희수의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아가씨 뭐 하는 거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운전석 창문을 내린 택시 기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 눈깔은 장식이야?! 정신을 얻다 두고 다니길래 앞도 못 봐?!”
당혹감과 두려움이 몰려온 희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서둘러 일어나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었으나 너무 놀란 탓인지 또다시 넘어졌다.
빠아아아앙!
또다시 엄청난 경적이 뒤를 잇고 화들짝 놀란 희수는 손발이 벌벌 떨리고 눈물이 핑글 돌았다.
어쩔 줄 모르고 또다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택시의 뒷좌석 문이 열리고 그 안에 타고 있던 승객이 내렸다.
“희수야, 괜찮아?”
걱정스럽게 물음을 던지는 그는 희수의 전 남자친구 재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