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널 사랑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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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널 사랑하는 마음
2022.06.22.
“희수야, 괜찮아?”
걱정스럽게 물음을 던지는 그는 희수의 전 남자친구 재환이었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십니까?”
미간을 좁힌 재환이 택시 기사 쪽을 쏘아보며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엄밀히 따지면 주황 불에 정차 안 하시고 오히려 더 세게 액셀 밟은 기사님 잘못 아닙니까?”
논리적으로 따지자 할 말이 없는 듯 기사가 헛기침하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일어나, 희수야.”
곧바로 희수를 부축해 일으킨 재환이 택시 요금을 결제한 뒤 그녀를 데리고 도보에 있는 벤치에 앉혔다.
“다리 괜찮아? 안 삐었어?”
“응, 괜찮아…….”
“내가 잠깐 볼게.”
조심스럽게 희수의 구두를 벗긴 재환이 가느다란 발목을 쥐고 다친 곳이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은 것 같네.”
“……고마워, 오빠.”
희수가 조금 우물쭈물하며 답하자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저번에 소개팅에서 보고 오랜만에 보네.”
“응, 그러네.”
재환이 나직하게 말을 꺼내자 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희수의 앞에서 뒷머리를 문지르며 잠시 머뭇거리던 재환이 용기를 내어 입술을 벌렸다.
“……희수 너만 괜찮으면 우리 술 한잔할래?”
“뭐? 지금?”
“응. 시간이 너무 늦었나?”
“……아니, 늦은 게 문제가 아니라…….”
자정이 넘은 시간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우리가 같이 술 마실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오래전 헤어진 연인과 단둘이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것만큼 이상한 일도 없었다.
재환의 앞에서 괜찮은 척, 쿨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고 있을 여유도 이제는 없었던 희수가 솔직하게 선을 그었다.
“못 들은 걸로 할게. 그럼 난 이만…….”
자리에서 일어난 희수가 서둘러 뒤를 돌았다.
쫓기듯이 빠른 걸음걸이로 걸어가는 희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재환의 목울대가 낮게 움직였다.
“너한테 꼭 말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그 말에 멈칫한 희수가 뻣뻣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잠깐만 시간 좀 내줘.”
함께 근처의 칵테일바로 향한 재환과 희수는 바에 나란히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이미 겨울과 술을 꽤 많이 마신 상태였던 희수는 조금 혼미한 정신을 느끼며 칵테일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게 뭔데?”
재환은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이내 덤덤하게 말을 꺼냈다.
“우리 헤어지기 전에 말이야…….”
희수와 결별하기 전, 재환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재앙이 있었다.
“실은 어머니가 아프셨었어.”
“……뭐? 어디가?”
“아버지 예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계셨잖아. 그런데 내가 군대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머니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셨었어.”
희수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 당시 재환에게서 조금도 듣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그리고 전신 마비 판정을 받으셨고.”
그제서야 떠오르는 것은 그 당시 부쩍 수심이 깊어 보이던 재환의 모습이었다.
그때는 그저 군대 생활이 힘들어서 그런가, 하고 넘겼으나 이런 내막이 숨겨져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 말 없었잖아.”
매번 군대에서 전화하거나 면회를 할 때면 그는 계속해서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게 속상하고 서운했으며, 더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희수 너한테 부담 주기 싫었어. 꼭 내가 군대에 가서 없는 동안 우리 어머니 봐달라는 것처럼 들릴 것 같았고…….”
“…….”
“게다가 그 당시에 어머니가 사고당하기 전에 사채를 쓰셔서, 그걸 대신 갚아야 하는 상황이었어. 그래서 너를 만나는 게 버겁게 느껴졌던 것 같아.”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과거의 일을 떠올린 재환이 씁쓸하게 헛웃음 쳤다.
“솔직히 말했어야 했는데…… 그땐 너한테 이런 말들 털어놓는 것도 다 창피하고 한심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숨기는 게 너한테 더 상처 될 거란 생각을 그땐 못 했어.”
“……지금 어머니는 어떻게 되셨는데?”
“돌아가셨어. 너와 헤어지고 난 뒤 한 달쯤 후에.”
희수는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교제했던 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재환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얼마나 친딸처럼 잘해줬었는지, 희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때는 재환도 없이 단둘이 쇼핑하러 갈 정도로 친 모녀처럼 친하게 지냈었다.
그래서 더 실망감이 들었던 것 같았다. 재환이 군대에 가자마자 갑자기 연락되지 않았으니까.
“……미안해.”
갑자기 스스로가 너무 어리고 한심하게 느껴져서 희수가 작게 소곤거렸다.
“뭐가?”
“그냥…….”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하지.”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자 조용한 술집의 클래식 음악만이 잔잔하게 흘렀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잔을 만지작거리던 희수가 나지막이 입술을 벌렸다.
“그래도 마지막에 찬 사람, 나 아니야. 그건 오빠도 알지?”
“……응. 맞아. 그래서 더 미안해.”
헤어지자고 말한 것은 희수였지만, 희수는 단 한 번도 그녀가 재환을 찼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 당시 재환은 말을 제외한 모든 언어로 희수에게 결별을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땐 너한테 헤어지자고 할 자신이 없었어. 근데 우습게도 동시에…… 누군가를 책임질 여력도 없었거든.”
담담한 고백에 희수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래도 우린 좋은 추억이 많았는데, 끝에 너무 많이 싸워서…… 좋았던 기억까지 흐려진 것 같아서 아쉬워.”
“……모든 연인이 헤어질 땐 예쁘지 않잖아. 사랑한다고 수백 번 더 말해도 헤어지잔 말 한마디로 끝나는 게 연인인데.”
희수의 말에 재환이 온더록스 잔을 가볍게 흔들며 웃었다.
“그래도 난, 우리가 사귀었던 6년의 세월 동안 좋은 날이 더 많았어.”
“……나도 그래. 지나고 나니까 제일 예뻤던 시간 같아.”
이별이라는 결말 앞에 퇴색되기에는 너무도 푸르고 아름다웠던 추억이었다.
과거의 향수에 젖은 희수가 살짝 시선을 떨어뜨리며 미소 지었다.
“좋다. 오빠의 진심을 알게 돼서. 이제야 제대로 마침표가 찍히는 느낌이네.”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했던 연애다운 연애였다.
이렇게 다시금 끝을 맺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고개 돌린 희수가 재환과 슬며시 눈을 마주쳤다.
“오빠는 나보다 더 세심하고 배려심 많은 여자 만나.”
진심 어린 속삭임에 재환이 숨소리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도 나보다 좋은 남자 만나서 행복해야 해.”
어둡고 추한 감정으로 얼룩진 결별이 아닌, 진정으로 서로의 행복을 빌어 주는 마지막이었다.
잔을 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가볍게 건배했다.
***
“……으.”
불빛 한 조각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희수는 숙취에 찌든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앓는 소리만 내었다.
그렇게 잠시 끙끙거리다가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린 희수가 메슥거리는 속을 부여잡았다.
“아, 토할 것 같…….”
말을 잇던 희수가 일순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멈칫했다.
놀라 동그랗게 뜨여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희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여, 여긴 어디지?”
너무 어두워서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호텔은 아닌 듯 보였다.
가슴이 서늘해진 희수가 엄청난 속도로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몸을 일으키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무언가 말랑말랑한 게 떡하니 잡혔다.
“……이게 뭐지?”
묘하게 익숙한 촉감에 저도 모르게 주물럭거리다가 흠칫 놀라 손을 떼었다.
“……!!!”
이불을 들춘 희수가 까무러치게 놀랐다. 비명을 내지르는 대신 제 입을 콱 틀어막았다.
넓은 침대의 옆자리에 누워 있는 것은 속옷 한 장 입지 않은 태고의 모습 그대로의 재환이었다.
이어 제 차림도 그와 다르지 않은 것을 뒤늦게 깨닫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친……! 미친! 미친! 이런 미친!!!’
커다랗게 뜨여진 동공에 한 차례 지진이 일어났다.
어쩔 줄 모르고 안달복달하다가 이내 혼이 나간 사람처럼 허둥지둥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챙겨 입었다.
아직까지 깨지 않은 듯한 재환의 눈치를 보며 양말까지 헐레벌떡 신은 뒤 현관으로 내달렸다.
무작정 재환의 집으로 추정되는 곳을 뛰쳐나온 희수가 곧장 시간을 확인하자 새벽 5시 45분이었다.
“하…… 민희수, 이 미친X…….”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절망하고 또 절망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제 그렇게 훈훈하게 결말을 맺어놓고, 뜬금없이 원나잇을 하다니…….
그것도 6년이나 사귀었던 전남친 신재환과!!!
완전히 멘탈이 나간 희수는 집에 도착해서도 옴짝달싹 못 하고 괴로워할 뿐이었다.
‘대체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그냥 깔끔하게 서로 넘어가자고 해야 하나?’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 희수가 괴성을 내지르며 집 안을 방방 뛰어다녔다.
그 혼란의 중심에 빠진 상태로 아침까지 온갖 난리를 피우던 희수는 뒤늦게 월요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욕실로 다이빙했다.
곧장 깨끗하게 샤워하고 출근 준비를 마친 뒤, 헐레벌떡 현관을 나섰다.
지각하지 않기 위해 초인적인 힘으로 내달려 아슬아슬하게 버스를 잡아탄 희수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었다.
저질 체력의 한계를 다시금 느끼며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핸드폰으로부터 진동이 느껴졌다.
곧장 액정을 확인하니 아니나 다를까, 재환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필름이 완전히 끊겨 기억은 전혀 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술김에 번호 교환까지 한 모양이었다.
받을지 말지 잠시 고민하던 희수는 에라 모르겠다,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희수야. 어제 잘 들어갔어?
그러나 희수의 염려와는 달리 재환의 목소리는 너무도 명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어? 어……. 잘 들어갔지.”
-근데 우리 어제 몇 시까지 마신 거야?
“……뭐?”
-그게, 너무 과음했는지 필름이 끊겨서 기억이 하나도 안 나서.
휴대전화를 쥔 희수의 손이 파르르 가늘게 떨렸다.
“……기, 기억이 안 난다고?”
-응. 그냥 눈떠보니까 집 침대에 누워 있던데? 집에 어떻게 온 건지도 모르겠어. 넌 기억 나?
“……어……니? 음…….”
-별일 없었지, 어제?
당황한 희수가 커다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어, 어. 그럼. 없었지…….”
마른침을 삼킨 희수가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근데 오빠, 나 이동 중이라서 일단 끊을게.”
-어? 잠깐…….
무작정 전화를 끊어버린 희수가 멍하니 넋을 놓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기억을 못 한다고?
어젯밤에 우리가 잔 것도 기억이 전혀 안 난다고?
“……으아아아악!!!”
역대급 흑역사에 버스가 떠나가라 괴성을 내지르자 놀란 사람들이 바퀴벌레 떼처럼 멀어졌다.
‘민희수 이 미친X!!!’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쥐어뜯으며 한강 물이 뜨뜻한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하지만 12월의 강물은 너무도 혹독했으므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절규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결국 사고를 치는구나, 내가!’
오래전 헤어진 전 남자친구랑 미쳐서 하룻밤 잔 것도 모자라…….
그 전 남자친구는 잔 걸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그냥 죽자, 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