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돌아와
(77/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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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돌아와
2022.06.26.
시후와 한집에 있을 수 없었던 겨울은 무작정 집에서 나와 근처의 비즈니스호텔에 체크인했다.
오늘부터 다시 일을 나가기로 했기에 일하려면 쪽잠이라도 자야 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아침을 맞았다.
몸이 천근만근이었으나 출근은 해야 하기에 비척비척 욕실로 향해 세면대 물을 틀었다.
찬물에 힘없이 세수하다가 고개를 드니,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초라해 보였다.
“…….”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보잘것없이 허름한 인생,
원수나 다름없는 남자와 사랑에 빠질 만큼 지독하기까지 한 운명.
무표정으로 한참 동안 거울을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한번 쓸어보았다.
이내 표정을 굳힌 겨울이 곧바로 화장실 밖을 나섰다.
“이게 뭐야, 겨울 씨?”
출근하자마자 겨울이 건넨 사직서를 본 실장의 미간에 고요히 주름이 잡혔다.
“이번 달까지만 일하고 그만두려고 해요.”
갑작스러운 사직 선언에 당황한 실장이 할 말을 잃고 겨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번복은 절대 없다는 듯 겨울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담담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많이 배려해주시고 믿어주셨는데, 이렇게 떠나게 돼서 죄송합니다. 실장님.”
“다시 생각해볼 수는 없는 거야?”
“……죄송합니다.”
고개를 떨구는 겨울의 눈 밑에는 짙은 어둠이 음울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 어떤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낯빛에 실장은 겨울의 생각을 돌리길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유는 더 안 물어볼게. 그동안 고생 많았어.”
손을 뻗은 실장이 겨울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며 소리 없이 웃었다.
“남은 시간도 힘내줄 거지?”
“그럼요. 감사해요, 실장님.”
겨울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 그녀에게 더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한 달도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동안 책임을 지고 맡은 바를 마무리하겠다고 다짐하며 실장실을 나왔다.
첫 번째 예약 손님을 받을 준비를 하기 위해 탈의실로 향한 겨울이 캐비닛 문을 열었다.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있는데, 소리 없이 옆으로 다가온 희수가 힘없이 옷을 벗으며 겨울에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
한숨을 푹 내쉬며 뇌까리는 목소리는 언행 불일치의 표본을 보여주는 듯했다.
“왜 그래, 뭔 일 있었어?”
도저히 정상 범주로 보이지 않는 모습에 겨울의 얼굴로 걱정이 드리웠다. 그러나 정작 고개 돌린 희수는 전날보다 더 안색이 나빠 보이는 겨울을 보고 기겁했다.
“그러는 너야말로 왜 상태가 더 안 좋아졌냐?”
“……음.”
“…….”
차마 서로에게 전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 털어놓을 수 없었던 두 사람은 그저 돌림노래처럼 연달아 한숨을 쉴 뿐이었다.
“겨울 언니!”
음울한 탈의실 안으로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우정이 겨울을 발견하자 곧장 그녀에게로 달려들었다.
“언니, 언니! 실장님한테 들었는데 이번 달까지만 일한다면서요?!”
“아, 우정아.”
“가지 마요! 언니 없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울상을 짓고 양팔로 겨울을 끌어안은 우정이 투정을 부렸다. 제 품을 파고드는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은 겨울이 입술을 열어 작게 속삭였다.
“미안. 하지만 이미 마음 정했어.”
“뭐? 너 이번 달까지만 일한다고?”
금시초문인 소식에 놀란 희수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응. 그러려고.”
“야! 그걸 왜 진작 말 안 해주고……! 아니, 그보다 왜 그만두는 건데?”
“……그냥.”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고개를 들었다가 내린 겨울이 말을 이었다.
“가끔 그럴 때 있잖아. 다 그만두고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을 때. 그게 지금인 것 같아.”
난해한 말에 희수와 우정의 얼굴에 물음표가 띄어졌다. 딱히 이해받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기에 어깨를 으쓱한 겨울이 유니폼 깃을 정리하고 가방을 캐비닛 안에 넣었다.
문을 닫으려다가 멈칫한 겨울이 잠시 가방을 빤히 바라보다가 손을 집어넣었다. 전날 밤부터 꺼두었던 휴대전화를 켜고 액정을 확인하였으나 부재중 전화는커녕 문자 한 통 없었다.
“……하.”
벌어진 입술 틈으로 헛웃음이 터졌다.
더는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겨울은 휴대전화 전원을 도로 끈 뒤 캐비닛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소리샘으로…….
한편 아침 회의를 마치고 나온 시후는 겨울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불통이었다.
전날 겨울이 그렇게 집을 나간 뒤, 얼마 가지 않아 그녀를 뒤쫓아 나갔지만 결국 찾지 못해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나쁜 마음이라도 먹은 건 아닐까, 밤새 온 서울을 돌아다니다가 근처의 호텔에서 체크인한 기록을 확인하고 그제야 집에 돌아와 출근 준비를 했다.
며칠째 잠을 거의 자지 못해 그늘이 깊게 팬 눈 밑을 누르며 시후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겨울이 걱정되고 보고 싶었으나, 지금은 차마 그녀를 볼 낯이 없었다.
***
다음 날, 퇴근한 겨울이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며 멍하니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한창 퇴근 시간이었기에 거리엔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풍경이 망막을 자극했다.
사랑하는 연인과 재잘거리며 거리를 걷는 사람,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걷는 모녀, 퇴근길에 누군가와 전화를 하며 신나게 웃음 짓는 직장인.
더없이 평범한 타인의 일상이 오늘만큼은 겨울의 가슴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그냥 저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아빠랑 엄마, 동생,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평범하게 살다가, 사랑하는 남자와 새 가정을 꾸리는 보통의 삶을 살고 싶었을 뿐인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참담하고 억울한 기분을 감추지 못한 겨울이 입술을 깨물었다.
더는 창밖을 보고 있을 수 없어 시선을 거두었다. 아까부터 줄곧 가방 속에 집어넣은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전날부터 온종일 꺼둔 채 가방에서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휴대전화를 무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환하게 밝아진 액정 화면으로 떠오른 것은 시후로부터 온 몇 통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 하나였다.
[집에 돌아와, 겨울아.]
“…….”
문자는 구구절절한 변명도 사죄도 없는 짧은 문장 한 줄이었다.
한숨 쉰 겨울은 휴대전화를 가방에 도로 넣었다.
“기사님, 죄송한데 월계동으로 가주세요.”
겨울이 도착한 곳은 엄마 혜숙과 남동생 이경이 함께 지내고 있는 작은 아파트였다.
이제는 낯설기만 한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가자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엄마!”
“어머, 우리 딸 웬일이야!”
하나뿐인 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된장찌개를 끓이다 말고 국자를 든 채 현관으로 뛰어온 혜숙이 환하게 웃으며 겨울을 반겼다.
“웬일은 무슨. 그냥 엄마 보고 싶어서 왔지.”
“아휴, 오랜만에 보니까 더 예뻐졌네, 우리 딸. 강서방이 잘해주든?”
대답하는 대신 소리 없이 미소 지으며 배를 문질렀다.
“엄마. 나 배고파.”
“그래? 잠깐만 여기 앉아서 기다려 봐. 엄마가 맛있는 밥 차려줄게.”
귀한 손님이 찾아온 것처럼 혜숙은 겨울을 식탁에 앉히고 헐레벌떡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그냥 밥이랑 찌개만 달라는 겨울의 말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재료들로 순식간에 실력 발휘를 한 혜숙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진수성찬을 차렸다.
“어때. 맛있어?”
“응. 오랜만에 엄마 밥 먹으니까 좋다.”
시후와의 결혼 생활 내내 그리웠던 맛에 겨울이 히죽 웃으며 수저를 바쁘게 움직였다.
“그런데 무슨 일 있니? 피골이 상접한 게 안색이 너무 안 좋네.”
“있기는 무슨…… 얼마나 요즘 행복한데.”
억지로 들어 올린 입꼬리가 경련하며 욱신거렸다. 자칫 속마음까지 흘러나올 것 같아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엄마 카페는 요즘 좀 어때?”
겨울이 묻자 혜숙이 작게 한숨 지었다.
“장사가 잘 안돼서 고민이야. 월세도 높고, 직원들 월급도 부담되고……. 그래도 옛날 생각하면 엄마는 이 상황이 감지덕지야.”
“…….”
“지금 이렇게 사람답게 살게 된 거, 전부 우리 딸 덕분이잖아. 엄마가 능력이 없어서 우리 똑똑한 겨울이 대학도 못 보내주고…… 어려서부터 일 나가게 시키고.”
“아니야. 난 괜찮아. 이경이가 명문대 가서 내 한도 풀어줬는데, 뭘. 엄마도 건강 많이 좋아졌고…….”
겨울이 흐릿하게 웃었다.
“난 진짜 이제 아무런 미련 없어.”
“……강 서방이랑은 잘 지내지? 괜히 걱정되네.”
“그럼, 잘 지내지. 내가 말했잖아. 나 기억 전부 돌아왔다고.”
“…….”
“나랑 오빠가 얼마나 서로 사랑했는지, 어떻게 결혼까지 했는지, 내가 얼마나 행복한 신부였는지까지…… 다 기억났다고.”
겨울은 웃으며 연기했다. 마치 강시후와의 결혼을 준비하며 행복한 새신부인 양 연기했던 그때처럼.
“언제든 힘든 일 있으면 말해. 우리 딸. 엄마가 항상 미안하고 고마워. 응?”
혜숙은 겨울의 왼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따스하게 속삭였다. 제 손에 감긴 온기에 울컥 코끝이 찡해진 겨울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곧바로 욕실로 향한 겨울이 문을 닫고 벽에 기대섰다. 동시에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에 촉촉한 물기가 고였다.
……엄마.
사실 나 하나도 잘 못 지내.
어떻게 해야 할지 길을 잃은 기분이야.
“……으흑…….”
혜숙은 제이지코스메틱을 몰락시키고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이 강성호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강시후와의 결혼을 허락해준 혜숙이 진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괴로워하며 자책할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
“……엄마.”
“응.”
11시를 넘긴 느지막한 밤, 잠자리에 누운 겨울은 자그마한 소리로 옆에 누워 있는 혜숙을 불렀다.
“우리 내년에 외국으로 떠날래?”
“……뭐?”
“이경이도 이제 대학 졸업이고…… 엄마도 카페 너무 힘들잖아. 한국에서 힘든 거 다 정리하고……. 외국 가서 오순도순하게 살자. 어때?”
“강 서방은 어쩌고?”
“…….”
“너희 혹시 싸웠니?”
혜숙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겨울은 등 돌린 채 뒤돌아보지 않았다. 얼굴을 보였다가는 제 맘을 전부 들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겨울아. 강 서방이 너 많이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거 알지? 엄마랑 너희 아버지가 못다 준 사랑, 강 서방이 대신 채워주는 것 같아서 난 고맙고 좋아.”
겨울은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그 모습에 혜숙도 뭐라 말을 덧붙이지 않고 그녀의 등을 한번 토닥여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고요한 방 안으로 시계 초침 소리만이 가득할 때.
겨울은 돌연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침실을 나섰다.
“누나, 어디 가?”
거실에서 야식을 먹던 이경이 물었으나 외투를 챙겨 입은 겨울은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를 지나쳐 무작정 현관 밖으로 나섰다.
멀뚱멀뚱하게 그 뒤를 바라보던 이경이 뒷머리를 문지르고 있는데, 뒤이어 방에서 나온 혜숙이 숨소리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꼭 제 아빠랑 나 연애 적 보는 것 같다니까.”
흔한 부부싸움인 줄로만 알고 있는 혜숙은 마냥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
겨울은 도저히 밀려오는 울분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친정에 다녀오면 조금 진정될 거로 생각했으나 가슴 속 요동은 더욱더 커질 뿐이었다.
이대로면 미쳐버릴 것만 같아 무작정 택시를 타고 시후가 있을 집으로 향했다.
한껏 격양되어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갔으나 내부는 별다른 인기척 없이 조용했다.
복도를 따라 침실 쪽으로 걸어가던 겨울의 걸음이 점차 느려지더니 우뚝 굳었다.
어느덧 자정을 넘은 시간이었다.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머뭇거리던 겨울은 도로 집을 나서기 위해 뒤를 돌았다.
“……왔어?”
그 순간, 서재 문 앞에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시후와 눈이 마주친 겨울이 주춤했다.
며칠 만에 마주한 시후의 얼굴에 겨울의 눈동자가 하릴없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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