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물증
(87/112)
87. 물증
(87/112)
87. 물증
2022.07.31.
단서를 잡으려면 일단 오민주를 만나서 얘기해봐야겠다고 생각한 시후는 곧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없는 휴대전화 번호라는 응답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의도적으로 만나기를 피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생각에 빠진 시후에게 겨울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나한테 방법이 있을 것 같아.”
“네가? 어떻게?”
“우리 고등학교 동창 중에 오민주 소속사인 한빛 매니지먼트에서 일하는 애가 있어. 걔한테 부탁하면 해결 방법이 있을 거야.”
곧바로 서재를 나선 겨울이 제 방 화장대에 충전시켜둔 휴대전화를 움켜잡았다.
***
“한재욱 감독 단독미팅이라고?”
고급스러운 한식당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민주가 옆에 따라온 매니저에게 되물었다.
“네. 프라이빗하게 만나기를 원해서 감독님하고 민주 씨 단둘이 미팅하길 원한다고 해요.”
“알았어. 차에서 기다려.”
3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민주는 식당 직원의 안내에 따라 룸으로 이동했다.
또각또각 도도한 걸음걸이로 복도를 따라 걷는 동안 민주는 기분 좋게 웃으며 행복회로를 돌렸다.
‘그 콧대 높은 인간이 웬일로 둘이서 미팅을 하자고 해?’
영화감독 한재욱은 자타공인 흥행보증수표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근래 민주가 출연했던 작품들이 줄줄이 참패를 맞았었기에 더더욱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천만 배우의 반열에 오르는 상상을 하자 입가에서는 절로 웃음이 흘렀다.
함박웃음을 지은 채로 문을 열고 룸 안으로 들어선 민주의 얼굴에 핏기가 바싹 말랐다.
예상치 못한 인물의 모습에 놀란 민주의 두 눈이 커다랗게 뜨여졌다.
“……시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한재욱 감독이 아닌 강시후였다.
제 눈이 잘못된 건가 싶어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는 민주의 손이 잘게 떨렸다.
“네가 여길 어떻게…….”
말끝을 길게 늘이던 민주가 멈칫했다.
일순 시후가 자신과 계형석 감독의 불륜 사진을 갖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제 목숨줄을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 미안해.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기로 했는데……. 직원이 룸을 착각했나 봐.”
당황한 민주가 허둥지둥 뒤를 돌아 나가려고 문에 손을 댄 순간이었다.
“앉아.”
낮은 음성이 총성처럼 울렸다.
“나야. 널 부른 사람.”
느껴지는 위압감에 민주의 가슴이 섬뜩해졌다.
“뭐……?”
지금껏 시후가 먼저 자신을 찾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늘 민주가 일방적으로 그에게 치대며 쫓아다녔을 뿐.
“날 왜…….”
“두 번은 말 안 해. 앉아.”
숨통을 틀어쥐는 목소리에 민주의 여린 숨이 뚝 끊겼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음성에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뚫어져라 주시하는 시선에 발이 묶인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긴장한 민주가 마른침을 삼키고 애써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알았어.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데 너무 무섭게 그러지 마.”
옅게 떨리는 손으로 의자를 빼내 뻣뻣하게 앉았다.
이내 모든 걸 꿰뚫어버릴 것처럼 거센 시선이 민주의 얼굴을 위로 쏟아졌다.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만 말하지.”
매서운 눈빛에 민주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아버지가 비자금의 존재를 알고 계셔.”
민주의 동공이 거칠게 뒤흔들렸다.
얼어 있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시후를 바라보던 민주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얼굴색을 바꿨다.
태연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 들어 보인 민주가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난 지금 네가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
흐트러진 것은 잠깐이었다. 늘 해오던 게 연기였기에 가면을 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상한 말이나 하고……. 서운하다, 시후야.”
애써 말을 돌리며 주의를 환기했으나 그런 얕은수에 놀아날 상대가 아니었다.
“강창영과 유서진의 죽음이 진짜 사고사라고 생각해?”
웃고 있던 민주의 입가가 서늘하게 굳었다.
“타살이야.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을 알고 강 회장이 유서진과 강창영을 죽이라고 사주한 거겠지.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니까.”
“……저기, 시후야. 왜 자꾸 이상한 말을……. 난 진짜 네가 뭐라는 건지 모르겠어. 알아듣게 말해줄래?”
민주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미간을 좁히며 앞에 놓인 물잔을 들어 꿀꺽꿀꺽 들이켰다.
속이 타는 듯 한잔을 모조리 비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시후의 눈매가 매섭게 길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는 민주의 얼굴 아래 숨겨진 불안을 보며 시후는 서서히 확신을 키워나갔다.
“강창영이 빼돌린 공금을 네가 갖고 있다는 걸 강 회장이 알게 되면, 넌 언제든 소리소문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뜻이야. 아마도 자살로 위장해서 죽임을 당하겠지.”
그 말에 등 뒤로 소름이 돋아난 민주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속이 울렁거리고 정신이 혼미했으나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고 입술을 벌렸다.
“……나, 나는 정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만 일어날게.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강창영이 아직 살아 있어.”
민주의 안면이 움찔 경련했다.
휴대전화를 꺼낸 시후가 미리 찍어둔 창영의 사진을 보여주자 민주의 눈이 커다랗게 뜨여졌다.
귀신이라도 만난 사람처럼 퍼렇게 질린 안색을 보며 시후는 제 심증에 확신을 굳혔다.
물론 이 정도 추궁으로 쉽사리 비밀을 제 입으로 털어놓을 만큼 어리숙한 여자는 아니었다.
빠져나가려고 기회를 살피는 사냥감의 숨통을 틀어쥐려면 미끼를 던져야 했다.
“그리고 이미 모든 걸 내게 밝혔지.”
민주의 치열이 덜덜 떨렸다. 머리가 부서질 것처럼 울렸다.
이제는 제 표정을 감추지도 못하는 민주를 보며 시후가 마지막으로 거대한 미끼를 던졌다.
“겨울이를 차로 치어서 죽이려고 한 게 오민주 너란 것까지 전부 실토했어.”
물론 어디까지나 떠보는 말이었지만, 어느 정도 심증은 갖고 있었다.
겨울이 기억을 잃었던 사고 현장에 때마침 오민주가 있었고, 우연히 겨울이 떨어뜨린 결혼반지를 주웠다는 게 이상하다고 내내 생각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우연히 사고 현장을 지나고 있었다는 민주의 말을 믿었던 적이 없었다.
“그게 무슨…….”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든 민주의 얼굴 위로 균열이 일었다. 심장이 발끝까지 내려앉은 민주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아니야! 함겨울을 죽이려고 한 건 내가 아니라 네 동생이야!”
이대로라면 혼자 모든 죄를 뒤집어쓰리라 판단한 민주는 무작정 큰소리쳤다.
“걔가 갑자기 왜 나한테 뒤집어씌우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때 창영이가 나한테 말했어. 함겨울을 죽일 거라고!”
민주의 외침에 시후의 눈썹이 세차게 올라갔다.
“그럼 당연히 넌 아버지가 함겨울을 처리한 걸로 알 거고, 부자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서 후계 자리는 온전히 자기 거가 될 거라고 나한테 그랬어……!”
진실을 맞닥뜨린 시후가 입안을 짓씹었다.
겨울이 당했던 교통사고는 단순히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고, 그 배후에는 창영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 네가 그 사고 현장에 있었던 진짜 이유는 뭐야.”
추궁하듯 꽂히는 시선은 칼날처럼 예리했다. 그 눈빛에 베인 듯 민주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오므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건…… 나도 아무리 그래도 사람인데, 함겨울 씨를 죽인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마음이 너무 찝찝해서…… 일이 어떻게 되는지 두 눈으로 봐야 할 것 같아서 갔어. 거기서 반지를 주운 거고.”
시후는 당장에라도 모조리 쓸어버리고 싶은 감정을 겨우 삼키며 입술을 짓씹었다.
겨울의 목숨을 위협하는 사람이 아버지뿐만이 아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그녀를 위험에 처하게 했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비자금은…… 나도 몰라. 진짜 아무것도 몰라.”
민주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부인했다.
순순히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쯤 예상했던 시후가 시선을 매섭게 내리깔았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에 욕심을 내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나 본데.”
“…….”
“네가 강창영의 비자금을 갖고 있다는 걸 강 회장이 알게 되면, 네 사망 보도가 언론에 깔리는 건 시간 문제야.”
창백해진 민주의 눈 밑이 퀭하니 떨려왔다.
“인기 여배우 오민주, 악플에 시달리다가 극단적인 선택……. 헤드라인은 이 정도겠지.”
거칠게 동요하던 민주의 얼굴이 참담해졌다.
“이 자리를 뜨면 곧바로 강 회장을 찾아가 네가 비자금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말할 거야. 이게 무슨 뜻인지 알지?”
“…….”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네 선택지는 하나야.”
겁에 질린 민주는 결국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뜨겁게 차오른 눈물을 떨어뜨리는 민주에게 시후는 작게 한숨을 쉬며 덤덤하게 입술을 열었다.
“난 널 살리기 위해 찾아온 거야.”
고저 없는 어조가 민주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눈꺼풀이 하릴없이 흔들리고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어머님하고 창영이가 내 통장에 넣어놓으라고 하긴 했지만, 그 이후로는 건든 적 없어.”
“…….”
“돌려놓을게. 전부 네 말대로 할게.”
시후의 회유에 모든 걸 털어놓은 민주가 눈물을 흘리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살려줘, 시후야…….”
지난 10년간의 연예계 생활로 인해 그 누구보다도 악독해졌던 민주는 사실 그 누구보다도 위태롭고 약한 사람이었다.
“이제 이런 더러운 일에 얽히지 말고, 네 살길 찾아서 떠나.”
지난 10년간 민주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 과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시후였기에 진심을 담아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떳떳하게 살아. 과거의 너에게 부끄럽지 않게.”
순수하고 열정으로 가득했던 스무 살의 오민주에게 당당하도록.
***
물증을 잡은 시후가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더 시간 끌 것도 없이 이 길로 강 회장을 찾아가 거래를 하기로 하며 거세게 액셀을 밟았다.
붉은 신호를 앞두고 전화를 하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휴대전화가 시끄럽게 진동했다.
창영을 보호하고 있는 의료원의 원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네, 대표님. 저기…….
“무슨 일이시죠?”
-그게…… 환자분이 사라지셔서요.
순간 제 귀를 의심한 시후의 눈썹에 세차게 올라갔다.
“누가 사라져요?”
-저희 병원에서 보호 중이었던 의식불명 환자분이요……. 경호원 두 분은 모두 둔기에 맞아 의식을 잃으셔서 지금 치료 중입니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겁니까?”
“네……. CCTV를 돌려보고는 있는데 행방은 전혀…….”
낮게 숨을 흘린 시후의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어렵게 빼 온 카드인 강창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