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덫에 걸린
(88/112)
88. 덫에 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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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덫에 걸린
2022.08.03.
“누가 사라져요?”
-저희 병원에서 보호 중이었던 의식불명 환자분이요……. 경호원 두 분은 모두 둔기에 맞아 의식을 잃으셔서 지금 치료 중입니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겁니까?”
-네……. CCTV를 돌려보고는 있는데 행방은 전혀…….
낮게 숨을 흘린 시후의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어렵게 빼 온 카드인 강창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연락드리죠.”
사납게 전화를 끊은 시후는 목에 매인 넥타이를 거칠게 잡고서 흔들었다. 갑갑함이 해결되지 않자 아예 끌러내려 조수석으로 던져버렸다.
짜증스럽게 핸들을 쥔 시후의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갔다.
야경이 보이는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지독한 교통체증에 시후는 잇새를 악물었다.
“……그 빌어먹을 노인네.”
나지막이 욕설을 읊조리는 입술에 차가운 냉기가 서렸다.
두 명이나 붙여놓았던 경호원을 모두 때려눕히고 소리소문없이 강창영을 데려갈 인물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시후의 휴대전화가 진동하며 또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시후의 손가락이 거세게 움직였다.
-마음에 드느냐? 내가 준비한 선물이.
들려오는 강성호의 목소리에 시후가 침묵을 지키며 이를 갈았다.
-나름 머리를 썼더구나. 당연히 어디 촌구석에 숨겨놨을 거라고 확신했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을 줄은.
들려오는 교묘한 웃음 소리에 시후는 속이 온통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강창영 어디로 빼돌리셨습니까.”
-그건 네가 알 바가 아니다. 창영이 놈은 내 자식이니 그 애를 죽이든 살리든 이 아비 맘이지.
“…….”
-그보다, 이제 우리가 다시 얘기를 해봐야 할 차례인 것 같은데.
우위를 선점한 사람의 여유가 느껴지는 목소리에 시후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지금 바로 L호텔로 오너라.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두통이 몰려오고 시후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핸들을 거칠게 꺾었다.
***
“고마워. 부탁 들어줘서.”
한편 겨울은 민주와 시후가 만날 수 있도록 힘을 써주었던 고등학교 동창 채연과 통화를 하며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야. 내가 어린 시절에 너한테 잘못한 거, 이걸로 전부 사죄할 수는 없겠지만…….
말꼬리를 길게 늘이던 채연이 잠시간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뻐.
“……그래. 너한테 피해 안 가게 해달라고 시후 오빠가 오민주 씨에게 말했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
-응, 고마워…….
수화기 사이로는 잠시간 무거운 침묵이 오고 갔다.
“그럼 잘 지내.”
-……응, 겨울이 너도.
통화를 마친 겨울은 작게 한숨 쉬며 휴대전화를 떼어냈다. 얼른 퇴근하기 위해 캐비닛을 열고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클레르를 나선 겨울은 피곤한 몸에 카페인을 충전하기로 하고 자주 갔던 카페 도스 트레스 신코로 향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투 샷 추가해 주세요.”
“그렇게 많이요? 오늘 피곤하신가 봐요.”
평소 겨울이 샷을 두 개나 추가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기에 석우가 걱정 어린 목소리 말했다.
“네, 조금 그러네요……. 뭐라도 세게 먹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
“일이 바쁘셔서 그런가요? 아무래도 연말이라.”
“일도 조금 바쁘긴 하네요. 제가 올해까지만 일하고 그만두기로 해서 고객님들이 예약을 타이트하게 잡으셨거든요.”
“겨울 씨, 일 그만두세요?”
놀란 석우가 묻자 겨울이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네요. 이제 자주 뵙지 못할 테니까…….”
“하하, 그동안 사장님 덕분에 힘 많이 얻었어요. 기회 되면 종종 봬요.”
“저야 좋죠. 다른 곳으로 가셔도 겨울 씨는 잘하실 거예요. 늘 응원할게요.”
항상 긍정적인 힘을 뿜어내는 석우였기에 겨울은 그 기운에 녹아들어 웃었다.
“오늘은 저도 가게 문을 일찍 닫아야 해서 테이크 아웃밖에 안 되시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괜찮아요.”
“그럼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석우가 빠르게 커피를 제조하고, 겨울은 옆의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며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시후에게서 오민주를 만나고 나왔다는 문자가 도착해 있었기에 곧바로 전화를 걸었으나 연결음만 길게 늘어질 뿐 그는 받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떼어낸 겨울은 액정 위를 엄지로 두드렸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둑해진 하늘로 어느덧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싹텄지만 기우이길 바라며 휴대전화를 핸드백 안으로 넣었다.
***
L호텔로 향한 시후는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입구에 버티고 서 있는 두 장정의 안내를 받아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가장 안쪽에 위치한 룸으로 향하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강 회장의 수하인 김정수 실장의 모습이 보였다.
고개 숙여 인사하는 그의 옆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시가를 피우고 있는 강성호가 시야에 들어찼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웃으며 손짓했다.
“앉아라.”
테이블 위로는 오픈된 양주와 크리스털로 된 온더락 잔이 두 개 있었다.
헛숨을 터뜨린 시후가 천천히 걸어가 소파에 앉자 성호가 술을 한가득 따른 잔을 건네며 물었다.
“한잔하겠느냐?”
“됐습니다. 마주 보고 술 마실 사이도 아닌데, 용건만 말씀하시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싯 헛웃음을 흘린 성호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시가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그렇지. 우리가 그런 사이는 아니야. 나도 이제 널 아들이라고 보기 힘드니까.”
후으, 하얀 연기가 허공으로 내뿜어졌다. 매섭게 고개를 내리깐 성호가 시후를 똑바로 응시했다.
“제 아비를 물어뜯으려는 짐승 새끼, 아들로 둔 적 없다.”
“…….”
“이 이상 내 말에 거역하거나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비면, 너와 네 아내가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겠다.”
직선으로 쏟아지는 성호의 시선을 시후는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흔들림 없는 까만 눈동자에서는 불꽃이 튀는 듯했다.
“나는 강창영과 유서진의 살인 교사 혐의로 너를 검찰에 넘길 생각이다. 이 대한민국에서는 진실보다 높은 것이 돈이고, 그보다 위대한 것이 권력이지. 모든 것을 가진 이 아비에게 너 따위 피라미는 적수가 안 돼.”
“…….”
“순순히 내 말에 따르는 게 좋을 거야. 옥살이하는 도중 무력하게 네 와이프 부고를 듣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마지막 경고라는 듯 성호는 두 눈을 부릅뜨며 시후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시후는 굳게 닫힌 입술을 열지 않았고, 긴 침묵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성호는 그런 시후를 재촉하지 않고 여유로운 눈으로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거절하겠습니다.”
나지막한 음성이 호텔 안을 울렸다.
“그런 유치한 협박, 저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성호의 코끝으로 비릿한 웃음이 터져 흘렀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두 손에 힘이 들어가고 쇠약한 뼈마디가 분노로 진동했다.
“어리석은 놈.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는구나.”
성호는 눈앞의 크리스털 잔을 깨끗하게 비우고는 조소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성호가 옆에 서 있는 김 실장에게 고갯짓했다.
“들어오라고 해.”
짧은 명령이 내려오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호텔 룸 안으로 세 명의 장정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와 시후를 에워쌌다.
“강시후 씨, 당신을 유서진과 강창영의 살해 용의자로 긴급체포합니다.”
형사로 추정되는 남자는 시후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며 수갑을 꺼내 들었다.
위협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시후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성호를 직선으로 주시할 뿐이었다.
“당신을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으며, 당신이 하는 말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차가운 금속이 손목에 닿은 순간이었다. 흔들림 없이 성호를 노려보던 시후는 그대로 테이블 위에 있는 크리스털 잔을 잡고 거세게 내리쳤다.
쾅!
유리가 깨지는 파열음과 함께 잔이 산산조각이 나고, 실내에는 소름 끼치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고요히 미간을 좁힌 성호는 붉은 선혈로 물든 시후의 주먹을 응시하며 시가를 빨아 당겼다.
뿜어진 연기를 헤치고 손을 뻗은 시후는 성호의 입술에 물려 있는 시가를 가져와 깨진 유리 조각의 단면 위에 아무렇게나 지져 껐다.
“호텔로 오라고 할 때부터 이 정도 추잡한 짓거리는 이미 예상했습니다.”
자택이나 회장실이 아닌 호텔로 부른 것부터 무언가 더러운 속셈이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 알면서도 홀로 적장에 뛰어든 것은 시후에게도 방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회장님.”
서늘한 시선이 성호를 꿰뚫어버릴 듯했다.
“당신 둘째 아들이 찬 뒷주머니가 누구의 손아귀에 갔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 말에 사색이 된 성호가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까무러치게 놀란 동공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지금부터 진짜 수갑 찰 사람이 누구인지 따져볼까 싶은데…….”
세월이 묻은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지며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속이 바싹 타는 듯해 입술을 짓씹은 성호가 크게 심호흡하며 두 눈을 들어 올렸다.
“……다들 나가.”
나지막이 뇌까리자 시후를 체포하려던 형사들이 당황하며 우물쭈물했다.
“내 말 안 들려?! 나가라고!!!”
이내 들려오는 고성에 놀란 이들이 허둥지둥 룸 밖으로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다스리기 위해 다시금 크게 숨을 들이켠 성호가 시후를 응시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다시 말해. 너 그게 무슨 뜻이냐.”
“말 그대로입니다. 강창영이 KU헬시뷰티에서 빼돌린 공금으로 조성한 비자금,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걸 네가 대체 어떻게……!”
“회장님이 제 머리 위에 있다고 생각하셨다면 그건 오산입니다.”
시선을 내리깐 시후가 음습하게 읊조렸다.
“제가.”
냉철한 음절이 목을 태우며 흘러나왔다.
“당신을 밟고 위에 서 있는 겁니다.”
아드득 이를 간 성호가 노기로 흉흉하게 번들거리는 눈으로 시후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에 반해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이 무표정한 시후는 느긋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말을 이었다.
“공금 횡령에 분식 회계까지…… 그리고 그걸 감추기 위해 산 자식을 송장으로 만들어버린 강성호 회장이라.”
“…….”
“일평생을 바쳐 일군 KU그룹의 주가가 하루아침에 반 토막이 나는 꼴을 보면 참 재밌으시겠습니다.”
비릿한 웃음으로 속을 긁어놓자 성호의 분노는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다. 활화산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시후가 유유히 입술 끝을 들어 올렸다.
“여기서 더 시간 끌지 않는다면, 돈을 그대로 고스란히 돌려드리고 입도 다물 의향이 있습니다.”
갑의 위치를 선점한 듯 느긋하게 다리를 꼬는 시후의 태도는 성호의 속을 온통 뒤집어 놓았다.
이런 상황에도 포커페이스를 잃지 않는 모습에, 성호는 저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고 생각하며 헛숨을 터뜨렸다.
“역시 너는 틀림없는 내 핏줄이구나.”
치켜 올라간 눈썹이 꿈틀거렸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내지르는 꼴이 내 젊었을 때와 똑같아.”
거친 숨을 내쉰 성호는 거센 시선으로 시후를 노려보며 잇새를 짓씹었다.
그 눈빛을 여유롭게 받아치며 시후는 턱을 치켜들었다.
“틀렸습니다. 난 적어도 회장님처럼 세상이 당신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생각 따위 하지 않으니까요.”
“……뭐야?”
“남의 피와 땀, 눈물을 양분 삼아 위로 올라가는 게…… 당신의 운이고 실력이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이 자식이 어디서 그따위 건방진 소리를……!”
성호의 안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제 배를 불린 것에 대한 대가.”
차가운 음성이 성호의 고막을 날카롭게 찔렀다.
“언젠가는 다 돌려받게 될 겁니다.”
섬뜩한 경고이자 예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