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모래성
(89/112)
89. 모래성
(89/112)
89. 모래성
2022.08.07.
호텔 룸을 나와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시후는 주차장으로 향하는 버튼을 누르고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온종일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에 극심한 피곤이 몰려와 지독한 두통이 떠나질 않았다.
작게 숨을 들이켜며 재킷 안에 두었던 휴대전화를 꺼내자 겨울로부터 부재중 전화 기록이 여러 통 남겨져 있었다.
그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겨울아.”
-오빠. 왜 이렇게 전화가 안 돼? 걱정했잖아.
“미안. 일이 좀 있었어. 지금 어디야?”
-나 지금 집에 들어왔어. 오빠는 오민주랑 만나 봤지? 어떻게 됐어?
“일단은 해결됐어. 자세한 건 집에 가서 말해줄게.”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 내린 시후가 걸음을 옮기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오늘 되게 피곤했는데…….”
설핏 웃음을 터뜨렸다.
“겨울이 네 목소리 들으니까 한결 낫다. 얼른 보고 싶어.”
수화기 너머로 감미로운 웃음소리가 번졌다.
-빨리 집으로 와. 나도 보고 싶어.
“집에 가면 품에 끌어안고 밤새 안 놔줄 거야.”
-……부끄럽게 그런 말 좀 하지 말라니까아.
창피해하면서도 길게 늘이는 말꼬리에서 사랑스러움이 묻어나왔다.
낮게 웃은 시후가 수화기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겨울아.”
사랑에 빠진 남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랑을 속삭인다.
짧지만 달콤했던 통화를 마친 시후는 휴대전화를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고 걸음을 옮겼다.
호텔의 주차장을 가로질러 차로 향하는 길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고요했다.
지독한 교통 체증을 피해 최대한 빨리 집에 도착할 수 있는 경로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는데, 왼쪽에서 시끄러운 배기음이 고막을 찔러왔다.
고개를 돌리자 한 오토바이가 헤드라이트를 번뜩이며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충돌 직전 본능적으로 몸을 피한 순간 허리 옆으로 무언가 날카로운 감각이 스쳤다.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옆구리를 누르자 축축하고 뜨거운 액체가 손바닥 위를 흠뻑 적셨다.
놀라 흔들리는 동공으로 손을 펼치자 붉은색 선혈로 범벅이 된 손이 시야를 한가득 메웠다.
“…….”
일순 머릿속이 암전되고 사고가 멈추었다.
옆구리로 타들어 갈 듯한 고통이 느껴지고 벌어진 상처로부터 새빨간 핏물이 거침없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 시후를 일깨워준 것은 다시 한 바퀴를 돌아 제게로 질주해오는 오토바이의 광경이었다.
끼이이이익!
운전자의 손끝에서 번뜩이고 있는 칼날을 본 시후는 황급히 몸을 옆으로 내던졌다.
옆으로 오토바이가 빠르게 지나가고 바닥을 구른 시후는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차와 차 사이 오토바이가 진입할 수 없는 구석으로 다급하게 몸을 숨겼다.
백미러로 그 모습을 본 오토바이의 운전자는 그대로 속도를 높여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하아.”
고통 어린 신음이 입술 틈으로 흘러나왔다. 상처가 생각보다 깊이 베인 것인지 옆구리가 불에 덴 듯 화끈거리며 끈적한 피가 분수처럼 흘러내렸다.
잇새를 악물며 통증을 참는데 자꾸만 의식이 끊기며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앰뷸런스를 부르기 위해 재킷 안을 뒤적거렸으나 조금 전 바닥을 구를 때 떨어진 휴대전화는 저 멀리 날아간 후였다.
거친 숨을 토해내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호텔에 방문한 고객으로 보이는 여자가 시후를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저기…… 여기, 구급차 좀 불러주세요.”
“아, 네!!! 잠시만요!”
안간힘을 써서 말하자 놀란 여자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앰뷸런스를 불렀고, 이내 호텔의 보안요원들이 달려왔다.
머지않아 도착한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시후는 근처 대학병원의 응급실로 호송되었다.
***
한편 시후에게 집이라고 말했던 겨울은 사실 미래에서 온 서른아홉의 강시후가 묵고 있는 호텔로 향하던 중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나 반드시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혼을 취소했다니, 너…….”
겨울의 말에 충격을 받은 그의 동공이 휑하니 울렸다. 이혼 확인 기일 1, 2차에 모두 불출석하여 자동으로 이혼이 취소됐다는 소식에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대체 왜……!”
허탈함이 밀려오고 헛숨을 터뜨린 그는 겨울을 직선으로 내려다보며 격양된 감정을 쏟아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예정인데. 이대로 죽을 생각이야?”
“그럴 리가요. 난 미래를 바꿀 거예요.”
굳은 의지를 다진 겨울은 이제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
지옥에 끌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시후의 곁을 지키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미래는 과거의 일들이 한데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고,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체 뭘 어떻게 바꾸겠다는 건데? 속 편한 소리 그만해. 그러다가 결국 다시 최악의 상황에 닥치면 그제야 후회할 거야?”
“어떻게 바꿀 건지 구체적인 건 나도 아직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알아요.”
“…….”
“지금, 2022년의 강시후한테 모든 걸 밝히고 제대로 부딪쳐 볼 거예요.”
자신에 찬 겨울의 말에 시후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충분히 알아듣게 얘기하고 설득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으니 절망스러울 뿐이었다.
‘……역시 과거로 돌아갈 수는 있어도, 운명은 바꿀 수 없다는 건가?’
그게 아니면 이미 나와 법적으로 엮인 후에 그녀를 설득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차라리 2022년보다도 더 예전으로 돌아갔을 때, 모든 걸 털어놓고 나와 엮이지 말라고 했다면…….
“내가 잘못 생각했어.”
“……네?”
“차라리 우리가 결혼하기 전으로 돌아갔을 때, 서로 다시 만나기도 전일 때부터 영영 얽힐 일이 없도록 해야 했어.”
서른아홉의 강시후는 치받쳐 올라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제 머리를 움켜쥐었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겨울을 잃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그녀는 점차 그 최악의 미래로 나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함겨울, 네 뜻이 그렇다면…… 난 지금 당장 미래로 돌아가야겠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다시 타임머신 모델을 가동할 방법을 찾아볼 거야. 2022년보다 더 이전으로 돌아가서…….”
“그 시간의 나에게 또 당신 곁을 떠나라고 종용할 건가요?”
“…….”
“절대 안 돼요. 이제 겨우 내 마음을 깨닫고 제대로 된 미래로 나아가고 있는데, 왜 모든 시간을 수포로 돌리려고 하는 거예요.”
“……제대로 된 미래라니.”
시후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고개를 내저었다.
“네가 내 곁에 있다가 화를 당하는 게 제대로 된 미래야? 나 대신 함겨울이 죽는 세상이 네가 나아가려는 미래냐고!”
감정의 제어를 잃은 그가 소리쳤다.
태풍에 휩쓸린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겨울이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잘게 떨리는 시후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붙잡고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약속할게요.”
“…….”
“난 죽지도 않을 거고, 당신을 잃지도 않을 거예요. 둘 다 가질 거예요. 반드시.”
정제되지 않은 거친 감정이 겨울의 단단한 눈빛 아래 서서히 수그러들었다.
여리지만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한가득 담은 눈동자의 떨림이 점차 잦아들었다.
한참 동안 말없이 겨울을 가만히 주시하던 시후가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간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찰나의 정적을 깨뜨린 것은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전화 벨 소리였다.
일순 경직되었던 머리를 흩트려 놓는 소음에 정신을 차린 시후가 겨울에게서 떨어지며 가쁜 숨을 토해냈다.
“받아, 전화.”
그는 짧게 말한 뒤 창문 쪽으로 등을 돌렸다.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은 겨울이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여보세요.”
무표정하게 전화를 받은 겨울은 제 두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요?”
하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놀란 심장이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
병원으로부터 시후가 괴한의 칼에 복부를 찔렸다는 소식을 들은 겨울은 무작정 뛰쳐나가 택시에 올라탔다.
이성을 잃고 미친 사람처럼 응급실로 향해 시후를 찾았으나 그는 이미 긴급 수술에 들어간 후였다.
넋을 놓고 불 켜진 수술실 앞에 서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던 겨울은 한참 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한 현실감이 없었고, 모든게 하룻밤의 악몽처럼 느껴졌다.
“…….”
조금 전만 해도 멀쩡하게 통화하며 곧바로 집으로 오겠다고 말했던 남자였다.
품에 끌어안고 밤새 놔주지 않을 거라고, 수화기 너머로 입을 맞추며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남자였다.
그런데 왜…….
대체 왜.
지금 그는 저 차가운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어느 누가 그에게 칼날을 겨눈 것인가.
“하…….”
거칠게 토해진 겨울의 숨이 파르르 떨렸다.
차라리 모든 게 꿈이기를 바라며 두 눈을 감았다가 떴지만 이 모든 건 냉혹한 현실이었다.
오늘 그가 집에 오면 모든 비밀을 털어놓고 앞으로의 미래를 함께 바꿔나가자고 얘기할 생각이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말하며, 다시 한번 사랑을 속삭일 생각이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실핏줄이 전부 터져 빨개진 눈으로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는데, 뒤에서 다가온 커다란 손이 그녀의 몸이 넘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잡아 지탱했다.
떨리는 고개를 돌린 겨울의 눈동자가 거칠게 뒤흔들렸다.
“……왜.”
겨울을 따라 택시를 타고 쫓아온 남자는 서른아홉의 강시후였다.
“대체 왜 말을 안 했어!”
이 와중에도 선글라스와 모자, 마스크로 얼굴을 감추고 있는 그를 보며 이성을 잃은 겨울은 무작정 달려들어 옷깃을 움켜쥐었다.
“오늘 이렇게 칼에 찔리는 사고가 난다는 걸, 왜 나한테 말을 안 했냐고! 미리 알았더라면 막았을 거 아니야!”
잔뜩 갈라진 형편없는 목소리가 아무렇게나 튀어나왔다. 울부짖으며 찢어지듯 소리쳤다.
왈칵 울음을 터뜨린 겨울은 원망 섞인 눈으로 시후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흔들리는 까만 동공은 오히려 겨울보다도 더 충격받은 듯 위태롭게 휘청였다.
“없었으니까…….”
“……뭐?”
미간을 좁히며 되묻자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겪었던 과거에는 이런 사고 따위 없었다고…….”
쿵.
내려앉은 겨울의 심장이 아래로 꺼졌다.
충격에 물든 여린 동공이 거칠게 뒤흔들렸다.
미래를 바꾸려고 안간힘을 쓸수록,
오히려 더 안 좋은 쪽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끔찍한 가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