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목숨을 건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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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목숨을 건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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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목숨을 건 기적
2022.08.21.
희수는 크리스마스이브 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일주일 동안 내내 현실을 도피하며 병원을 가는 것을 미루고 또 미뤘다.
저와 하룻밤을 보낸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전남친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부정하고 또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일모레면 서른인 성인인데, 언제까지나 아이처럼 현실을 외면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법.
토요일 아침, 이른 시각에 일어난 희수는 처음 임신 소식을 알려주었던 대학병원에 딸린 산부인과로 내원하였다.
“검사 결과 정상 임신입니다. 이제 6주 차시고…….”
20대 중반쯤 질염에 걸려 산부인과를 찾은 이후 무려 3년 만이었다. 물론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찾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넋을 놓고 멍하니 앉아있는 희수에게 친절하게 설명하던 젊은 여자 의사는 희수의 상태가 이상함을 깨닫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남편분은 같이 안 오셨나요?”
그 말에 눈물이 핑글 돈 희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내 울음을 참고 있던 희수의 볼로 투명한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한 희수에 당황한 의사가 잠시 눈동자를 바쁘게 굴리다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어떤 상황인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기에, 그녀는 말없이 희수가 눈물을 멈출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약 삼십 분쯤 뒤 병원을 나선 희수는 지하철역을 향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의사는 희수가 걱정되었는지 다음 주 검진에 꼭 나오라며 신신당부를 했지만, 완전히 멘탈이 박살 난 희수는 그런 그녀의 목소리도 잘 듣지 못했다.
덜컹거리는 지하철 안, 희수는 아까 산부인과에서 받아온 아기 초음파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배 속의 아기에게 축복의 마음이 들기는커녕, 원망이 드는 스스로가 미워서 미칠 것 같았다.
아빠 없는 아이로 자라게 될 아기에게 미안하고, 순수하게 예뻐해 줄 수 없을 것만 같아 속이 상했다.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져 희수는 초음파 사진을 핸드백 안으로 넣으며 푹 한숨을 몰아쉬었다.
주머니에 두었던 핸드폰을 꺼낸 희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도로 안에 넣었다.
부모님에게도, 자매들에게도, 가장 친한 친구인 겨울에게도…….
아직 아무에게도 임신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아니, 말하지 못했다.
도무지 제 입으로 아이를 가졌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구에게든 말하면 아빠가 누구냐고 추궁할 것이었고, 미래를 위해 임신중절 수술을 받으라고 종용할지도 몰랐고.
그것도 아니면 한심하게 바라보며 혀를 찰지 모르는 일이었다.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말을 꺼내지 못하는 이 상황이 희수는 너무도 두렵고 외로웠다.
이러다 배 속에 있는 불쌍한 아이까지 미워하게 될 것 같아 너무도 무서워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
시후는 새벽 내내 열이 올라 끙끙 앓다가, 오전 10시가 되어 겨우 잠이 든 겨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몇 시간 전 겨울이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다시금 재생되고 혼란 섞인 한숨이 입술 틈으로 흘러나왔다.
겨울이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사람도 아니었고, 정황 증거도 있었지만 여전히 믿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겨울이가 날 지키려다가 목숨을 잃는다고.’
아무리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라고 하지만,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끔찍했다.
차라리 저 자신이 죽는 것이 나을 만큼 겨울을 떠나보낸 뒤의 삶은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작게 한숨 쉰 시후는 겨울이 잠들기 전 제게 건네주었던 까만 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겨울의 말로는 미래에서 온 서른아홉 살의 강시후가 제게 건넨 물건이라고 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시후가 잠든 겨울의 뺨에 가볍게 키스한 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목 아래까지 덮어주고는 조용히 가방을 들고 서재로 향했다.
지퍼를 열자 안에 있는 것은 수많은 자료가 정리된 파일철이었다.
조금 긴장한 시후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금 낡은 듯한 자료를 천천히 넘겨 보았다.
그 안에는 한 사건의 조사 기록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아날 정도였다.
사건의 내막은 이러했다.
비즈니스로 인해 해외 출장을 갔다가 돌아온 시후를 어떤 괴한이 납치했고, 그 괴한은 겨울에게 시후를 살리고 싶으면 경찰에 신고하지 말고 혼자 찾아오라면서 그녀가 오도록 유도를 했다.
이후 CCTV가 없는 시골의 깊은 곳에 위치한 절벽으로 그녀를 불렀고, 범인과 겨울은 무언가 격양된 대화를 했다고 쓰여 있었다.
당시 시후는 마취에서 풀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감각이 둔화되어 움직이기 힘든 상황이었고, 차에 있던 폭탄이 터지려고 하자 겨울이 그를 밀치고 대신 폭발에 휘말렸다고 진술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폭발의 여파로 밀려난 겨울이 절벽 아래로 떨어졌고, 결국에는 숨을 거두었다고 되어 있었다.
“…….”
사인은 익사.
입술을 깨문 시후가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봉투를 꺼내자 유리에 금이 가 있는 낡고 더러운 손목시계가 하나 보였다.
“이건…….”
놀란 시후의 심장이 서늘하게 굳었다. 익숙한 시계였다.
곧장 서랍을 연 시후는 안쪽에 두었던 선물 상자의 포장을 거칠게 풀어헤쳤다.
그 안에서 빛을 내는 것은 가방 안에 들어 있던 낡은 손목 시계와 같은 디자인의 시계였다.
“……말도 안 돼.”
시후의 동공이 거칠게 요동쳤다.
이건 1월 1일이 되면 새해 기념으로 겨울에게 선물할 생각으로 미리 사둔 시계였다.
아직 선물하지 않았기에 겨울은 이 시계의 디자인이나 브랜드를 전혀 모를 터였다.
“…….”
다시 고개를 돌려 낡은 시계를 바라보는 시후의 심장이 쿵쿵쿵 빠르게 뛰었다.
사건 조사 기록에 따르면 이 손목 시계는 겨울이 사망할 때 끼고 있었던 시계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아직 선물하기도 전의 시계…….
며칠 후의 미래에서 겨울에게 선물할 예정인 시계.
이보다 확실한 물증이 어디에 있을까.
조금씩 빠르게 뛰던 심장이 이내 엄청난 속도로 고동치기 시작했다.
겨울이 제게 했던 말들이 사실이라는 것이 피부로 와닿는 순간이었다.
혼란스러운 머리를 한 손으로 움켜쥔 시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떨리는 손으로 제 바지 주머니 안에 있는 USB를 꺼내 들었다.
‘이건 8년 후의 미래에서 온 강시후가, 오빠 본인한테 전해달라고 한 물건이야.’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전하라고 한 물건.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만 보던 시후가 마른침을 삼키고 천천히 USB를 본체 단자에 끼워 넣었다.
목이 마를 정도로 긴장하며 클릭했으나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동영상 한 개가 전부였다.
마우스를 쥔 손이 가늘게 떨려왔다.
느릿하게 손을 움직인 시후가 그 동영상을 클릭했다.
“…….”
한껏 커진 시후의 동공이 태풍을 맞은 것처럼 위태롭게 나부꼈다.
화면 안에 가득 찬 얼굴은 다름 아닌 시후 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게 겨울이가 말한…….”
8년 후의 미래에서 찾아온 나?
당혹스러웠으나 저와 똑같이 생긴 얼굴에 조금의 세월만 더해진 모습에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시후는 지금 이 상황이 정말 현실인지 믿을 수 없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시후에게 이건 현실이라고 말하듯, 화면 속 남자는 태연하게 자신을 2030년의 미래에서 온 강시후라며 소개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상세하게 설명했다.
알 수 없는 누군가로부터 겨울을 잃었고, 범행을 저지른 범인은 아직도 잡히지 않았으며, 그녀가 없던 삶이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웠는지…….
겨울이 없는 세상에서 도저히 숨 쉬고 살아갈 수 없어 폐인으로 살다가, 조금의 희망이라도 붙잡기 위해 타임머신 연구를 위해 미국으로 떠난 일까지 그는 아주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슬퍼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는 무표정으로 그저 제 이야기를 일기장에 털어놓듯이 아주 담대하게 이야기해나갔다.
“난 겨울이에게 수도 없이 말했었어. 날 버리고 떠나라고. 내 곁에 있으면 넌 죽게 된다고…….”
영상을 바라보는 시후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하지만 겨울이는 결국 날 선택했어. 그 모든 걸 감수하고도 내 곁에 있겠다고 말했어. 지금 이 영상을 보는 강시후 너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함께 이겨낼 거라고…….”
지금껏 겨울이 홀로 감당해왔던 무게가 가슴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 용기가 얼마나 고맙고 대단한 건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네가 제일 잘 알 거야.”
잘 알고 있었다.
겨울이 자신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이유는 수없이 많고 또 많았다.
시후는 유년 시절의 겨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사람이었고, 이기적인 거짓말로 겨울에게 배신감을 안겨주기도 했으며, 무엇보다도 시후의 아버지는 그녀의 집안을 망가뜨리고 심지어는 그녀의 부친을 죽음으로까지 내몬 인간이었다.
그런데…….
하물며 미래에는 시후를 구하려다가 죽음을 맞기까지.
마른침을 삼킨 시후는 목 아래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울컥 감정이 소용돌이처럼 올라오고 누군가 심장을 쥐고 흔드는 것처럼 가슴이 깨질 듯이 옥죄어 왔다.
“겨울이 옆에 있고 싶다고 생각했으면…… 책임지고 목숨을 걸어.”
영상 속 시후는 진심을 담아 한 자, 한 자, 깊이 시후의 가슴에 박아 넣었다.
“미래의 내가, 지금 이 영상을 보고 있는 너. 서른한 살의 강시후를 원망하지 않도록…….”
나지막한 자신의 음성이 고막 깊이 파고들었다.
“최선을 다해, 네가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전부 사실로 믿어지는 기적 같은 순간.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데 모여 만나는 찰나…….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필사적으로 쥐여준…….
사랑하는 여자를 잃지 않을 기회.
그녀와 함께 숨 쉬고 살아갈 수 있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 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