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속도위반 커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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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속도위반 커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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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속도위반 커플
2022.09.04.
새해를 맞은 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1월 중순을 넘기게 되었다.
봉합한 환부의 실밥을 제거한 시후는 빠른 속도로 회복하여 무리 없이 일상생활에 복귀하였다.
순조롭게 아물어가는 상처만큼이나 시후와 겨울의 일상도 안정을 되찾았고 시간은 평화롭게 흘러갔다.
신뢰하고 사랑하기에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서로가 서로를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보내던 와중, 겨울과 시후는 갑작스럽게 날아 들어온 이경의 입원 소식에 함께 병원을 찾았다.
“아이고, 우리 강 서방! 여기는 왜 왔어, 바쁠 텐데?”
시후를 보자마자 두 팔을 벌리고 달려오는 혜숙에 서운해진 겨울이 뾰로통하게 툴툴거렸다.
“엄마는 강 서방만 보이고 친딸은 안 보이나 보지?”
“왜 안 보여? 누가 뭐래도 우리 예쁜 딸이 제일이지.”
말은 그렇게 해도 본능은 숨길 수 없었는지, 초롱초롱한 눈빛은 곧바로 시후를 향해 돌아갔다.
커다란 손을 덥석 움켜쥔 혜숙은 위아래로 정신없이 흔들며 주책을 떨었다.
“VIP 병동으로 옮겨줘서 정말 고마워. 이렇게 할 필요 없는데 말이야.”
“아니에요. 처남 일인데 당연히 도와야죠.”
“아휴, 어떻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지…….”
처가 일이라면 항상 제 일처럼 나서며,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시후에게 혜숙은 한없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뭘 가지고 왔어?”
“처남이 좋아한다고 해서 사 왔습니다.”
“아휴, 뭘 이런걸. 그냥 빈손으로 오지.”
병문안 선물로 가져온 것은 이경이 어렸을 때부터 줄곧 좋아했던 브랜드의 비타민 음료였다. 함박웃음 지은 혜숙이 곧바로 받아서 냉장고 안에 넣어두었다.
“일부러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해요, 매형. 고마워, 누나.”
전신에 깁스를 한 채 뻣뻣하게 누워 있는 이경은 눈동자만 굴려 시후와 겨울을 바라보았다.
골절이 심한 탓에 앞으로 몇 주간은 손발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병원 신세를 져야 할 처지였다.
“몸은 좀 괜찮아, 이경아?”
“응. 난 괜찮은데…….”
겨울의 물음에 울상을 지은 이경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빠 볼펜이 망가졌어.”
“볼펜?”
“응…….”
이경은 베드 옆 테이블에 놓인 볼펜을 바라보며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맨날 들고 다니는 볼펜 있잖아, 이거. 계단에서 넘어질 때 가방 안에서 떨어져 나와서 망가졌더라고…….”
“얘, 너는 오래된 걸 그렇게 뻔질나게 들고 다니니까 그런 일이 생기지.”
겨울이 뭐라 답하기 전에 혜숙이 이경을 타박하며 쯧쯧 혀를 찼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나오지도 않는 볼펜을 대체 왜 들고 다니니?”
“하지만, 이건 내 부적 같은 거란 말이야…….”
울컥한 이경의 눈가가 빨갛게 부어오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유난히 심성이 여린 아들의 속삭임에 마음이 약해진 혜숙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를 잃은 뒤, 이경은 그가 남기고 간 유품인 볼펜을 부적처럼 내내 들고 다니고는 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되었음에도 이경은 여전히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결핍과 그리움이 남아 있었다.
혜숙은 피로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이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떠나보낸 이경이 빈자리를 느끼지 않도록 늘 최선을 다했으나, 이럴 때마다 어쩔 수 없이 가장의 부재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엄마, 이 볼펜 아빠 거 맞지?”
테이블 위에 있는 볼펜을 가만히 바라보던 겨울이 문득 혜숙에게 물었다.
“응, 너희 아버지 거지. 다른 물건들은 예전에 다 정리하고, 이제 남은 건 이 펜이랑 겨울이 너한테 줬던 것까지 펜 두 개가 전부야.”
“그런데 왜 펜만 남긴 거야? 그때 다른 건 다 소각했잖아.”
“그야 너희 아버지가 생전에 당부했었거든. 이 펜 두 개는 절대 버리지 말라고, 자기가 죽는 일이 있더라도 펜만큼은 절대 누구를 주지도 말고, 태우지도 말라고 했었지.”
“……그래?”
어딘가 의아함을 느낀 겨울이 펜촉이 움푹 들어간 채 나오지 않는 볼펜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경이 넘어지면서 함께 망가진 탓에 볼펜 위를 달칵달칵 눌러도 펜촉은 나오지 않았다.
“…….”
그런데, 굳이 그런 말을 남긴 이유가 뭘까?
아버지한테 이 펜이 어떤 의미였길래…….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 가슴을 눌러왔으나, 이미 오래전 고인이 된 사람은 당연하게도 말이 없었다.
“저녁 밖에서 먹고 들어갈까?”
이경의 병문안을 마친 뒤, 겨울과 시후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함께 차에 올라탔다.
퇴근 직후 곧바로 겨울을 태우고 병원으로 오는 길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아직 식사하기 전이었다.
“그래! 오랜만에 삼겹살 어때?”
“좋아. 우리 회사 근처에 맛있는 곳 있는데 거기로 갈까?”
“응, 고고!”
겨울의 쾌활한 대답에 곧바로 핸들을 돌린 시후가 넥스트게임즈 근처의 한 고깃집으로 향했다.
차를 주차하고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입구에서부터 삼겹살 육즙의 냄새가 한껏 새어 나왔다.
구석에 위치한 자리를 안내받고 주문을 위해 메뉴판을 보는데, 문득 옆자리 앉은 커플의 웃음소리가 방정맞게 들려왔다.
“자, 우리 이쁜이, 아.”
“아아.”
“오구오구, 맛있어요. 하나 더 줄까?”
우욱. 왜 저래, 진짜.
좋아 죽겠다는 듯 까르륵까르륵 저들만의 세상인 듯 온갖 주접을 다 떠는 소리에 메뉴를 고르던 겨울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럴 거면 차라리 모텔을 가던가…….’
하필이면 테이블 사이도 가까워 신경이 거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뭐 하는 인간들인가 낯짝 한번 보자는 생각에 고개 돌린 겨울의 망막에 익숙한 얼굴들이 차례로 박혔다.
“어? 희수?”
놀란 겨울이 묻자 메뉴판을 보던 시후의 고개도 옆 테이블로 돌아갔다. 옆에서 온갖 닭 털을 날리며 오바를 떨던 커플은 다름 아닌 재환과 희수였다.
우연한 만남에 화들짝 한 재환과 희수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멀뚱멀뚱 겨울과 시후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얼굴을 알아본 네 사람의 시선이 바쁘게 교차했다.
“…….”
“…….”
약 10초의 이상야릇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니까, 신재환 씨랑 희수, 둘이 예전에 사귀던 사이었다고요?”
어쩌다 보니 얼렁뚱땅 합석하게 된 네 사람은 함께 식사하게 되었다.
“네, 하하. 시후랑 겨울 씨가 희수랑 소개팅 잡아주셨던 덕에 재결합해서 잘 사귀고 있어요.”
“대박……. 어떻게 그런 우연이.”
희수가 예전에 사귀다가 헤어졌던 전남친이 시후의 친구인 재환이라는 사실도 놀라웠는데, 두 사람이 다시 커플이 되었다는 소식은 더욱더 뜻밖이었다.
“작년 두 사람 결혼식 때는 제가 참석을 못 했었잖아요, 하하. 그래서 겨울 씨랑 희수가 친구 사이인 것도 그땐 전혀 몰랐거든요.”
“네, 그러셨던 것 같아요.”
“결혼식 때 만났으면 조금 더 빨리 재결합했을 텐데, 아쉽기는 하지만 말이에요.”
희수와 다시 사귀게 된 이후, 재환은 하루하루 가는 시간이 아쉬울 정도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만나 사랑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종종 들었으나 돌이킬 수는 없었으니 현재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야, 민희수. 넌 어떻게 나한테 한마디도 안 할 수가 있어?”
제게 말해주지 않은 희수에게 서운함을 감출 수 없었던 겨울이 따지듯 물었다.
“음. 겨울아. 그게 말이지. 뭐랄까, 타이밍을 놓쳤다고나 할까…….”
희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슬쩍 몰래 배를 문질렀다.
설명하고자 하면 단순히 사귀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까지 말해야 했다.
아직 부모님한테도 밝히지 않은 사실이었기에 도무지 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인 희수가 겨울의 시선을 피하며 대충 분위기를 무마했다.
“신재환이 좀 가벼워 보여도 나쁜 애는 아니에요. 민희수 씨가 잘 데리고 살아주세요.”
시후가 농담조로 말하자 희수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책임지려고요. 저 아니면 어떤 여자가 데려가겠어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저희 오빠 잘 부탁드려요, 시후 씨.”
“네, 뭐. 나중에 결혼하시면 냉장고라도 하나 선물 드릴게요.”
“아니, 오빠는 무슨……. 두 사람 다시 사귄 지 한 달도 안 됐다고 하는데, 부담스럽게 결혼 얘기를 해.”
시후의 말에 겨울이 헛웃음 치며 답하자, 재환과 희수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 묘한 기류를 눈치챈 겨울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아하하하. 사실 이미 결혼하기로 했어요.”
“……네?!”
“아마 4월쯤 식 올릴 것 같아요. 운 좋게 한 커플이 파혼해서 자리가 났거든요.”
상상도 못한 전개에 놀란 겨울이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휘둥그레졌다.
이제껏 제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던 희수를 황당하게 바라보자 머쓱해진 희수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며 큼큼, 헛기침했다.
잠시 놀라 고기를 굽던 손을 멈춘 시후가 곧바로 그러려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요. 결혼은 빨리하면 할수록 좋아요. 망설일 게 뭐가 있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겨울 외에는 그다지 관심 없는 시후가 적당히 대답하며 웃었다.
잘 익은 삼겹살을 겨울의 접시에 집중적으로 놓아주며 희수와 재환에게 대충 축하의 말을 건넸다.
“축하드려요. 너도 축하한다.”
“와우, 역시 강 대표. 성의라고는 하나도 없는 모멘트.”
“성의는 돈으로 보여주는 게 낫지 않나?”
“아휴,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대표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다음 주 연봉 협상인 거 아시죠?”
곧바로 태세 전환한 재환이 굽실거리자 희수가 주책 떨지 말라는 듯 그의 어깨를 툭 쳤다.
티격태격하면서도 퍽 잘 어울리는 한 쌍을 보며 겨울이 웃음을 터뜨렸다.
“결혼 준비하다가 막막한 점 있으면 말해요. 그래도 저희가 나름대로 결혼 선배인데,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도울게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하하.”
호탕하게 웃은 재환이 슬그머니 희수의 배를 바라보며 은근하게 말을 이었다.
“뭐, 결혼 빼고 다른 건 저희가 선배일 수도 있지만…… 악!”
재환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기 전, 희수가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퍽 치며 제지했다.
슬쩍 재환을 향해 고개 돌린 희수 입 모양으로 ‘입 닥쳐라’라고 경고했다.
깨갱 수그러든 재환이 곧바로 입을 다물며 고기를 주섬주섬 입에 쑤셔 넣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다 마치고, 마지막으로 불판에 볶음밥을 볶아 먹을 차례였다.
“야. 김을 뭘 그렇게 많이 넣어.”
식당에서 준 김 가루 한 통을 볶음밥에 전부 붓는 재환을 보며 시후가 타박했다. 그야말로 김 반, 밥 반의 해괴한 비주얼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깨를 으쓱한 재환이 낄낄거리며 통에 있는 남은 김 가루까지 전부 깨끗하게 털어 넣었다.
“촌스럽다, 대표야. 원래 이런 건 아무거나 보이는 대로 다 때려 넣는 거라고. 김 가루도 넣고 머리카락도 넣고, 발가락에 때 있으면 그것도 빼서 넣고 하는 거야.”
“무슨 그런 저질스러운…….”
세상 추잡하고 더러운 농담에 시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듣지 마, 겨울아.”
손을 뻗은 시후가 곧바로 겨울의 귀를 막자 겨울이 웃음을 터뜨렸다.
가식 없이 티격태격하는 걸 보니 재환과 시후가 서로 오랜 시간 우정을 쌓아온 진짜 친구란 걸 새삼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발가락 때는 넣으면 안 되죠. 그건 부모자식 간에도 주먹다짐할 일인데.”
“나는 겨울이 네 발가락 때도 먹을 수 있어.”
뜬금없이 치고 들어온 시후의 깨알 어필에 겨울이 기겁하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나 발가락에 때 없거든? 그리고 먹지 마.”
가끔 이렇게 이상한 부분에서 지나치게 애정을 과시할 때마다 골치가 아팠다.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겨울이 희수와 재환을 바라보며 손짓했다.
“어쨌든 두 분, 얼른 먹어요. 식기 전…….”
“우욱.”
그 순간, 돌연 입을 틀어막은 희수가 헛구역질했다.
동시에 시후와 겨울의 시선이 일제히 희수에게로 집중되었다.
“희수야, 갑자기 왜 그래? 더러운 얘기 해서 그래?”
“아, 아니 그게…… 우욱. 웁.”
또다시 헛구역질이 계속되고, 놀란 겨울과 시후의 눈이 조금 커졌다.
멈추질 않는 입덧 증상에 당황한 희수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멀뚱멀뚱 그 뒤를 바라보던 시후와 겨울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가정이 스치고, 두 사람의 시선은 재환에게로 꽂혔다.
“……큼. 큼.”
뻘쭘해진 재환이 딴청을 피우며 헛기침했다.
……헐.
충격을 금치 못한 겨울과 시후의 입이 떡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