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천년 묵은 구미호
(98/112)
98. 천년 묵은 구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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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천년 묵은 구미호
2022.09.07.
희수 커플과 헤어진 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겨울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떨치지 못했다.
“임신이라니…… 진짜 충격 그 자체다.”
느닷없이 10년 친구의 혼전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겨울은 무지막지한 타격을 입고 그야말로 K.O 되어버렸다.
“어떻게 나 몰래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일 수가 있지?”
“일부러 말 안 한 건 아닐 거야. 아마 민희수 씨도 그동안 고민이 많았을 거고.”
아직 나이도 그리 많지 않은 데다가 예정에 없던 혼전 임신이었기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털어놓기 힘들었을 터였다.
겨울은 희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묘하게 밀려오는 약간의 배신감에 혼란스러움을 지울 수 없었다.
헤어나올 수 없는 충격에 빠진 채 가만히 서 있는 겨울 대신 시후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터덜터덜 집 안으로 들어온 겨울은 신발을 벗는 둥 마는 둥 하며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았다.
“가장 친한 친구가 엄마가 된다니까, 기분이 되게 이상해.”
몇 다리 건너 아는 지인들이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소식은 몇 년 전부터 간혹 들려왔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친한 사람이 임신한 것은 처음이었다.
“난 아직도 내가 10대 같은데…….”
마음만큼은 교복을 입던 시절에 머물러 있었으나 어느덧 세월은 무자비하게 흘러 소녀보다는 엄마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다.
“나 어떡해? 정신은 초딩이고 몸만 늙었어.”
“늙기는. 아직 20대잖아.”
“나 이제 30대야! 서른 살 된 지 무려 보름이 넘게 지났다고?”
“만으로 말이야.”
여전히 충격에 물들어 놀란 토끼처럼 휘둥그레 뜨여진 두 눈이 귀여워서 시후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저도 모르게 찹쌀떡처럼 쫀득한 볼을 잡고 가볍게 늘리자 겨울이 이잉, 이상한 소리를 냈다.
“볼은 말랑말랑 부들부들한 게 서른 아니고 세 살 같네.”
“……그거 칭찬 맞아?”
아무리 그래도 세 살은 좀 심하잖아. 세 살은!
뚱한 표정으로 시후를 올려다보자 그가 헤실헤실 세상 헤픈 웃음을 흘리며 비스듬히 고개를 틀며 내려왔다.
쪽.
“앗!”
갑자기 도둑 뽀뽀를 당한 겨울이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겨울이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보던 시후가 그녀의 이마와 콧잔등, 뺨, 턱 끝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쪽. 쪽.
“잠깐, 잠깐……!”
쪽, 쪽, 쪽, 쪽.
뽀뽀 귀신이라도 씐 것처럼 마구 입맞춤 세례를 쏟아내는 시후에 겨울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오빠, 잠깐마…… 악.”
잠깐의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시후는 겨울의 자그마한 얼굴을 붙잡고 수도 없이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몇 번을 뽀뽀 당했을까, 첫사랑을 하는 10대 소녀처럼 콩콩 뛰는 심장을 느끼며 겨울이 핑크빛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온몸이 녹아내릴 만큼 진한 키스도 좋았지만, 이렇게 마구 쏟아지는 뽀뽀도 사랑받는 기분이 물씬 들어 가슴이 속절없이 설렜다.
“우리도 아기 만들까?”
단둘이 되자마자 예고 없이 심장을 파고드는 엉큼한 말에 겨울의 얼굴이 붉어졌다.
“여보 9만큼 닮고, 나 1만큼 닮은 딸 어때.”
그렇게 속삭이며 입속으로 미끄덩 움직이는 붉은 혀가 세상 음란하고 아찔하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사냥하지 않아 굶주린 짐승처럼 욕망과 갈증이 넘치는 눈빛이 겨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뜨겁게 훑었다.
단순히 시선만으로도 아랫배가 끓어오르며 몸이 달아올랐다.
“나 이제 상처도 다 아물었는데 언제까지 참게 할 생각이야.”
“……그, 그건, 아직 다 아물었는지 내가 확신할 수가 없으니까…….”
“못 믿겠으면 보여줄까?”
상처가 덧날까 봐 키스 이상의 진도는 나가지 못하게 철벽을 친지 이제 한 달이 다 되어갔다.
“몸으로.”
꼴깍.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겨울이 어쩔 줄 모르고 커다란 눈을 끔뻑끔뻑했다.
“응? 여보야.”
과하게 섹시한 페로몬을 뿜어내며 유혹하는 통에 흐물흐물해진 이성의 끈이 연약하게 나달거렸다.
“그렇게 부르지 마. 그거 오늘부터 금지야.”
“여보를 여보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불러?”
“어, 어쨌든 금지야.”
“그 금지를 금지한다.”
“그으럼, 난 그 금지를 금지를 금지한…… 으음.”
바쁘게 쫑알거리는 입술을 시후는 단번에 집어삼켰다.
빨아당기는 힘에 입이 절로 벌어지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깊숙한 곳까지 그가 침범해 들어왔다.
젖은 입안을 빠르게 구르며 단시간에 함락시켜 나가는 행위에 겨울의 얼굴로 터질 것처럼 열감이 몰려왔다.
야릇한 소리가 귓가로 질척하게 감기고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 시후의 입술이 슬며시 떨어졌다.
“오늘만큼은…….”
귀밑을 축축하게 적시는 낮은 음성에 겨울의 솜털이 삐쭉 곤두섰다.
“이대로 침대에 데려갈 거야.”
……하아, 이 요망한 남자.
숨 막히게 야한 말에 절로 호흡이 거칠어졌다.
더는 겨울도 참고 있기 힘들었기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가 주기로 했다.
***
일주일이 흐르고 어느덧 그토록 고대했던 설 연휴가 찾아왔다.
당초 이때 함께 해외로 놀러 가기로 했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들과 함께 현실적인 문제까지 고려하여 비행기를 타는 대신 시골 깊은 곳에 위치한 시후의 별장으로 1박 2일의 짧은 여행을 떠났다.
“정말 해외로 나가지 않아도 되겠어?”
별장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시원스레 달리며 시후가 겨울에게 물었다.
“저번에 비행기 타고 싶다고 했잖아.”
“응, 괜찮아. 다음에 타면 되지.”
아직 누가 겨울과 시후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지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고, 위험 요소들은 계속 존재했다.
이러한 상황에 경호원들과 동행하여 비행기를 탈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해외로 오랜 시간 여행을 떠나는 것은 무리였다.
“난 오빠랑 있으면 어디든 좋아.”
배시시 웃은 겨울이 아이처럼 두 팔을 벌리며 방긋 웃었다.
“그리고 앞으로 시간 많잖아. 우리한테 아직 남은 날이 이렇게 많은데, 왜 조급해하겠어?”
이후의 미래가 존재할 것이라는 확신이 담긴 말이었다.
어느덧 1월은 다 지나가고 있었고 겨울이 원래의 미래에서 세상을 떠났던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겨울은 조금도 불안해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반드시 지켜줄 거라 굳게 믿고, 현재의 행복에 집중하며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그런 단단하고 따스한 마음의 무게를 잘 알았기에, 시후는 씩씩하도록 밝게 웃는 겨울에게 한없이 고마웠다.
시후와 겨울은 오랜 시간을 달려 별장에 도착했다.
오기 전 상상한 것보다 훨씬 큰 규모의 별장에 겨울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와, 2층도 있네?!”
“응. 구경하고 내려올래? 내가 불 피우고 있을게.”
“좋아, 좋아!”
신난 겨울이 아이처럼 폴짝폴짝 뛰며 별장을 둘러볼 동안, 시후는 바비큐를 구워 먹을 숯불을 피웠다.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고기부터 구워 먹은 시후와 겨울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후식으로 라면까지 두둑하게 끓여 먹었다.
밥을 먹은 직후 바로 벌러덩 눕는 소소한 일탈을 즐기며 두 사람은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하기도 하고, 서로에게 기대서 별장에 비치된 책을 읽기도 하며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냈다.
순식간에 하루가 저물어가고 어느덧 깜깜한 밤이 되자 겨울은 미리 준비해온 젠가를 꺼냈다.
하지만 이 젠가는 평범한 젠가와는 조금 달랐는데, 블록을 하나 뽑을 때마다 질문이 적혀 있고 거기에 답을 해야 하는 커플용 젠가였다.
“내 제일 큰 단점이 뭐야?”
게임이 시작되고 중간의 블록을 쏙 뽑은 겨울이 작은 글씨로 적힌 질문을 읽으며 웃었다.
세상 진지하게 고민하던 시후는 장난기를 쏙 뺀 얼굴로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너무 심해…….”
“심하다고? 뭐가?”
심각하게 표정을 굳힌 그가 나직하게 뒷말을 중얼거렸다.
“너무 심하게 귀여워.”
“…….”
“네가 나한테만 예쁘게 보이는 건 아닐 거 아니야? 여기서 한 10퍼센트만 예뻐도 될 것 같아. 아니, 5퍼센트만.”
“……문제가 심각하네. 그거 콩깍지야.”
겨울이 어휴, 헛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콩깍지여도 평생 벗겨질 일이 없는데 어떡하지?”
나지막한 웃음소리에 왠지 민망해진 겨울이 시후를 밉지 않게 흘기며 손짓했다.
“느끼한 소리 그만하고 뽑아. 오빠 차례야.”
픽 웃음을 터뜨린 시후가 가장 밑에 있는 블록을 단번에 뽑아 질문을 읽었다.
“칭찬 10개 해줘. 라고 적혀 있네.”
“음…… 칭찬이라.”
잠시 고민하던 겨울이 열 손가락을 펼치고는 하나씩 접어내려 갔다.
“일단 잘생겼어. 멋있어. 듬직하고. 은근히 귀엽기도 하고…….”
행복에 젖은 광대가 푸스스 올라가며 커다란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날 너무 사랑해줘. 배려심도 깊고. 엄청 엄청 사랑스러워. 자기 일에 열정적인 것도 근사하고, 책임감 있는 것도 좋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부 접고 새끼손가락 하나만 남은 겨울이 배시시 웃었다.
“예뻐.”
자그마한 손가락을 접은 겨울이 도로 손을 쫙 펼쳤다.
앙증맞은 하얀 손은 그대로 시후의 머리 위에 부드럽게 안착했다.
“아이, 예쁘다.”
쓰담쓰담.
세상 사랑스러운 여자의 달콤한 애정 표현은 시후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고도 남았다.
삽살개처럼 헤헤 웃는 미소에 나사가 풀려버린 시후는 그녀를 따라 바보처럼 실실 웃었다.
“네가 더 예뻐.”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맘을 풀어본 적이 없었는데,
겨울의 웃는 얼굴만 마주하면 무표정한 안면근육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이 전부 흐물흐물하게 녹아 풀어진다.
“그럼 이제 내 차례지?”
오른쪽 중간의 블록을 빼어낸 겨울이 질문을 읽으려다가 멈칫했다.
“…….”
“……왜 그래? 뭔데 그래?”
약간 당황한 겨울이 우물쭈물하며 망설이는 동안 길게 뻗어진 손이 날름 블록을 훔쳐 가 질문을 읽었다.
<나 어디 부위가 제일 좋아?>
블록에 적혀 있는 질문은 다소 19금스러운 상상력을 자극했다.
세상 음란 마귀를 혼자 뒤집어쓴 사람처럼 뻘쭘해진 겨울이 약간 붉어진 얼굴에 부채질하며 딴청을 피웠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앞으로 뜨겁게 쏟아지는 어둑한 시선.
노골적으로 몸을 스캔하는 응큼한 시선에 움찔한 겨울이 반사적으로 제 가슴을 엑스자로 가렸다.
“음…… 너무 많아서 고를 수가 없지만.”
대, 대체 뭘 말하려고…….
“손목?”
의외로 건전하면서도 특이한 대답이었다.
“내 손목이 왜?”
“뭐랄까……. 하얗고 얇은 손목에 동그란 뼈가 톡 튀어나온 게 너무 섹시해.”
“뼈? 이거?”
태어나서 한 번도 주목해 본 적 없는 동그란 손목뼈를 좋다고 말하는 그가 신기했다. 겨울이 제 손목뼈를 문지르며 묻자 시후가 웃으며 청량하게 답했다.
“응. 그것만 보면 입에 넣고 빨…….”
“그만. 거기까지.”
순식간에 귀까지 홍당무가 된 겨울이 서둘러 손을 뻗어 시후의 입을 콱 틀어막았다.
어쩐지 건전하게 흐른다고 했더니, 그 뒤에는 어두컴컴한 욕망이 숨어 있었다.
시후가 살풋 웃음을 흘리자 겨울의 손바닥이 간지러운 숨결로 축축하게 적셔졌다.
퍼드득 움츠러든 그녀가 자지러지며 손을 빼자 커다란 손이 가느다란 손목을 단번에 휘어잡아 끌어당겼다.
고개를 비스듬히 튼 시후가 입술을 모아 하얀 손목뼈를 입에 물고 키스했다.
짧게 쪽 소리를 낸 그가 까만 눈으로 겨울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웃었다.
“우리 이제 게임 그만하고…….”
섹시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는 모습이 숨이 막힐 정도로 관능적이었다.
“다른 거 할까?”
……아.
내 남편은 아무래도 사람이 아니라…….
천년 묵은 구미호가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