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 단서 (99/112)


99. 단서
2022.09.11.



 
강 FOX의 무지막지한 유혹에 한 대 얻어맞은 겨울의 심장이 엄청난 속도로 두근거렸다.

설렜던 걸 들키기 싫어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굳히고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싫어. 나 이거 끝날 때까지 할 거야.”

9할은 넘어갔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겨울이 단호하게 외쳤다.

세상 칼 같은 대답에 시후의 눈이 은근하게 가늘어지며 그가 그윽하게 웃었다.


“그래. 계속하자.”

……뭐지, 저 이상야릇한 눈빛?

왠지 묘하게 그의 페이스에 넘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에 겨울이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그런 겨울을 보며 슬며시 눈웃음 지은 시후가 블록을 하나 빼고 질문을 읽었다.


“눈싸움에서 지는 사람 술 먹기, 라고 쓰여 있네.”

“눈싸움? 그건 내가 전문이지. 이제껏 살면서 한 번도 져본 적 없거든.”

“자신만만한데?”

“나중에 지고 나서 봐달라고 하지나 마.”

눈꺼풀을 꾹 감은 겨울이 이내 커다란 눈을 부릅뜨고 시후를 쳐다보았다.


“자, 시작.”

처음부터 눈에 힘을 준 겨울과 달리 시후는 나름 평온하게 겨울을 빤히 주시했다.

눈에 힘은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 까만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겨울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추운 계절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진득하고 뜨거운 시선에 겨울은 조금씩 위기가 찾아왔다.

눈이 시려서가 아니라, 왠지 그와 눈을 마주치기가 부끄러운 탓이었다.

하얀 볼은 점차 핑크빛으로 물들어가고, 안절부절못하게 되자 결국 먼저 눈을 감은 것은 겨울이었다.

칫, 혀를 찬 겨울이 제 달아오른 얼굴에 부채질하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런 겨울을 귀엽게 보며 시후가 넌지시 물었다.


“같이 와인이라도 한 잔 마실까?”

“있어? 어디에?”

“지하에 와인 창고가 따로 있거든. 가볼래?”

“좋아. 같이 가자.”

자리에서 일어난 시후가 겨울의 손을 잡고 별장의 지하에 위치한 와인 창고로 향했다.

각양각색의 술들이 진열되어 있었으나 와인에 대해 잘 모르는 겨울은 좀처럼 고르지 못하고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이건 뭐야?”

“그건 샴페인.”

“이름이…….”

“돔페리뇽 빈티지야.”

“어…… 나 그거 들어본 적 있어. 비싼 거잖아.”

시후와 결혼하기 전에는 술이라면 무조건 소맥만 마셨기에 와인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잘 모르는 겨울조차도 어디에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인 걸 보면 꽤 비싼 샴페인인 것 같았다.


“이걸로 마실래?”

“음…… 그래, 그러자.”

그래봐야 얼마나 비싸겠나 싶은 마음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샴페인을 집어 들었다.

계단을 타고 올라와 지하의 와인 창고에서 빠져나온 둘은 아까 젠가를 하던 소파로 돌아와 나란히 앉았다.

겨울은 샴페인의 뚜껑을 따기 위해 낑낑거리며 애를 썼으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내가 따줄까?”

“아니야. 내가 딸 수 있…… 꺅!”

말을 채 잇기도 코르크 마개가 확 튀어 오르며 놀란 겨울이 병을 놓쳤다.

호박빛깔의 샴페인이 겨울의 위로 전부 쏟아지며 소파까지 축축하게 침범했다. 순식간에 가슴부터 하체까지 온통 젖어버린 겨울이 당황하여 우왕좌왕했다.


“괜찮아? 안 다쳤어?”

“응. 나는 괜찮은데…….”

샴페인 병을 주워 테이블에 올려놓았으나 이미 술은 전부 엎질러진 후였다.


“어떡해……. 미안, 이거 비싼 술 아니야?”

“별로 안 비싸.”

“거짓말. 나도 이름 들어본 적 있는 술이면 그래도 엄청 나갈 것 같은데.”

울상을 지은 겨울이 비 맞은 생쥐 같은 제 차림새를 내려다보며 한숨 쉬었다.

축축하게 젖은 겨울을 가만히 응시하던 시후의 눈빛이 부지불식간에 관능적으로 변했다.

그 찰나의 변화를 눈치챈 겨울이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면…….”

커다란 손이 하얀 허벅지를 살짝 움켜쥐었다.


“내가 다 핥아먹으면 되지.”

숨 막히게 야릇한 말에 겨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당황해서 뭐라 답하지도 못하고 입술만 벙긋거리는데, 그 순간 겨울의 몸이 뒤로 확 넘어갔다.


“꺅……!”

밀려오는 무게에 순식간에 소파에 눕혀진 겨울의 눈이 커다랗게 뜨여졌다.

가느다란 허벅지를 붙잡아 들어 올린 시후가 겨울의 발등에 살며시 입술을 맞추었다.

말랑말랑한 입술의 감촉이 느껴지자 놀란 겨울이 다리를 뒤로 빼려고 했으나 단단하게 붙잡은 손길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잠깐, 잠깐만……!”

샴페인에 젖어 미끌미끌해진 뽀얀 속살에 키스하며 시후는 점차 과감하게 영역을 넓혀나갔다.

정말 모조리 핥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움직이는 그의 입술에 거칠어진 숨소리가 혀끝에서 부서졌다.


“오빠, 제발, 그만……아.”

촉촉하게 번져나가는 감각에 어쩔 줄 모르고 몸을 뒤틀자 그 반응을 즐기는 듯 그는 감미롭게 입술을 움직였다.

타액과 샴페인이 끈적끈적하게 뒤엉키고 겨울은 그의 어깨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깊이 파고드는 감각이 가감 없이 활개 치자 겨울의 심장으로 격렬한 파동이 휘몰아쳤다.

한참 동안 욕망을 풀어내며 즐기던 그가 엄지로 제 입술을 쓸며 웃었다.


“귀여워…….”

픽 웃음을 흘린 그가 겨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솜털 하나하나를 핥듯이 섬세하게 키스하는 입술에 겨울이 어쩔 줄 모르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그, 그만…….”

“안 돼.”

그의 입술과 손이 닿은 부위가 불에 덴 듯 뜨거워 참을 수가 없었다. 몸 구석구석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길에 아랫배가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밤새 예뻐해 줄 거야.”

나직한 음성이 겨울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셨다.

사랑이 넘치지만, 어딘가 음습한 눈빛에 이대로 먹혀버릴 것만 같았다.
 


 
여러 차례 잊지 못할 시간을 보낸 뒤 함께 샤워한 두 사람은 새벽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잠들기 전 서로 마주 보고 누운 시후와 겨울은 서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웃었다.


“요즘 하루하루가 신기해. 그냥 다 기적 같아.”

배시시 입꼬리를 말아 올린 겨울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조근조근 속삭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죽도록 사랑해준다는 거, 되게 소중하고 행복한 일이었다는 거.”

미래를 직면한 순간, 말 못 할 두려움은 사랑과 평온으로 뒤바뀌었다.

아직 닥칠 미래가 바뀌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이전보다 훨씬 현재의 감정과 행복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부드럽게 미소 지은 시후가 손을 뻗어 겨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얀 뺨을 어루만지던 그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얼른 봄이 왔으면 좋겠다.”

느지막하게 목소리가 겨울의 가슴으로 젖어 들었다.


“너와 같이 벚꽃 보러 가고 싶어. 봄에 하는 사랑은 좀 더 달콤하지 않을까.”

따스한 속삭임에 겨울이 푸스스 웃으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며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난 오빠랑 있으면 1년 내내 봄이야.”

더없이 평화로운 순간이었으나, 왠지 가슴이 뭉클하고 먹먹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행복한 미래가 영원히 펼쳐져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어쩐지 왈칵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겨울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그런 겨울의 변화를 눈치챈 시후가 말없이 여린 몸을 꽉 끌어안아 보듬었다.

이 세상에 오로지 둘만 남겨진 기분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이 두 남녀를 휩쓸었다.

겨울은 시후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작게 숨을 골랐다.

지금껏 늘 신을 원망해왔었다.

이런 운명을 타고난 것이 억울해 밤잠을 이루지 못한 날이 많았다.

단 한 번도 신을 믿어본 적이 없지만…….

겨울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에게 기도했다.

너무 오랫동안 홀로 외롭게 살아왔던 이 남자가.

내가 떠난 뒤로도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홀로 버텨왔던 이 가엾은 남자가…….

……더는 아프지 않도록 해주세요.

제가 그의 곁을 오래도록 지킬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렇게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눈을 감았다.

***

행복했던 찰나의 여행이 끝나고 두 사람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겨울은 오늘 중요한 일정이 있다는 시후에게 넥타이를 매주며 그를 배웅했다.


“오늘 처남 퇴원하는 날이라고 했나?”

“아니, 다음 주. 원래 오늘 예정이었는데, 회복이 늦어서 다음 주에 퇴원한다고 그러네. 엄마가 오늘은 일 때문에 병원 비운다고 해서 내가 대신 가려고.”

“나도 갈까?”

“오빠는 오빠 일 봐야지.”

픽 실소한 겨울이 까치발을 들어 올리고 시후의 뺨에 쪽 뽀뽀했다.


“이따 저녁에 봐.”

오늘도 사랑스러움이 뚝뚝 떨어지는 아내 때문에 시후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작은 몸을 꽉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여러 번 말한 뒤에야 겨우 뒤를 돌 수 있었다.

***

남동생 이경의 간병을 위해 병원을 찾은 겨울은 잠시 볼일을 보러 가야 한다는 혜숙과 교대를 했다.

세상 모르게 잠자고 있는 이경의 옆에 앉아 겨울의 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누나와 엄마에게 폐 끼치지 않겠다고 학교생활이며 아르바이트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사는 이경이었기에, 이런 때가 아니면 좀처럼 쉬지도 못할 터였다.

겨울은 그런 이경이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웠다.


“이건 왜 또 끌어안고 자고 있대…….”

마음이 여린 동생은 아버지의 유품인 펜을 망가뜨린 것이 아직도 속상한지, 그 펜을 품에 꼭 쥔 채로 자고 있었다.

자세가 불편해 보여 그의 품에서 펜을 뺀 겨울이 작게 한숨을 지었다.

어차피 원래도 수명을 다해 나오지 않는 펜이었는데, 이토록 속상해하는 동생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고칠 수는 없나?”

볼펜을 만지작거리며 살피던 겨울이 실수로 펜촉의 머리 윗부분을 떼어냈다.


“앗…….”

깜짝 놀라 도로 끼워 넣으려던 겨울의 손이 멈칫했다.


“……이게 뭐지?”

펜촉의 뚜껑 아래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이거 아무리 봐도…….”

이어폰 꽂는 단자 구멍 아닌가?

요즘은 대부분 블루투스를 사용하기에 잘 볼 수 없지만, 옛날에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게 왜 볼펜에…….”

말끝을 흐린 겨울의 가슴이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야 너희 아버지가 생전에 당부했었거든.’

멈칫한 겨울의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것은 얼마 전 혜숙이 이 펜을 두고 했던 말이었다.


‘이 펜 두 개는 절대 버리지 말라고, 자기가 죽는 일이 있더라도 펜만큼은 절대 누구를 주지도 말고, 태우지도 말라고 했었지.’

겨울의 심장이 쿵 아래로 떨어졌다.

커다랗게 뜨여진 동공이 거칠게 뒤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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