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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4.
곧장 병원을 빠져 나온 겨울은 그 길로 대형 전자상가에 있는 수리센터로 향했다.
직원에게 아버지의 펜을 보여주자 뚫어지게 살피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녹음기능이 내장된 보이스펜이에요.”
총알이 관통한 것처럼 겨울의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녹음……기능이요?”
“네. 굉장히 옛날 모델 같은데…… 이 정도면 10년도 넘었겠는데요?”
마른침을 삼키자 심장이 엄청난 속도로 박동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유품으로 남겼던 볼펜은 단순한 필기도구가 아닌 녹음기였던 것이었다.
“……안에 뭔가 녹음되어 있는 게 있나요?”
“글쎄요. 연결해봐야 알 것 같은데요. 해드릴까요?”
“네. 해주세요.”
긴장이 몰려오자 손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주먹을 꽉 움켜쥐고 초조하게 직원의 말을 기다렸다. 1초가 억겁처럼 느껴져 입술을 꽉 깨물었다.
“녹음이 되어 있네요. 2시간 정도짜리 녹음 파일이 있어요.”
“그거 USB에 담아 주세요. 제 메일로도 보내도 되죠?”
“네. 그렇게 해드릴게요.”
직원이 건네준 USB를 주머니에 넣고 서둘러 가게를 나섰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정신이 아득했으나 두 발에 힘을 주고 가까스로 차에 도착했다.
“사모님, 어디로 모실까요?”
“…….”
“사모님?”
“……아, 죄송해요. 딴생각하다가……. 일단 집으로 가주세요.”
수행 기사의 물음에 더듬더듬 대답한 겨울이 크게 숨을 골랐다.
제 가슴에 손을 올리자 심장이 비정상적인 속도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들에 혼란은 점차 깊어져만 갔다.
‘……대체 여기에, 뭐가 녹음된 거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 그토록 남기고 싶었던 이야기는 대체 뭘까.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벌써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핸드폰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연결한 겨울은 메일로 보내놓은 음성 파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크게 숨을 골랐다.
떨리는 손으로 그 파일을 재생했다.
오래된 녹음 파일이었기에 음질의 상태는 아주 좋지 않았고, 꺼림칙한 잡음이 너무도 많이 섞여 있었다.
두 눈을 감은 겨울은 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처음부터 전부 강성호 네 계획이었지.
잠깐의 노이즈 끝에 들려오는 것은 약 13년 만에 듣는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그는 감정이 격해진 것처럼 화를 내고 있었다.
-남원화학 유 사장을 꾀어서 원료를 빼돌린 것도, 기자들 포섭해서 우리 화장품에 중금속류가 발견됐다는 가짜 뉴스를 퍼뜨린 것도……. 자금줄 막으려고 김 행장 포섭한 것도 전부! 강성호 네가 한 짓이잖아! 우리 회사를 먹으려고……!
-거슬리잖아. 별 같잖은 게 우리 회사와 경쟁사로 손꼽히는 게.
대화의 상대는 틀림없이 강성호 회장이었다.
-강성호, 넌 심지어 내가 합병을 받아들일 때 내걸었던 조건도 결국 하나도 지키지 않았어.
-무슨 조건? 함병식 너한테 임원 자리 내어주고, 제이지코스메틱 하청 공장 그대로 인수해서 쓰고, 네 회사 직원들 모두 고용 승계하는 그 조건?
픽 웃음을 터뜨린 강 회장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다 해줬잖아. 뭐가 불만이야?
-지금 나랑 장난해?!
함병식 회장은 분노를 터뜨리며 목소리를 드높였다.
-나한테 횡령죄를 뒤집어씌워서 쫓아낸 것도 모자라, 하청 공장들 계약도 전부 끊고 우리 쪽 식구들도 다 잘랐잖아!!!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뭐야?
-네깟놈이 쓰던 소모품들을 내가 계속 써줘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
-……소모품? 강성호 네 눈에는 그 사람들이 소모품으로 보이나?
하, 함 회장이 헛숨을 터뜨렸다.
-너는 단순히 우리 회사를 망하게 만든 게 아니야. 수십수 백 명, 아니 그 사람들이 책임지고 있던 가족들까지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의 미래를 앗아간 거야. 그런 네가 사람이야? 그러고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어? 기업보다 사람이 먼저잖아!
-야, 함병식. 네가 그렇게 무르니까 당하고 사는 거야.
강 회장은 경멸과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 말에 허탈한 숨을 터뜨린 함 회장이 나직하게 말했다.
-……우리 회사 하청 업체였던 남동 공장 한 사장, 이틀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
-한 사장은 우리 제이지코스메틱하고 30년을 가까이 일한 사람이야! 빚더미에 나앉아서 세상을 떠나고, 한 사장 와이프는 충격으로 정신 병원에 입원했어! 겨우 고등학생인 아들 석우는 학교도 자퇴했어!
-넌 남의 집구석 일에 참 관심도 많다. 네 코가 석 자 아닌가?
비소를 터뜨린 강 회장이 나지막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한 가지 물어보자. 이틀 전 뒤진 남동 공장 한 사장은 나를 원망할까, 아니면 함병식 너를 원망할까?
-…….
-고용 승계되었다가 네 횡령죄 때문에 함께 쫓겨난 제이지코스메틱 직원들은 우리 KU를 원망할까, 아니면 회사도 못 지키고 하다못해 횡령까지 저지른 너를 원망할까?
-……쓰레기 같은 자식…….
-남의 가정까지 걱정하기 전에 네 가정부터 챙기란 소리야. 이제 며칠 있으면 감방 들어갈 놈이 말이야.
마치 벌레를 대하는 듯한 말투였다.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단 하나야. 난 여지를 남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살아 있으면 복수네 뭐네 딴소리를 하기 바쁘니까.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게 뭐야.
-먹어.
강 회장은 함 회장에게 무언가를 건넨 듯 보였다.
-마지막으로 가장으로서 긍지를 지킬 기회를 주지.
-……내 모든 걸 빼앗아가더니, 이제는 나보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건가?
-선택은 네 몫이야. 시간은 딱 보름을 주지. 네 처자식까지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네 손으로 전부 끝내.
-…….
-네 와이프와 딸내미 몸판 돈으로 밥 벌어먹고 싶은 건 아니겠지?
또다시 짙은 침묵이 이어졌다.
한참의 정적 끝에 입을 연 함 회장이 낮게 속삭였다.
-아이들과 아내한테 손대지 마라.
모든 걸 체념한 듯 덤덤한 목소리였으나 그 끝은 분노로 점철되어 떨리고 있었다.
-이 약속마저 지키지 않으면, 죽어서도 귀신이 되어 복수할 것이야.
탁.
핸드폰을 놓친 겨울의 입술이 바르르 경련했다.
심장이 엄청난 속도로 고동치고 참을 수 없을 만큼 구역질이 밀려왔다.
어딘가 석연치 않았던 아버지의 죽음의 내막은 이토록 잔인한 것이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과호흡이 밀려온 겨울은 거친 숨을 뱉으며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버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 목숨을 바쳐 증거를 만들고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왈칵 눈물이 터지고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괴로움에 이대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사모님, 어디 아프세요?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놀라 묻는 수행 기사에게 더듬더듬 답한 겨울의 호흡이 거세게 떨렸다.
어떻게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걸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던 건지, 자책이 밀려왔다.
곧장 시후에게 알리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제발 받아. 빨리.”
그러나 그는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몇 번을 걸어도 계속해서 응답하지 않았다.
시후가 연락을 받지 않으니 일단 집에 도착한 겨울은 앉지도 못하고 전전긍긍 거실을 돌아다니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아버지는 의도적으로 강성호가 직접 본인의 죄를 실토하게끔 유도하여 질문한 듯했고, 이 녹음은 경찰 조사에서 가장 큰 물증으로 작용할 것이었다.
“잠깐…….”
일순 멈칫한 겨울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빠가 남긴 볼펜, 두 개잖아.”
혜숙은 아버지의 유품인 볼펜을 이경과 겨울에게 각 한 개씩 나눠주었었다.
“내가 그 볼펜을 어디에서 잃어버렸지…….”
이경이 그러했듯 클레르에서 부적처럼 볼펜을 들고 다니다가, 약 두 달 전 잃어버렸던 기억이 있었다.
아무리 찾고 찾아도 나오지 않아 포기했었지만, 볼펜이 중요한 단서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 상황은 달랐다.
“미쳤어, 함겨울. 그게 어떤 건데……!”
그 펜 안에도 틀림없이 다른 증거가 녹음되어 있을 터였다.
다급하게 휴대전화를 주워든 겨울은 조금 전 퇴근한 수행 기사에게 바로 연락을 넣었다.
-네, 사모님.
“저기, 백 기사님. 죄송하지만 다시 저희 집으로 와 주실 수 있나요? 갈 데가 있어서요.”
-아…… 정말 죄송합니다, 사모님. 귀가 중에 교통사고가 일어나서요. 지금 제가 응급실에 있어서…….
“네?”
갑작스러운 소식에 겨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요. 심하게 다친 건 아닌데, 일단 의례적으로 검사받으러 왔습니다. 그래서 일단 급한 일이시면, 저희 쪽 김 대리를 댁으로 보내겠습니다.
“그러면 청담 클레르로 오라고 하실래요?”
-네. 알겠습니다. 사모님.
전화를 끊은 겨울의 숨이 가녀리게 떨려왔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었다가 뱉은 겨울은 클레르로 향하기 위해 벗어두었던 코트를 입었다.
무작정 차 키를 주워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눈으로 보일 정도로 떨리는 제 손을 내려다본 겨울이 마른 침을 삼켰다.
지금 운전대를 잡았다간 십중팔구 사고 날 게 틀림없었다.
할 수 없이 급한 대로 택시를 타기로 하고 현관 밖으로 나섰다.
밤 11시를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영업시간이 이미 한참 전에 끝난 클레르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겨울은 빠르게 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가 클레르 내부를 샅샅이 수색했다.
데스크부터 직원 대기실, 관리실, 탈의실을 차례로 살피던 겨울은 자정이 가까워져서야 볼펜을 찾을 수 있었다.
“찾았다…….”
볼펜은 다름 아닌 희수의 서랍장에 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일전에 유니폼을 빌려줬을 때 딸려 들어갔던 모양이었다.
바로 볼펜 뚜껑을 열어보니, 이것 역시 보이스펜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코트 주머니 안에 볼펜을 밀어 넣은 겨울은 밑에서 대기 중이라는 경호원 김 대리의 문자에 지금 내려가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아래로 내려가 건물 밖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대기하고 있는 차량은 없었다.
“뭐지?”
의아함에 김 대리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아래에서 대기 중이라던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며 마른 침을 삼켰다.
시후는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고, 어느덧 시간은 자정을 넘기고 말았다.
늦은 시각이었기에 골목 거리에는 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었고, 기다리던 겨울은 결국 택시라도 잡기로 했다.
큰길로 나서려는 순간, 뒤에서 나타난 누군가가 겨울의 어깨를 콱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