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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추적
2022.09.18.



“아……!”

낯선 손길에 놀란 겨울이 소스라치며 몸을 뺐다. 그대로 중심을 잃고 휘청였으나 잘록한 허리를 단단하게 감는 손길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겨울 씨, 괜찮으세요?”

어깨를 잡은 사람은 다름 아닌 카페 ‘도스 트레스 신코’의 사장 한석우였다.

익숙한 얼굴에 팽팽했던 긴장이 풀린 겨울이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사장님, 안녕하세요.”

“갑자기 나타나서 놀라셨나 봐요. 죄송해요.”

겨울의 반응에 되레 당황한 듯 석우가 곧바로 사과했다.


“그런데 무슨 일 있으세요? 안색이 별로 좋지 않은데…….”

유난히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 겨울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닦은 겨울이 어수선하게 말을 돌렸다.


“아니요, 아무 일도 없어요. 그보다 사장님은 이 시간에 여기 웬일이세요?”

“아까 카페 마감하고 신메뉴 개발하다가 조금 늦어졌어요. 이제 정리하고 가려고 했는데…….”

말끝을 늘인 석우의 시선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가녀린 어깨에 닿았다.


“일단 가게 안으로 들어오세요. 차 한 잔 드릴게요.”

“아…….”

겨울이 어수선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벌써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큰 대로변도 아닌 골목이었고, 혼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겨울은 석우의 호의를 받기로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의 매장 문을 도로 연 석우는 여전히 떨고 있는 겨울을 안쪽 소파 자리에 앉히고는 작업대 쪽으로 향했다.

겨울은 휴대전화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시후나 경호원의 연락을 기다렸으나 아직 누구에게도 소식이 없었다.


“캐모마일 티에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잔이 부드럽게 탁자 위로 올랐다.


“겨울 씨는 커피 좋아하시는데, 커피 머신을 이미 마감해서 차밖에 못 드려서 죄송해요. 그래도 지금은 커피보다는 차가 조금 더 나을 거예요.”

“네……. 잘 마실게요.”

떨리는 손을 뻗은 겨울이 머그잔을 느슨하게 움켜쥐었다. 뜨거운 차 위로 살짝 입김을 불어 넣은 겨울이 한 모금 입에 물고 삼켰다.


“좀 진정이 되세요?”

“네. 감사해요. 사장님.”

내내 가슴으로 불어오던 한기가 조금 잦아들며 떨림이 멈추었다. 한결 차분해진 음성으로 답하자 석우가 나지막이 웃었다.


“저 조만간 이 카페 접기로 했어요. 이제 사장님 말고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아, 정말요? 카페 그만두세요?”

“네. 완전히 관두는 건 아니고, 한 반년 정도 재정비하고 베이킹도 좀 공부하다가 가게 이름을 바꿔서 대학가 쪽에 다시 오픈하려고요.”

“가게 이름 바꾸시는구나. 지금 이름 도스 트레스 신코도 멋있는데.”

“저도 마음에 들었는데, 아무래도 보통 사람들한테는 낯선 말이라 조금 어렵게 와닿는 것 같아서요.”

“스페인어라고 했죠? 무슨 뜻이에요?”

“사실 별 큰 뜻은 없고, 그냥 숫자에요. 2, 3, 5를 좋아해서 스페인어로 ‘dos tres cinco’로 짓게 됐어요.”

“그렇구나……. 사장님 커피는 맛있으니까 어떤 이름이어도 잘 되실 거예요.”

겨울의 말에 석우가 나지막이 웃었다.


“이제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달라니까요?”

농담조로 가볍게 말하자 조금 머쓱해진 겨울이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아, 네. 한석우 씨…….”

잠시 멈칫한 겨울이 말끝을 길게 늘였다.

슬며시 미간을 좁힌 겨울의 머릿속으로 어떤 기시감이 스쳐 지나갔다.

……한석우?

이 이름, 어디에선가…….


‘……우리 회사 하청 업체였던 남동 공장 한 사장, 이틀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그 순간 겨울의 귓가에서 다시금 재생되는 것은, 조금 전 들었던 보이스펜에 녹음된 아버지의 음성이었다.


‘한 사장은 우리 제이지코스메틱하고 30년을 가까이 일한 사람이야! 빚더미에 나앉아서 세상을 떠나고, 한 사장 와이프는 충격으로 정신 병원에 입원했어! 겨우 고등학생인 아들 석우는 학교도 자퇴했어!’

녹음의 내용을 떠올린 겨울의 가슴으로 일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경직된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제 허무맹랑한 생각을 비웃으며 떨쳐버렸다.


“겨울 씨?”

“아, 죄송해요. 잠깐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건지.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한 수준의 망상이었다.

바보 같은 생각을 지운 겨울이 헛웃음을 흘리며 머그잔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따뜻한 캐모마일 티로 목을 축이며 차분하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무심코 올린 시야 끝에 걸린 것은 석우의 아이보리색 폴라티의 소매였다.

깨끗한 섬유의 끝에는 검붉은색의 액체가 방울져 튄 것처럼 작게 오염이 되어 있었다.


‘……저게 뭐지?’

하얀 니트 위에 묻은 붉은빛의 오염은 너무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설마…… 피……?


“아, 이거요?”

겨울의 불안한 시선을 느꼈는지 석우가 웃으며 팔을 살짝 들어 보였다.


“아까 신메뉴 개발하던 중이었다고 했었잖아요. 그때 핫도그 만들다가 소스가 튀었나 봐요.”

오염을 가리려는 듯이 석우가 니트의 소매를 걷어 올려 접었다.

두 번쯤 접자 드러난 팔목으로 보이는 것은 아무렇게나 휘갈긴 듯한 레터링 타투였다.

움찔한 겨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왔다.

곧바로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것은 약 한 달 전 시후의 병실에 찾아왔던 형사가 했던 말이었다.


‘키가 아주 큰 남자였고, 손목에 레터링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목소리와 외양으로 추측하는 연령대는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 사이 정도라고 진술했고요.’

시후의 복부에 칼을 찔러넣었던 범인은 자신에게 범행을 사주한 남자가 따로 있다며, 그 교사자의 외모에 대해 그렇게 묘사했었다.

……키가 아주 큰 남자, 손목에 레터링 문신.


“…….”

겨울의 심장이 아래로 떨어졌다.

일순 시야가 캄캄해지며 내리꽂힌 심장이 엄청난 속도로 고동치기 시작했다.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고 불길한 직감이 스멀스멀 불어왔다.


‘그러고 보니, 가게 이름이 스페인어로 2, 3, 5…….’

시후의 새어머니 유서진이 죽기 직전 자신의 핸드폰에 남긴 숫자도…….

머그잔을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손에 힘이 풀리자마자 심장의 경로에 따라 테이블 위로 잔이 시끄럽게 추락했다.


“왜 그러세요, 겨울 씨?”

“아, 그게…… 제가 급한…… 일이 생겨서…….”

점차 경직되어가는 입술을 가까스로 움직여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태연한 척 연기해도 파르르 떨리는 손발은 차마 감출 수 없는 부분이었다.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심장의 박동이 너무도 빨라 고막이 얼얼할 정도였다.


“그럼…….”

덜덜 손끝이 떨렸다.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밖을 나서기 위해 재빨리 다리를 옮겼다.

그러나 몇 걸음 나아가기도 전에 겨울의 눈앞이 핑글 돌았다.


“……아.”

밀려오는 어지러움에 휘청인 겨울이 거친 숨을 내몰아 쉬었다.

중심을 잡으려고 했으나 이미 약의 기운에 잠식된 다리는 폭풍우를 맞은 갈대처럼 으스러졌다.

여린 몸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처박혔다.

사지가 축 늘어진 채로 카페 바닥의 타일을 바라보는 겨울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는 눈꺼풀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굳어가는 육체는 제 마음대로 제어가 되지 않았다.


“갈 수 없을 거예요.”

섬뜩한 목소리가 겨울의 고막을 긁었다.


“이제 내 계획의 일부가 될 시간이니까…….”

흘러가는 음성이 아득해지며 의식이 흐릿해졌다.


“잘 자요.”

 

***

한편 시후는 이번에 신규로 런칭한 게임에서 발생한 표절 시비로 인한 법적 문제 때문에 고역을 치르고 있었다.

얼마 전 퇴사한 두 명의 개발자들이 해외의 다른 게임 회사로 넘어가 동일한 방식의 게임을 만들어 이틀 먼저 오픈한 탓이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무팀을 비롯한 관련 담당자들과 함께 시작한 긴급회의는 마라톤으로 이어지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겨우 막을 내렸다.


“부재중이 왜 이렇게 많이…….”

지금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겨울을 위해 빠르게 코트를 걸쳐 입으며 핸드폰을 열었는데, 이상하게도 부재중 전화가 열통 가까이 도착해 있었다.

미간을 좁힌 시후가 곧장 통화버튼을 눌렀으나, 겨울은 한참이 지나도 받질 않았다.


“기다리다가 잠들었나.”

늦은 시간이었으니 자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서둘러 집으로 향하기 위해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액셀을 밟기도 전에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시후가 멈칫했다.

겨울인가 싶어 곧장 확인했으나, 그녀의 수행 기사인 백형준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왜 갑자기 전화를.

가슴 한군데에서 피어오르는 불안을 가까스로 외면하며 시후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네, 대표님…….

“무슨 일입니까?”

-그, 그게…… 다름이 아니라, 사모님이 약 3시간 전에 용무 있으시다고 부르셨었는데요.

“그런데요.”

-제가 하필 교통사고가 나서, 할 수 없이 저희 업체에 김민성 대리를 대신 보냈는데…….

잠시 머뭇거리던 백 기사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지금 김 대리가 흉기에 찔려서 의식을 잃은 채로 응급실에 실려 왔습니다…….

“……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일순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머리가 차게 식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 사모님 위치도 전혀 추적이 안 되는 상황이라…….

“……지금 제 아내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뜻입니까?”

-……그게, 전원이 꺼져서 추적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마지막 위치는 클레르 근방으로 파악이 되고, 김 대리도 그 골목에서 흉기에 찔린 채 발견되었습니다.

온몸에 흐르는 피가 이토록 서늘할 수가 없었다.

가파른 숨을 터뜨린 시후가 제 머리를 움켜쥐었다.

겨울의 경호원이 흉기에 찔린 채 발견되었고, 그녀는 현재 행방이 묘연하여 위치추적도 불가하다.

이 말이 뜻하는 의미는 단 하나였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심장이 섬뜩하게 조여오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무래도 경찰에 협조 요청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성이 끊어질 것만 같았으나 이럴수록 더더욱 침착해져야만 했다.

가까스로 심호흡한 시후는 핸들을 꽉 움켜쥐며 마른침을 삼켰다.


“일단 알겠습니다. 김민성 대리가 범인의 얼굴을 봤을 테니까 의식을 찾으면 나한테 연락하세요.”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거칠게 떨렸다.

머리가 완전히 암전되어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뜨끈하게 열 오른 눈가를 손으로 문지른 시후가 입술을 짓씹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걸까.

또 그 빌어먹을 노인네가 벌인 일인 건지…….


“하…….”

계속되는 악재에 노이로제에 걸릴 것만 같았다.

이건 단순한 실종도 사고도 아닌, 틀림없는 납치였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겨울과 의도적으로 클레르에서 끊긴 겨울의 마지막 위치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쯤 두려움에 떨고 있을 겨울을 떠올리며 시후가 이를 악물었다.

아직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하기만을 바랐으나, 자꾸만 불안감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곧장 휴대전화를 집어 든 시후가 분노로 점철된 손을 움직여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이어지고 달칵, 전화가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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