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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미안해 (104/112)


104. 미안해
2022.09.28.



 


“……나를 자극하지 마세요.”

제 이마 위로 닿는 차가운 냉기에 겨울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최대한 고통 없이 한 번에 보내줄 마음이…….”

총구는 정확히 제 머리를 조준하고 있었다.


“사라지지 않도록 말이에요.”

심장이 엄청난 속도로 추락하며 처박혔다.

덜컥 두려움이 밀려오고 혀가 마비된 듯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이마를 꾹 누르는 총구의 비정한 한기에 등골이 섬뜩했다.

견딜 수 없는 공포가 온몸을 지배하고 겨울의 숨이 턱 틀어막혔다.

……정말 이대로 죽게 되는 걸까?


“…….”

내가 강시후의 죄책감으로 남아 오래도록 그를 괴롭힌다면…….

또다시 8년의 괴로운 세월을 홀로 보내게 만들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움츠린 겨울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창백하게 질린 겨울이 입술을 깨물고 두 눈을 질끈 감은 순간이었다.

어디에선가 전화벨 소리가 과열된 공간을 시끄럽게 울렸다.

총기를 내린 석우가 제 코트 주머니 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 왜.”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올린 겨울이 두려움을 억누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

석우가 입안을 씹으며 총기를 코트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이곳으로 오는 길목에 미리 설치해놓은 CCTV를 살피고 수상한 점이 있으면 보고하라고 지시한 남자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대체 여기를 어떻게 알고…….”

석우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CCTV로 경찰차로 추정되는 차들이 대거 몰려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근방에 다른 사건이 일어난 게 아니라면 틀림없이 석우를 체포하기 위해 몰려드는 차들일 터였다.

도대체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찾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CCTV에 찍힌 장소는 꽤 떨어진 곳이었으니 지금 당장 움직인다면 도망칠 시간은 충분했다.

석우는 곧바로 코트 안에서 잭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예리한 선단을 기울여 겨울의 가느다란 발목을 옥죄고 있는 밧줄을 단번에 잘랐다.


“나 따라서 걸어요.”

주저앉아 있던 겨울을 강제로 일으킨 석우가 그녀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소리 내면 어떻게 되는지…….”

등 뒤로 총구를 들이밀자 겨울이 움찔했다.


“말 안 해도 알겠죠.”

겨울이 마른침을 삼켰다.

가느다란 다리가 두려움에 덜덜 떨렸다.

총구가 척추를 밀어내는 감각이 소름 끼치도록 생생하게 느껴졌다.

견딜 수 없는 공포에 압도되어 이제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제 어깨를 움켜쥔 남자가 이끄는 대로 다리를 움직이는 게 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였다.

감금되어 있던 폐건물 밖을 나오니 폭우가 거센 바람과 함께 퍼부어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아스팔트 위를 때리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고막을 찌르고 겨울은 절박하게 동공을 굴려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근처에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나다니지 않았고, 보이는 차라고는 석우의 SUV 한 대가 전부였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겨울을 강제로 끌고 간 석우가 여린 몸을 뒷좌석에 내던지듯이 밀어 넣었다.

곧바로 운전석에 올라타 다급하게 시동을 건 그는 과격하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엄청난 속도로 주행하자 겨울의 몸이 앞쪽으로 확 쏠렸다.


“아……!”

시트 밑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다리를 아래로 내린 겨울이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난생처음으로 겪어보는 무지막지한 속도에 겁을 먹은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자꾸만 끊어지려는 정신을 겨우 부여잡고 여기가 어디인지 짐작이라도 하기 위해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드문드문 켜져 있는 가로등이나 우거진 나무들을 보아 분명히 서울은 아닌 것 같았다.

경기도 외곽의 시골이나 아니면 아예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달리는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었으나, 팔목은 여전히 묶여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했다.

불안에 잠식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는데, 문득 저 멀리서 환한 빛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달려오는 것은 다름 아닌 노란색 스포츠카였다.

익숙한 차의 외관에 놀란 겨울의 눈이 커진 순간, 거칠게 물살을 헤친 스포츠카가 돌연 차선을 넘어 사납게 회전했다.

끼이이이익!!!


“뭐야……!”

갑작스럽게 앞을 가로막아선 차에 흠칫한 석우가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잡았다.

타이어 바퀴가 타는 듯한 기괴한 소음이 민감해진 고막을 꿰뚫었다.

아슬아슬한 거리를 남겨 두고 차는 충돌 직전에 멈추었다.

질끈 눈을 감았던 겨울이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

뜨거워진 겨울의 각막으로 담기는 것은 환각도 신기루도 아니었다.

쏟아지는 빗물을 헤치고 어둑한 차창 건너편으로 보이는 얼굴은 틀림없는 강시후였다.


‘……오빠가, 와줬어.’

약속대로 나를 찾아내 줬어.

감정이 북받친 겨울은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를 다시 만났다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전에, 돌연 튀어 나가는 감각과 함께 온몸이 뒤흔들렸다.

쾅!!!

지진이 난듯한 굉음과 함께 유리창이 박살 났다. 무자비하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석우가 시후의 차 옆면을 그대로 들이박은 것이었다.

깨진 유리창의 파편이 피부를 스치고 겨울은 온몸이 욱신거리는 고통을 느꼈다.

질끈 감은 눈을 뜨기도 전에 우악스러운 손길에 의해 강제로 차 밖으로 끌어 내려졌다.


“윽……!!!”

단단한 팔뚝이 제 목을 콱 압박하자 겨울이 가쁜 숨을 토해냈다.

눈을 뜨자 성냥갑처럼 구겨진 차체와 유리 조각들을 헤치고 검은 구두가 다가왔다.

작렬하는 폭우를 뚫고 뚜벅뚜벅 걸어오는 시후의 위압감에 눌린 석우가 움찔 몸을 떨었다.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린 그가 한발 물러서며 코트 안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멈춰.”

석우가 불안한 기색을 숨기며 씹듯이 뱉었다.


“더 접근하면 이 여자의 머리가 터지는 걸 보게 될 거야.”

관자놀이를 밀어내는 총구의 힘에 겨울의 여린 고개가 왼쪽으로 꺾였다. 대담하게 다가오던 구둣발이 우뚝 굳었다.

걸음을 멈춘 시후가 말없이 석우를 노려보았다.


“……오빠…….”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창백하게 질린 겨울이 더듬더듬 그를 불렀다.

무자비하게 떨어지는 빗줄기만큼이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 밑에 고인 물기가 후드득 아래로 떨어졌다.

겁에 질려 떨고 있는 겨울을 보며 시후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여린 머리를 거칠게 누르고 있는 총구를 보자 정신이 끊길 것만 같았다.


“…….”

지금쯤 경찰은 모두 겨울이 감금되어 있었던 폐건물로 향했을 터였다.

한석우가 제 생각보다 훨씬 치밀한 놈이라는 걸 염두에 둔 시후만이 만에 하나를 대비하여 그가 도망칠 경로를 예상해서 달렸고 그 희박한 확률이 적중한 것이었다.

시후가 초조하게 잇새를 악물었다.

경찰이 이곳을 알아내고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원하는 게 뭐야.”

심호흡한 시후가 씹듯이 뱉었다.


“뭐든 전부 들어줄 테니 함겨울을 이쪽으로 넘겨.”

그 말이 우습다는 듯 석우가 조소를 터뜨렸다.


“전부 들어준다고…….”

차가운 입꼬리가 비틀리며 올라갔다.


“좋다. 그렇게까지 이 여자를 살리고 싶다면 기회를 주지.”

겨울의 머리를 겨누고 있던 총을 왼손으로 옮긴 석우가 오른쪽 코트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여분의 총을 꺼내 던졌다.

반사적으로 받아든 시후가 묵직하게 손바닥에 감기는 총을 내려다보았다.


“스스로 머리에 대고 쏴.”

시후의 호흡이 우뚝 멈추었다.


“네가 이 여자 대신 죽는 거야.”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든 시후의 얼굴 위로 균열이 일어났다.


“안 돼!!!”

퍼렇게 질려 사색이 된 겨울이 목이 찢어지라 소리쳤다.

그런 겨울의 머리를 총구로 누른 석우가 사납게 이를 씹었다.


“입 닥쳐요, 겨울 씨. 머리에 구멍 나고 싶은 게 아니면.”

오싹한 경고에 겨울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상황을 보니 내 복수도 여기가 마지막인 듯하고……. 최종 목표였던 강성호 회장을 죽이진 못했으니, 대신 그 인간에게 모든 걸 상실하는 기분을 알려줘야죠.”

나직하게 뇌까린 석우의 눈동자가 광기에 서린 채 시후를 주시했다.

그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시후가 애써 실소를 터뜨렸다.

짙은 숨을 뱉은 그가 가까스로 동요를 숨겼다.


“이성적인 판단이 안 되나 보지?”

총을 제대로 고쳐잡은 시후가 팔을 들어 올렸다.


“여기서 네 머리를 향해 조준하면 그만이야.”

태연하게 말을 뱉는 시후의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겨울의 목을 꽉 압박해 제 쪽으로 끌어당긴 석우가 픽 비소를 터뜨렸다.


“해봐, 할 수 있으면.”

“…….”

“쏠 수 있으면 쏴보라고.”

석우와 겨울은 겹쳐져 있었기에 조금만 빗겨나가도 겨울이 맞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운 좋게 이 여자를 맞추지 않고, 정확히 내 머리를 맞춘다고 해도…… 당신은 살인자가 되는 거야.”

석우는 이미 시후가 자신을 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속을 간파당한 시후의 평정이 흐트러졌다.

조금 전 충돌 사고로 인해 손바닥에 유리 조각이 박혀 손의 떨림이 잡히지 않았고, 그 때문에 겨울이 다치지 않도록 정확히 한석우의 머리만 조준할 자신이 없었다.

심지어는 비까지 억수로 쏟아져서 시야는 흐릿했고 총은 빗물로 미끌미끌했다.

확실치 않은 확률에 도박을 걸었다가 자칫 겨울을 다치게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여 대치 상황을 최대한 이어가서, 경찰이 이곳을 눈치채고 달려올 때까지 시간을 끌 생각이었다.


“당장 네 머리를 쏴.”

시후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겠다는 듯, 석우가 섬뜩하게 경고했다.


“1분 안에 쏘지 않으면 이 여자의 머리가 날아갈 줄 알아.”

초조해진 시후가 마른침을 삼켰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으로 복잡한 계산들이 뒤죽박죽으로 뒤엉켰다.

사고가 정지한 머리가 얼얼했다.

까만 눈동자가 소리 없이 진동했다.


“난 네 아버지와는 달라서 약속은 지키는 인간이다. 함겨울의 목숨은 반드시…….”

“제발 그만 해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겨울이 이성을 잃고 울부짖었다.


“그딴 말도 안 되는 협박이 통할 것 같아요? 대체 왜 이렇게까지……!”

격양되어 소리치던 겨울이 말끝을 흐리며 멈칫했다.

커다랗게 뜨여진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오빠.”

석우를 겨누던 총구가 방향을 틀어 시후의 머리를 향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척추로 서늘한 소름이 끼쳤다.

공포에 질린 겨울의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졌다.

스스로의 머리에 정확히 총구를 갖다 댄 시후를 보며 겨울이 이성을 잃었다.


“안 돼! 하지 마……! 제발……!”

아연실색한 겨울이 목에 시뻘겋게 핏대가 설 정도로 소리쳤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경련했다.

제 머리를 겨누고 있는 총기의 비정함도 잊고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발악했다.

시후는 울부짖는 겨울을 바라보며 입 모양으로 ‘미안해’라고 속삭이며 눈을 감았다.

떨리는 손가락이 방아쇠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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