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봄에 하는 사랑
(105/112)
105. 봄에 하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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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봄에 하는 사랑
2022.10.02.
방아쇠에 손가락이 닿자 겨울이 절박하게 소리쳤다.
“제발 그만해!!!”
성대가 찢어지라 고함을 내지르자 시후가 눈을 번쩍 떴다.
이성의 끈이 끊어진 겨울은 더는 총탄이 제 머리를 관통하는 것 따위 두렵지 않았다.
고개를 내린 겨울이 턱에 힘을 실어 필사적으로 석우의 팔뚝을 물어뜯었다.
“윽……!”
살점을 파고드는 고통에 석우가 움찔하며 휘청였다.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겨울은 온 힘을 다해 그를 뿌리치고 시후를 향해 내달렸다.
“이런, 씨…….”
석우가 곧바로 총구를 돌려 달려가는 겨울을 향해 조준했다.
광기에 찬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귀를 관통하는 듯한 총성이 폭우 속으로 울려 퍼졌다.
여린 몸이 바닥으로 엎어지며 빗물이 거칠게 튀었다.
“윽…….”
질끈 눈을 감았던 겨울이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째서인지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제 등을 감싸고 있는 단단한 가슴의 촉감만 느껴질 뿐.
“…….”
간담이 서늘해진 겨울이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등 뒤를 감싸고 있던 거대한 몸이 축 처지며 아스팔트 위로 추락했다.
“……오빠…….”
그 경로를 따라 겨울의 심장도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오빠……!!!”
찢어지듯 비명을 지른 겨울이 목을 놓아 시후를 불렀다.
열 오른 눈가로 촉촉한 물기가 고여 들었다.
총탄을 맞은 시후의 회색 코트는 점차 검붉은 피로 흥건하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오빠, 정신 차려……. 제발…….”
탁 풀린 동공이 공포에 질려 흔들렸다.
패닉 상태에 빠진 겨울은 어쩔 줄 모르고 한없이 눈물만 흘렸다.
피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해서 쏟아졌고, 빗물과 함께 뒤섞여 아스팔트 위로 끊임없이 번져나갔다.
그 처참한 광경에 이성을 잃은 겨울이 잇새를 악물었다.
분노에 찬 고개를 돌린 그녀가 충혈된 눈으로 석우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원한 게 이런 거였어……?”
겨울의 미간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화살처럼 박히는 원망에 총을 쥔 석우의 팔이 가늘게 떨렸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단순히 부모를 잘못 만났다는 이유로 죽이는 게……!”
감정이 격해진 겨울이 목을 놓아 울부짖었다.
“그게 당신 복수냐고!!!”
정작 이 모든 비극의 원흉은 지금쯤 안락한 침대에 누워 자고 있을 터였다.
복수를 위해 괴물이 된 남자의 악행은 그 악의 근원에게 닿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자가,
일평생을 고통받으며 살아왔던 가여운 남자가.
그 알량한 복수의 희생양이 되어 죽어가는 현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억울했다.
“제대로 봐! 지금 진짜 악마가 누군지!!!”
겨울이 오열을 토해내며 부르짖었다.
“당신은 이제 강성호와 똑같은 인간이야!!!”
가슴이 서늘해진 석우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악마?
내가 악마라고……?
그 쓰레기 같은 인간과 같은 부류라는 거야?
핏기가 말라 창백하게 질린 석우의 얼굴이 공허해졌다.
일순이 패닉이 몰려와 주춤하던 그가 바닥에 총을 떨어뜨렸다.
머뭇거리며 뒷걸음질 치던 그가 곧장 뒤를 돌아 뛰어갔다.
유리창이 전부 깨진 차에 올라탄 그가 무지막지한 속도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이내 석우의 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홀로 남은 겨울은 실성한 사람처럼 목을 놓아 통곡했다.
“오빠……. 제발 일어나…….”
차가운 빗물의 냉기가 심장까지 얼려버린 듯했다.
온몸을 휩쓰는 절망감에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세상이 전부 무너져내린다고 해도 이보다 괴로울 수는 없었다.
“제발……. 안 돼……. 안 돼, 오빠…….”
사랑하는 남자가 죽어가는 걸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시후의 핸드폰이 망가져서 신고할 수도 없었고, 팔이 묶여 있어 지혈을 시도할 수도, 하다못해 숨이 끊어져 가는 그의 손을 잡아 줄 수도 없었다.
자비 없이 가혹한 현실이 겨울을 미치게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바보처럼 눈물만 흘렸다.
심장이 으깨진 사람처럼 목을 놓아 절규했다.
“……겨……울아…….”
그때, 끊어질 듯한 음성이 겨울의 고막을 미약하게 두드렸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겨울이 떨구었던 고개를 들었다.
“울……지 마…….”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자그마한 목소리였으나 귓가에 똑똑히 들려왔다.
그는 서서히 죽어가는 와중에도 겨울을 안심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내었다.
“나…… 괜찮……으니까…….”
어쩌면 마지막으로 떠나는 길일지도 몰랐다.
사랑하는 여자의 얼굴을 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 시후가 몸을 돌려 아스팔트에 등을 대고 누웠다.
거친 숨을 토해내는 시후의 얼굴 위로 빗방울이 사정없이 떨어졌다.
그 비라도 막아주기 위해 겨울이 상체를 기울여 그의 얼굴 위를 가렸다.
“……흐윽……흑…….”
차가운 빗방울 대신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물이 그의 뺨을 흠뻑 적셨다.
가까워진 겨울의 얼굴을 바라보며 시후가 가늘게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쓸었다.
“……울……지마…….”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겨울의 모습이 이토록 아프게 우는 얼굴이라니.
복부의 총상보다도 가슴이 문드러지도록 아팠다.
“하아…….”
호흡이 거칠어졌다.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던 시후는 점차 의식이 흐려지는 걸 느꼈다.
온몸이 축 늘어지고 어디론가 떠나버릴 것만 같은 공포가 밀려왔다.
“겨울……아…….”
“응, 오빠……. 나 여기에 있어…….”
겨울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부름에 대답했다.
“……미안……해…….”
만약 내가 이대로 떠나게 되면,
나는 너의 상처로 남아 네 가슴 속에서 오래도록 너를 아프게 하겠지.
내 이름을 불러주던 너의 달콤한 목소리.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하게 치유되던 네 사랑스러운 미소…….
너의 모든 것들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차가운 곳으로 떠나게 되겠지.
너를 두고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아.
봄이 오면 함께 벚꽃을 보러 가자던 약속도 지키지 못했는데…….
영원히 네 곁에서 널 지켜주겠다고 맹세했는데.
시후의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흐르는 빗물에 씻겨나가 제 슬픔을 그녀가 느끼지 못했으면 했다.
“……미안해…….”
“그러지 마……. 어디 떠날 사람처럼 그렇게 말하지 마…….”
쏟아지는 빗물 때문인지, 아니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눈물 때문인지…….
눈가를 흠뻑 적신 액체로 인해 시후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겨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시후는 필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녀의 얼굴을 제 가슴에 담고 또 담기 위함이었다.
“사랑해…….”
겨울과 약속한 것이 너무 많았고, 아직 함께해보지 못한 일이 수없이 많았다.
그 모든 후회 중에서도…….
봄에 하는 사랑이 얼마나 달콤한지,
그걸 느끼지 못해 가장 아쉬웠다.
“사……랑해, 겨울아…….”
……다행이야, 널 지킬 수 있어서.
이번 생에서는 너의 미래를 지켜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나도, 사랑해. 오빠…….”
겨울이 울먹이며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가서 사람 불러올게.”
이대로 앉아서 눈물만 흘려봐야 시간만 흐를 뿐이었다.
눈물을 삼킨 겨울이 도움을 청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 뛰어가는 겨울의 뒷모습을 보며 시후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사실 나 살고 싶어, 겨울아.
내 죽음이 너에게 상처가 될까 너무 무서워.
네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게 겁이 나…….
하지만 내 생은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것 같아서.
“……하아.”
의식이 그무러지며 눈앞이 컴컴하게 어두워져 갔다.
이제 시야는 식별이 어려울 정도로 흐릿했다.
아스팔트 위로 쏟아지던 빗줄기가 어느덧 약해지더니 비가 완전히 그쳤다.
날씨가 개고 해는 새벽의 어둠을 몰아내며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의식이 끊어지려는 찰나, 저 멀리서 가쁘게 뛰어오는 구두 굽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뿌옇게 흐려진 각막으로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단발머리의 여자가 각인되었다.
‘……누구?’
환각인가 현실인가.
옆으로 다가와 곧장 무릎을 꿇고 앉는 여자의 모습이 마치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운 시야로 포착된 여자의 가느다란 목덜미 위의 작은 점이 망막을 두드렸다.
가깝게 상체를 내린 여자가 시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살릴 거니까.”
달콤한 음성이 환상처럼 고막에 감겼다.
“우리 미래에서 만나.”
시후가 떨리는 눈꺼풀을 감았다.
***
병원으로 이송된 시후는 곧장 생사를 오가는 응급수술을 받았다.
불 켜진 수술실 앞에 앉은 겨울은 피가 전부 마른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도 울어 실핏줄이 다 터진 눈으로 수술실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치료도 조사도 전부 나중으로 미루고, 그저 시후가 무사히 수술실 밖을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제발.”
내 곁에 무사히 돌아와 줘.
건강한 모습으로 깨어나 사랑한다고 속삭여줘.
지금껏 살면서 모든 걸 포기하고 살았지만…….
그거 하나 정도는 욕심내도 되는 거잖아.
당신이 없는 미래 따위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
1분 1초도 숨 쉬고 살아갈 수 없단 말이야…….
‘얼른 봄이 왔으면 좋겠다.’
겨울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얼마 전 시후가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던 달콤한 언어들이 귓가에서 어른거렸다.
‘너와 같이 벚꽃 보러 가고 싶어서.’
……이제 한 달만 있으면 거리에 벚꽃이 피어날 텐데.
‘봄에 하는 사랑은 좀 더 달콤하지 않을까.’
맞아, 미치도록 달콤할 거야.
온종일 사랑에 취해서 바보처럼 실실 웃을지도 몰라.
매일매일 행복에 겨워 미소가 마를새가 없을 거야.
그러니까…….
……부디, 제발.
우리가 함께 봄바람을 느낄 수 있다고 해줘, 오빠.
나를 두고 떠나지 마…….
겨울은 시후가 무사히 제 곁으로 돌아오도록 기도하며 떨리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수술을 마친 의사가 열린 문 사이로 걸어 나왔다.
수술실 앞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겨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의 수분이 전부 빠져나갈 것처럼 운 탓에 퉁퉁 부은 얼굴로 달려든 겨울이 간절하게 의사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수술 잘 됐나요? 무사한가요?”
“그게…….”
거친 숨을 내몰아쉰 의사가 마스크를 벗으며 말했다.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응급처치가 빠르게 이루어진 덕에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는 상황이고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쉰 겨울이 무너지듯 고개를 떨구었다.
또다시 눈물이 흐를 것 같았으나 가까스로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그런데 보호자분, 사고 당시 환자분 곁에 계셨다고 하셨죠?”
“네. 제가 옆에 있었는데요…….”
겨울의 말에 남자가 느리게 안경을 밀어 올렸다.
“그럼 혹시 의사이십니까?”
영문을 알 수 없는 물음이었다.
겨울의 미간에 실금이 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