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그늘
(107/112)
107.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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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그늘
2022.10.09.
“당장에라도 꽉 끌어안고 뒹굴고 싶어.”
상상력을 자극하는 야릇한 말에 겨울이 어쩔 줄 모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곳은 외설적인 상상이 펼쳐져서는 안 되는 엄숙한 병원이었다.
아무리 1인실이라고 하지만 그는 아직 병원복을 벗지 못한 환자였고, 병실 문 밖에는 수많은 사람이 바쁘게 오고 갔다.
이런 상황에 도대체 이 남편이라는 남자는 왜 이렇게 섹시한 건지…….
“키스할까?”
비스듬히 고개를 튼 시후가 낮게 웃었다.
벌어진 입술 틈으로 비치는 빨간 혀를 보며 겨울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정신 차려, 함겨울!
변태도 아니고 왜 환자를 상대로 흥분하고 그러는 거야!
“한 입만 먹을게.”
저, 저, 발칙한 혓바닥 같으니…….
섹시하게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에 겨울의 가슴이 벌렁거렸다.
이상야릇한 기분에 빠진 겨울의 얼굴이 완전히 홍당무가 되었다.
그의 페이스에 말리면 안 된다는 생각과는 달리 엄청난 속도로 뛰는 심장은 너무도 솔직했다.
“이리 와, 여보.”
뻗어진 커다란 손이 겨울의 잘록한 허리 위로 부드럽게 감겼다.
끌어당기는 손길에 가느다란 몸이 시후의 침대 위로 기울어졌다.
순식간에 끈적끈적해진 분위기와 함께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지려던 찰나였다.
“야, 대표야! 우리 왔다!”
돌연 병실 문이 벌컥 열리며 재환과 희수가 시끌벅적하게 쳐들어왔다.
흠칫 놀란 겨울과 시후는 입술을 부딪치기 1초 전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재환과 희수도 들어오던 자세 그대로 멈칫한 채로 두 눈을 꿈뻑거렸다.
소름 끼치도록 고요한 정적이 병실 안을 감돌았다.
이내 정신을 차린 재환이 하하,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와우. 이거 아무래도 병원이 아니라 모텔에 잘못 온 것 같은데.”
못 견디게 창피해진 겨울이 당황하여 우왕좌왕했다.
“옛말에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홍콩을 간다더니. 역시 우리 강 대표! 사나이야, 사나이!”
재환이 주책맞은 아저씨처럼 양쪽 엄지를 모두 들어 척 날렸다.
키스하려던 순간을 방해받아 불만스럽게 재환을 노려보던 시후가 아랑곳하지 않고 겨울의 입술에 쪽 뽀뽀했다.
흠칫한 겨울의 눈이 휘둥그레 뜨여졌다.
놀란 겨울이 두 눈을 깜빡거리고 있자 비스듬히 고개를 튼 시후가 겨울의 아랫입술을 물고 빨아들였다.
움찔한 겨울이 어쩔 줄 모르고 키스에 응하다가 이내 뚫어져라 구경하는 시선들에 황급히 떨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또 키스하러 다가오는 엉큼한 입술을 얼른 손바닥으로 막았다.
쭉 밀어 가까스로 제지하자 시후가 아쉬운 얼굴로 제 입술을 한번 핥았다.
“아, 음. 허니문 베이비, 아니, 호스피탈 베이비의 순간을 망쳐서 민망하지만……하하. 어쨌든 병문안 왔어요.”
장난스러운 희수의 말에 창피함이 최대치에 달한 겨울이 그녀를 흘겨보며 손부채질했다.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린 희수가 들고 있던 화려한 장미 꽃다발을 시후에게 건넸다.
“이건 일단 병문안 선물이긴 한데요. 마음에 안 드시죠?”
시후가 받아들기도 전에 먼저 선수 친 희수가 못마땅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글쎄, 신재환 이 멍청이가 병문안 선물로 이걸 사 왔더라고요. 진짜 죄송해요, 시후 씨.”
“아니, 희수 네가 꽃집에 들러서 뭐라도 사 오라고 했잖아?”
“내가 장미 꽃다발 사 오라고 했어? 심지어 남자 병문안 선물로?”
이미 병실에 올라오기 전부터 티격태격 한바탕했던 재환과 희수는 2차전에 들어갔다.
“꽃 말고 화분 같은 걸 사 와야지!”
“희수 네가 화분 사라고 안 했잖아? 그냥 꽃집이라고만 말했지!”
“하, 백번 양보해서 그랬다 쳐. 아니, 얼마나 생각이 없으면 병문안 오는데 파란 장미를 사 와?!”
“네가 대충 예쁜 걸로 사 오라고 해서 꽃집에서 주는 대로 산 거란 말이야.”
“야, 개발자야. 잘 들어. 파란 장미 꽃말이 뭔 줄 알아?”
“……너 저번부터 자꾸 은근히 개발자라고 ,욕 아닌데 욕 같은 욕을 한다?”
“됐고. 파란 장미의 꽃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 어? 죽다 살아난 부부한테 준다는 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참나, 차라리 백합을 사 오지, 그래?!”
“그건 죽으라는 거잖아! 강 대표 죽으면 내 월급은 누가 줘? 우리 아기는 누가 먹여 살려?”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예비부부를 멀뚱멀뚱 바라보던 겨울과 시후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겨울이 희수에게서 파란 장미 꽃다발을 받아들며 어깨를 으쓱했다.
“맞아요. 과거에는 희수 말대로 파란 장미 꽃말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불가능이었대요.”
오래전 시후가 제게 줬던 파란 장미 꽃다발을 떠올리며 겨울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지금은 꽃말이 바뀌었거든요.”
그가 제게 선물했던 그 꽃다발의 꽃말처럼…….
“기적, 포기할 수 없는 사랑.”
우리의 사랑은 불가능을 넘어 기적을 일으켰다.
“맞지, 오빠?”
겨울이 시후를 보며 코끝을 찡긋했다.
그 물음에 회답하듯 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또다시 사우나 한복판처럼 후끈하니 후덥지근해진 병실의 분위기에 티격태격하던 희수와 재환도 말다툼을 멈추고 해괴한 눈으로 묘하게 끈적끈적한 신혼부부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겨울과 시후는 이미 둘만의 세상으로 떠난 지 오래였다.
***
약 한 달이 지나고 시후는 건강한 모습을 되찾아 퇴원 절차를 밟았다.
기나긴 역경을 딛고 두 사람은 다시금 평화를 되찾았다.
하지만 아직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이 모든 비극을 일으킨 원흉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배불리 먹고, 편안한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거 요즘은 짜증 나는 일뿐이구나…….”
회장실 소파에 앉아 마사지기를 어깨 위에 올린 강성호 회장이 쯧 혀를 찼다.
“그 남동공장인지 뭔지 하는 공장장 자식새끼 때문에 대체 이게 뭔 봉변이냐.”
석우가 경찰 조사에서 강 회장의 모든 악행을 전부 불어버렸고, 그걸 덮느라 오래도록 고생한 강 회장은 근 한 달간 10년은 더 세월을 먹은 기분이었다.
“그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
제 아내와 둘째 아들을 죽이려던 것도 모자라, 밉든 좋든 핏줄인 강시후마저도 총으로 쏴 죽이려 했다니, 아주 발칙한 놈이 따로 없었다.
“어쨌든 이젠 다 정리했으니 한숨 돌렸구나.”
“고생 많으셨습니다, 회장님.”
“그 겁대가리 없는 하룻강아지 새끼가 이 강성호를 얕봐도 너무 얕본 것이지. 안 그러냐, 김 실장?”
“예, 회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내림세를 타던 주가도 정상화되었고, 겁 없이 옛날 일을 파고들려는 뭣 모르는 애송이 기자들의 입막음도 단단히 해놓았다.
검찰에도 미리 손을 써두었고, 쓸데없는 이야기가 나돌지 않게 언론도 완벽하게 통제했다.
“아무렴 내가 KU그룹의 그 강성호인데, 별 거지 같은 피라미들 똥물 튀는 걸 보고만 있을까.”
픽 비웃음을 흘린 강 회장이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를 즐겼다.
그러나 몇 분 지나지도 않아, 돌연 회장실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회장님……!”
회장실 안으로 다급하게 뛰어 들어온 건 비서실의 한 직원이었다.
“이 여기가 어디라고 노크도 없이 들어와?”
“죄, 죄송합니다. 그런데 지금 큰일 났습니다, 회장님……!”
“큰일은 무슨 큰일이 나, 느닷없이!”
불같이 화를 내는 강 회장의 앞에 고개를 조아린 직원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 그룹 주가 동향이 이상합니다……! 갑자기 10% 이상 급락했습니다……!”
“……뭐, 뭐야?!”
상상도 못 한 소식에 강 회장의 눈이 휘둥그레 뜨여졌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 앞으로 달려간 그가 다급하게 주가 그래프를 확인했다.
“이, 이게 뭐야…….”
노쇠한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순항하던 그래프는 갑자기 절벽처럼 고꾸라지며 돌연 바닥을 치고 있었다.
“갑자기 이게 왜 이래!!! 김 실장, 빨리 원인 파악해!!!”
당황한 강 회장이 말까지 더듬으며 책상을 쾅 내리쳤다.
“당장 긴급회의 소집하고 대책을 세워야…… 아.”
급작스럽게 광분한 탓에 혈압이 오른 강 회장이 목덜미를 콱 움켜쥐었다.
밀려오는 어지럼증에 휘청이며 도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때는 호랑이 같았던 강성호 회장도 이제는 늙고 쇠약해져 어느덧 볼품없이 이빨 빠진 금수에 불과했다.
“회장님, 이럴 때 송구스럽지만…… 지금 손님도 오셔서요.”
“이 난리 통에 무슨 손님이고 나발이야! 꺼지라 해!”
황당하게 소리치며 꺼지라는 듯 손짓했으나 직원이 우물쭈물하며 머뭇거렸다.
“그게 사실, 강시후 대표님이셔서…….”
“뭐야?”
강 회장의 눈썹이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그 자식이 갑자기 여기는 왜 와?”
용건이 있는 게 아닌 이상 먼저 자신을 찾아오는 법이 없는 아들이었다.
이렇게 회장실까지 찾아온 걸 보면 분명히 또 어쭙잖은 협상을 하러 온 게 틀림없었다.
“들어오라고 해! 보나 마나 그 자식 짓거리 같으니까!”
“네, 네! 알겠습니다.”
“김 실장, 너는 나가서 주가 급락 원인이나 파악하고!”
“예, 회장님!”
직원과 김 실장이 헐레벌떡 회장실을 뛰쳐나갔다.
한바탕 난리 끝에 드넓은 회장실에 홀로 남은 강 회장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었다.
이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시후의 모습이 강 회장의 시야에 들어왔다.
“너, 이 자식 잘 왔다! 네놈이 또 뭔 수를 썼는지…….”
큰 소리로 불같이 화를 내던 강 회장이 흠칫 놀라 뒷말을 흐렸다.
시후를 따라 회장실 안으로 들어오는 얼굴을 알아본 강 회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이내 회장실이 진동하도록 목청을 드높여 쩌렁쩌렁하게 소리 질렀다.
“너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저 싸구려 물건을 안에 들여!!!”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는 바닥을 밟으며 느긋하게 시후를 따라 들어온 겨울이 강 회장을 향해 가볍게 고개 숙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회장님.”
“뻔뻔스러운 계집이……. 당장 나가! 끌려나가기 싫으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강 회장이 씩씩거리며 이를 아드득 갈았다.
사납게 삿대질하자 시후가 겨울을 제 뒤로 감추고 보호하며 싸늘하게 얼굴을 굳혔다.
“이 자리에서 끌려나갈 사람은 제 아내가 아니라, 회장님이실 겁니다.”
“뭐야……?”
미간을 찡그린 강 회장이 겨울과 시후를 번갈아 쏘아보았다.
그 눈빛에 주눅 들지 않고 무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깐 겨울이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길쭉한 손가락이 꾹 재생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회장실을 한가득 울렸다.
-처음부터 전부 강성호 네 계획이었지. 남원화학 유 사장을 꾀어서 원료를 빼돌린 것도, 기자들 포섭해서 우리 화장품에 중금속류가 발견됐다는 가짜 뉴스를 퍼뜨린 것도…….
녹음된 음성의 주인을 눈치챈 강 회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노이즈가 섞여 있었지만 틀림없는 함병식 회장의 목소리였다.
-자금줄 막으려고 김 행장 포섭한 것도 전부! 강성호 네가 한 짓이잖아! 우리 회사를 먹으려고……!
늘 위압적이던 강성호 회장의 낯빛이 시체처럼 퍼렇게 질렸다.
……이게 뭐지? 녹음?
대체 언제 이딴 내용이 녹음된 거야…….
당황한 그의 이마로 식은땀이 흘렀다.
-거슬리잖아. 별 같잖은 게 우리 회사와 경쟁사로 손꼽히는 게.
녹음에는 강성호 회장의 스스로의 목소리도 담겨 있었다.
제 목소리를 알아본 강 회장의 눈동자가 거칠게 경련했다.
공황에 빠진 듯 주춤거리던 노쇠한 육체에 이내 울긋불긋 핏대가 섰다.
-마지막으로 가장으로서 긍지를 지킬 기회를 주지.
……대체 언제.
나도 모르게 이런 녹음을……!
-네 와이프와 딸내미 몸판 돈으로 밥 벌어먹고 싶은 건 아니겠지?
뚝.
재생되던 녹음을 끊은 겨울의 단호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기자한테 보낼까 하다가, 또 그 좋아하시는 언론 통제하실 것 같아서 다른 방법을 써봤어요.”
강 회장을 꿰뚫을 듯이 응시하며 겨울이 덤덤하게 뒷말을 이었다.
“지금쯤 모든 SNS 채널에 전부 퍼졌을 겁니다.”
강 회장의 심장이 아래로 추락했다.
이미 녹음은 뉴스나 기사 등 언론이 아닌, 인터넷상의 평범한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개인 SNS를 타고 널리 널리 퍼진 뒤였다.
그중에는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는 SNS도 있었기에, 이미 녹음본은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제 심판을 받을 시간입니다.”
어느덧 시대는 변화했고, 그늘에 완전히 가려질 악행이란 없었다.
타인의 피와 땀, 눈물을 양분 삼아 몸집을 키웠던 늙은 호랑이는 결국 도마 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