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무너진 모래성
(108/112)
108. 무너진 모래성
(108/112)
108. 무너진 모래성
2022.10.12.
“지금쯤 모든 SNS 채널에 전부 퍼졌을 겁니다.”
강 회장의 심장이 아래로 추락했다.
이미 녹음은 뉴스나 기사 등 언론이 아닌, 인터넷상의 평범한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개인 SNS를 타고 널리 널리 퍼진 뒤였다.
그중에는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는 SNS도 있었기에, 이미 녹음본은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제 심판을 받을 시간입니다.”
어느덧 시대는 변화했고, 그늘에 완전히 가려질 악행이란 없었다.
타인의 피와 땀, 눈물을 양분 삼아 몸집을 키웠던 늙은 호랑이는 결국 도마 위에 올랐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 강 회장의 눈동자가 거칠게 경련했다.
두 눈에 힘을 준 강 회장이 겨울을 매섭게 노려보았으나 그녀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미 검찰에 모든 자료를 증거물로 넘겼고, 음성 대조도 마쳤습니다.”
“뭐야……?!”
“형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으면, 전부 포기하고 모든 죄를 시인하세요.”
“……이 겁대가리 없는 계집이!”
이성을 잃은 강 회장이 폭발하듯 소리치며 책상 위의 재떨이를 집어 겨울에게로 던졌다.
그러나 곧바로 겨울을 끌어당겨 보호하는 시후의 손길에 크리스털로 이루어진 재떨이는 하릴없이 벽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네가 이런 짓을 벌이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잡힌 목덜미로 핏대가 불뚝 치솟으며 노쇠한 음성이 천둥처럼 회장실을 울렸다.
그 위압적인 기세에도 전혀 눌리지 않은 겨울이 싸늘하게 얼굴을 굳히고 강 회장을 경멸하듯 흘겨보았다.
“제 안위를 살피시기 전에, 감옥에서 끝날 강성호 씨의 여생부터 걱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뭐…… 뭐야?! 강성호 씨?”
“네, 강성호 씨.”
겨울이 조소를 터뜨렸다.
“주가를 하루 만에 하한가까지 떨어뜨린 주범을 주주들이 계속 KU의 회장으로 떠안고 갈 거로 생각하십니까?”
세월을 머금어 아래로 처진 안면 근육이 분노를 머금고 부들부들 떨렸다.
자제를 잃은 그가 곧바로 겨울에게 달려들어 주름진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윽……!”
귀싸대기라도 때릴 것처럼 기세 좋게 올라갔던 손은 겨울의 손끝 하나에도 스치지 못한 채 허공에서 형편없이 경련했다.
시후가 강 회장의 손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제압한 탓이었다.
억센 악력이 가해지자 쇠약한 손목에서는 뼈가 바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안 놔!!! 이 패륜아 새끼가!”
“벌레보다 못한 인간을 아버지로 둘 바에야, 차라리 패륜아로 남겠습니다.”
“이 싸가지 없는 자식이……!”
미친 사람처럼 날뛰던 강 회장이 손목으로 느껴지는 고통에 발버둥 치며 악을 썼다.
뼈가 부러지는 듯한 착각에 안면을 일그러뜨린 강 회장이 분노와 고통이 점철된 비명을 내질렀다.
그 소음을 배경음으로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리깐 시후가 불협화음뿐이었던 악보의 피날레를 연주했다.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이 모두 당신 손에 불행해지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시후의 어머니, 겨울의 아버지, 한석우의 부모를 비롯하여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가 이제껏 쌓아 올린 피의 탑의 일부로써 잔혹하게 희생되었다.
강성호란 인간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의 평화를 해치는 불순물이었고, 또 다른 악을 탄생시키는 근원이자 숙주였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무릎을 꿇었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뼈를 분쇄할 듯한 악력과는 달리 느긋한 음성이 강 회장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열아홉 살 때였습니다.”
“놔, 이거 당장…… 윽……!”
13년 전, 시후는 강 회장에게 겨울을 건들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며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었다.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어린 소년이었기에, 아버지라는 벽은 너무도 크고 거대했으며 두려움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지난 13년이란 세월 동안, 당신은 이렇게 늙고 병들어서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었는데…….”
시후가 차갑게 조소했다.
“나는 어떨 것 같습니까?”
더욱 거세게 손목을 압박하자 강 회장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어본 적 없는 강성호 회장의 무릎이 쿵 소리와 함께 회장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디 한번, 빌어보시겠습니까?”
시후는 제 구두 앞에서 무너진 늙은 짐승을 섬뜩하게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위협적인 시선에 강 회장의 가슴으로 오싹한 바람이 불었다.
꿰뚫을 듯한 검은 동공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온몸의 피가 전부 빠져나가는 듯한 착각에 휩싸인 강 회장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입안이 바싹 마르고 경련하던 손발은 서서히 마비되어갔다.
“수많은 사람의 피와 땀, 눈물로 쌓아 올린 그 모래성.”
강 회장의 숨이 덜컥 멈추었다.
“전부 무너질 시간입니다.”
느껴지는 위압감에 움찔 몸을 떤 강 회장이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잇새를 악물었다.
항상 자신의 손바닥 안이라고 생각했던 이들로부터의 패배를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표독스럽게 얼굴을 굳힌 강 회장이 바드득 이를 갈며 말없이 시후를 노려보았다.
그때, 황급히 회장실 문을 열고 뛰어 들어온 김정수 실장이 다급하게 시후를 말렸다.
“대표님, 그만하십시오! 자꾸 이러시면 보안팀을 호출할 수밖에……!”
“김정수 실장님.”
음절을 씹은 시후가 고개 돌려 그와 눈을 마주했다.
흠칫한 김 실장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강성호 회장으로부터 서산에서 치매를 앓고 있는 노모의 안위로 협박을 당하고 계시던데요.”
“……그, 그걸 어떻게…….”
“이미 사람을 시켜서 어머님을 모시고 나와 서울 근교의 의료원에서 보호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시후의 말에 김 실장의 동공이 거칠게 뒤흔들렸다.
꼴깍 마른침을 삼킨 그가 잠시 혼란 섞인 눈으로 시후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짓씹었다.
“판단 끝났으면 손 떼고 떨어지세요.”
“…….”
우물쭈물하던 김 실장은 시후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 모습에 사색이 된 강 회장이 노발대발하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야, 김 실장!!! 지금 뭐 하는 거야!!!”
“…….”
“나 강성호야! KU그룹의 회장 강성호!!! 다들 미쳤어, 지금?!”
몰락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강 회장이 발악하며 사방에 소리쳤다.
그러나 김정수 실장은 물론, 그의 고함을 듣고 있는 비서실의 직원 중 그 누구도 나서지 않고 강 회장의 시선을 피하며 외면할 뿐이었다.
궁지에 몰린 강 회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요동쳤다.
돈, 명예, 권력, 평생을 누리며 살아왔던 것들이 지금 이 공간에서는 그 어느 것 하나 작용하지 않았다.
망망대해에 홀로 버려진 것처럼 떨던 강 회장이 입술을 억세게 깨물었다.
빠져나갈 방법을 강구하는 눈동자가 바쁘게 굴렀다.
그러나 이미 새하얗게 물든 머리는 아무런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최후를 맞이했다.
“강성호 씨.”
순식간에 회장실 안으로 들이닥친 여럿의 남자가 강 회장을 둘러싸고 포위했다.
“당신을 위력에 의한 살인죄 및 비자금 조성 혐의를 비롯하여 총 열두 개의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그 말에 퍼렇게 질린 얼굴이 자글자글하게 일그러졌다.
……체포?
영장이 발부됐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강 회장이 고개를 내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누구 맘대로 체포를 해……! 다들 옷 벗고 싶어서 환장했어? 내가 누군지 알고 이딴 짓을 벌이는 거야!!!”
늙은 짐승의 포효처럼 발악했으나 곧바로 그를 에워싼 장정들은 강 회장에게 쇠고랑을 채웠다.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두툼한 팔을 한쪽씩 붙잡은 남자들이 강 회장을 강제로 회장실 밖으로 끌어냈다.
늙은 짐승의 가죽이 모조리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
KU그룹 본사를 비롯하여 강성호 회장의 자택은 전부 압수 수색에 들어갔다.
시후는 강 회장의 모든 치부가 정리된 밀실의 존재를 알렸고, 그 안의 자료는 빠짐없이 검찰로 넘어갔다.
증거를 인멸할 틈도 없었기에 강성호가 기업을 키우기 위해 여태껏 자행해왔던 추악한 행태들은 만천하에 드러났다.
제이지코스메틱에 대한 불법적인 합병 방식과 함병식 회장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강요한 일뿐만 아니라, 시후의 어머니의 회사인 일성디스플레이도 같은 방식으로 인수한 것마저 밝혀지며 혐의는 계속해서 부피를 키웠다.
뉴스에서는 연일 강성호 회장의 반인륜적인 행각에 대한 고발이 계속되었고, 주주총회에서는 그의 회장직 박탈이 결정되었다.
오랫동안 왕좌에 군림하던 악의 몰락이었다.
“강창영에 의해 청부살인 당할뻔했던 날 살려줬다고 들었어요.”
한편, 겨울은 한석우가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로 향해 면회를 요청했다.
추악한 살인자 따위 보러 가지 말라는 시후를 가까스로 설득해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왜 그랬던 거죠?”
“…….”
“나는 당신 복수 도구 중 하나에 불과했고, 내가 죽든 말든 당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을 텐데 말이에요.”
석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으로 겨울을 가만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잠시 찰나의 정적이 흐르고 겨울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치켜든 그녀가 흔들림 없이 단단한 음성을 내었다.
“일부러 내가 일했던 클레르 옆에 카페를 차리고 들어올 때부터, 당신은 언제든지 날 죽일 기회가 있었어요.”
“…….”
“하지만 그러지 않았죠.”
겨울을 가만히 응시하는 석우의 눈동자가 흐트러졌다.
“당신은 사실 알고 있었던 거야. 나한테 죄가 없다는 것도, 이런 식의 복수 방식은 옳지 않다는 것도 전부.”
석우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동요 없이 무덤덤한 표정과 다르게 그의 갈색 동공은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강성호 회장은 이제껏 지은 죄에 대한 죗값을 받을 거예요. 이미 검찰이 모든 증거를 확보했고, 나이도 많으니 이제 교도소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되겠죠.”
“…….”
“복수는 이렇게 하는 겁니다.”
뱉어진 말에는 단호한 뜻이 담겨 있었다.
“정당한 방식으로,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
“물리적으로 직접 보복을 해봐야 같은 인간이 될 뿐이니까요.”
복수에 눈이 멀었던 석우는 이미 죄 없는 겨울과 시후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고, 타인의 손을 빌려 상해를 입혔다.
심지어는 어떠한 이유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르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이제…… 당신도 지은 죄에 대한 죗값을 받으세요.”
겨울은 석우를 동정하지 않기로 했다.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스스로 악을 자처한 사람에게는 그 어떠한 관용도 베풀어서는 안 됐다.
“…….”
석우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겨울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대답을 듣고자 했던 말이 아니었기에 겨울은 개의치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를 돌아 걸어가려는 순간, 등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전, 강시후 씨가 내게 말하더라고요.”
그 사고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석우가 겨울에게 입을 연 순간이었다.
“사람이라면 자신의 죄를 무덤까지 잊어서는 안 된다고.”
겨울의 뒷모습을 덤덤하게 바라보던 석우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 잊고 편하게 지내요. 내가 지은 죄는 내가 전부 기억할 테니까.”
긴 세월의 비극 끝에 피해자였던 그는 어느덧 가해자가 되어버렸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남김없이 기억하는 것,
그것이 석우가 피해자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사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