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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꽃비 (110/112)


110. 꽃비
2022.10.19.


벚꽃이 화려하게 만발한 4월의 어느 따스한 봄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선 겨울과 시후는 특별한 사람을 만나러 함께 먼 길을 찾아왔다.


“……나 왔어, 아빠.”

서울에서 조금 떨어진 용인에 위치한 한 봉안당에는 겨울의 아버지, 함병식 회장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왔네.”

겨울이 서글프게 웃으며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작은 액자를 응시했다.

막 17살이 되었던 때, 모든 것이 평화롭고 가정 내 웃음과 행복만이 가득하던 시절에 찍었던 가족사진이 다소곳하게 들어 있었다.


“그동안 보러 자주 못 왔었는데…… 섭섭했지?”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그를 보러 봉안당에 방문한 횟수가 다섯 번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집안의 가장이 된 겨울은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거액의 빚을 갚아야 했었고, 그 척박한 삶을 살아가면서 은연중에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죄악처럼 느껴져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 없었지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서러운 감정은 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리움과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가 가장으로서 마지막까지 스스로를 희생하여 가족을 지키려고 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아빠.”

겨울은 가슴이 먹먹하게 조여왔다.

아버지가 남긴 두 개의 보이스펜 중 이경이 갖고 있었던 볼펜에는 강성호를 무너뜨릴 결정적인 증거가 담겨 있었던 반면, 겨울이 갖고 있었던 나머지 하나의 펜에는 전혀 다른 음성이 녹음되어 있었다.

다름 아닌, 아버지가 떠나기 전 가족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


‘우리 여보, 그리고 예쁜 딸 겨울이. 귀여운 막내 이경이. 사랑하는 우리 가족…….’

지그시 눈을 감은 겨울이 보이스펜에 녹음된 아버지의 음성을 처음 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아빠가 사랑하는 우리 가족을 두고 먼저 떠나게 되어 미안해.’

그렇게 입을 연 그는 약 5분 정도 되는 시간 동안 덤덤하게 하지 못한 말들을 천천히 풀어나갔었다.


‘비록 곁에는 없겠지만, 그래도 아빠가 언제 어디서나 우리 가족들을 지켜주고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해.’

눈물을 삼키는 것처럼 떨리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어른거렸다.


‘여보. 겨울아, 이경아. 그동안 못난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웠어. 덕분에 행복했고…….’

……사랑해.

녹음은 그 나직한 속삭임과 함께 끝이 났었다.

처음 이 녹음을 들었을 때, 겨울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에 시후의 품에 안겨 목이 쉬도록 울음을 쏟아냈었다.

미안함과 자책, 그리움, 여러 가지 감정들이 한꺼번에 복합적으로 밀려들었지만, 끝에는 마지막까지 가족을 위해 애를 썼던 그에게 고마운 마음만이 남았다.


“……아빠.”

겨울이 아버지의 유골함이 담긴 캐비닛의 유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목숨을 다해 우리 가족을 지켜주고…… 또 많이 사랑해줘서 고마웠어.”

눈을 감는 순간까지 오롯하게 가족에 관한 생각뿐이었던 사람이었다.


“이제 다 끝났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잠들어도 돼.”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느낀 겨울이 애써 울음을 삼키며 웃었다.

그런 겨울의 마음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에, 시후는 그저 말없이 손을 뻗어 겨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가녀린 몸을 다정하게 품으로 끌어안은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먹먹해지는 가슴을 숨기고 담담하게 입술을 열었다.


“……아버님, 13년 만에 인사드립니다.”

모든 일을 해결하고 자유의 몸이 되어, 그에게 용서를 구하기까지 너무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


“백 마디의 사죄보다…… 단 하나의 약속을 하고자 합니다.”

시후가 진중하게 시선을 낮추며 고개를 숙였다.


“겨울이의 행복과 웃음을, 책임지고 평생 지켜주도록 하겠습니다.”

나직하게 봉안당 안을 울리는 목소리에는 조금의 과장도 보탬도 없었다.

꾸밈없이 그저 담담하게 전하는 진솔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겨울이를 낳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 투명한 진정성이 겨울의 가슴으로 물씬 전해져와 커다란 눈이 뿌옇게 물들었다.

겨울이 눈가에 잔잔하게 고인 물기를 느끼며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부디 편히 쉬십시오, 아버님.”

가늘게 떨리는 겨울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밀어 넣은 시후가 그대로 옭아매어 단단히 붙잡았다.

그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다시는 겨울의 손을 놓지 않겠다는 영원의 맹세였다.


 
봉안당을 나와 차로 돌아온 뒤로도 겨울은 제 가슴에 있는 물기를 빠르게 떨쳐내지 못했다.

정말 모든 게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다는 게 실감이 나며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이렇게 여유롭고 행복한 시간만이 끝없이 펼쳐지기를 바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버님을 뵈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겨울의 눈꺼풀이 도로 올라갔다.


“어떤 생각?”

“내가 더 멋있고 든든한 남편이 돼서, 겨울이 네가 모든 걸 풀어헤치고 쉴 수 있는 보금자리가 되어주어야겠다고.”

부드럽게 미소 지은 시후가 겨울을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너에게 의지하는 만큼, 나도 네가 편히 기댈 수 있는 남자가 되어야겠다고.”

“오빠가 나한테 의지를 해?”

의외의 말에 겨울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맨날 나만 오빠한테 의지하는 것 같은데.”

“그럴 리가. 네가 곁에서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나한테는 큰 힘인데.”

“……그 말 듣기 좋다.”

제 존재 자체가 그에게 축복이라는 뜻이었다. 어떻게 보면 태어난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뜻이었기에 이보다 더한 찬사는 없었다.


“그럼 좀 더 말해줘. 솔직하게.”

“음, 솔직하게라…….”

핸들을 부드럽게 움켜쥔 시후의 눈빛이 뜨겁게 타올랐다.


“난 항상 너를 안고 싶어.”

달콤한 저음이 차 안을 고요하게 울렸다.


“너에게 기대고 싶고……. 네 따뜻한 체온이 늘 나에게 전해져 오면 좋겠어.”

시후는 겨울과 눈을 맞추며 그 어느 때보다도 솔직하게 제 진심을 말했다.


“그리고 그런 내가 너에게 힘이 되기를 바라.”

네가 나에게 구원이었던 것처럼,

나도 너에게 하나뿐인 구원이기를…….

파도처럼 몰아치는 진심에 잠긴 겨울의 눈동자가 잔물결을 따라 일렁였다.

이내 고개 돌린 겨울이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느끼며 배시시 수줍게 웃었다.

깊은 곳에서부터 나비가 살랑살랑 날갯짓하는 것처럼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함께 점심을 먹고 겨울과 시후는 벚꽃 명소로 유명한 수원의 한 호수공원으로 향했다.

춥고 매서운 겨울의 혹독함이 지나간 뒤에는 살랑이는 봄바람과 꽃향기만이 세상을 달콤하게 물들였다.

풍성한 분홍빛 꽃송이들에 둘러싸인 겨울과 시후는 두 손을 꼭 붙잡고 몽환적인 벚꽃길을 산책했다.


“와, 벚꽃 너무 예쁘다. 꼭 천사가 한 땀 한 땀 그려놓은 것 같아.”

상쾌한 기분에 젖은 겨울이 자그마하게 웃으며 시후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마음 편히 오빠랑 함께하는 시간을 즐길 수 있다는 게, 나는 너무 좋아.”

시후가 낮게 웃었다.


“나도 그래.”

그동안 너무도 많은 역경과 어려움이 있었다.

함께해서는 안 되는 수백 수천 개의 이유가 있었고, 겨울과 시후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불가능을 외치고 있었다.

고작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만으로는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널 마음껏 사랑할 수 있게 되어서 행복해.”

하지만, 하나의 사랑이 비로소 모든 역경과 파도를 물리치는 순간이 비로소 찾아왔다.

두근두근 전율하는 가슴을 느끼며 웃은 겨울이 마저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겨울아.”

봄 햇살처럼 따스하게 쏟아지는 목소리가 겨울의 고막을 녹녹하게 녹였다.

고개를 들어 올린 겨울이 시후와 마주했다.

돌연 뜨겁게 내려다보는 시선에 겨울의 심장이 뻐근하도록 뛰기 시작했다.

조금 선홍빛으로 물든 겨울의 뺨을 부드럽게 보듬은 시후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결혼한 지 벌써 1년이 넘었는데…… 내가 너한테 한 번도 프러포즈를 제대로 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만발한 벚꽃잎이 살랑이며 두 남녀의 가슴으로 내려오고, 시선이 뜨겁게 얽혔다.

고개를 기울인 시후가 코트 안주머니에서 작은 반지 상자를 꺼내 들었다.

고요하게 열린 상자의 틈으로 보이는 것은 다이아몬드가 촘촘하게 세공된 화려한 반지였다.


“늦었지만…….”

시후가 나직하게 웃었다.


“나와 결혼해줄래?”

감미로운 고백에 젖은 겨울의 가슴이 거칠게 물결쳤다.

기존의 결혼반지는 안 좋은 기억과 감정들이 너무도 많이 서려 있었고, 그 때문에 약 반년간은 끼지 않았다.

그런 겨울의 마음을 헤아린 시후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반지를 직접 준비한 것이었다.


“별도 달도 다 따주겠다는 말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평생 너 하나만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약속할게.”

겨울의 눈동자가 고요하게 흔들렸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아니 갈라놓더라도 널 사랑할 거야.”

이보다 맑고 사랑스러운 프러포즈는 없었다.

화사한 봄날의 흩날리는 벚꽃 아래에서 그는 진정으로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다.

울컥 가슴이 촉촉하게 젖은 겨울의 눈가로 투명한 이슬이 모여들었다.


“고마워, 오빠.”

그와 함께하니 하루하루가 감동의 연속이었다.


“이번 생에도, 다음 생에도, 그다음 생에도…… 영원히 오빠만의 신부가 될게.”

눈물을 글썽이던 겨울이 해맑게 웃으며 시후를 올곧게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오래오래 잘 부탁해, 여보?”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뿐인 첫사랑.

그리고 이제는 유일무이한 마지막 사랑이 되었다.

햇살처럼 화사하게 웃음 짓는 겨울을 바라보던 시후가 곧장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았다.


“꺅!”

커다란 손이 잘록한 허리를 잡고 단번에 번쩍 들어 올리자 겨울의 다리는 순식간에 공중으로 떴다.

놀란 뱉어진 겨울의 신음은 곧바로 시후의 입술 틈으로 먹혀들어 갔다.

겨울을 가볍게 안아 올린 시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열정적으로 키스를 퍼부었다.

기분 좋게 불어오는 봄바람을 배경으로 달콤하고 짜릿한 감각이 어지러이 이어졌다.

격정적인 사랑을 토해내듯 뜨거운 열감이 비벼지고, 겨울의 구석구석을 탐하고 떨어진 입술이 길게 늘어졌다.


“사랑해, 겨울아.”

수백 번을 말하고 또 말해도 감정을 오롯하게 담기에는 부족한 말이었다.


“내가 더 많이 사랑해…….”

그렇기에 들려주고 또 들려주고, 언젠가 함께 세상을 떠날 그날까지 서로에게 속삭여주기로 했다.

지독하리만큼 달콤한 사랑에 취한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무더웠다.

또다시 돌풍처럼 부딪친 입술은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고 서로를 음미했다.

마치 13년 전, 설레고 풋풋했던 첫 키스처럼…….

이 세상에 오로지 둘만 남은 것처럼, 아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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