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사계절
(111/112)
111.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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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사계절
2022.10.23.
사계절이 창문을 두드렸다가 떠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또다시 찾아온 봄을 지나 무더운 여름의 끝자락에 도달했다.
여러 해가 바뀐 만큼 겨울과 시후 부부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시후는 넥스트 게임즈의 대표이사직을 사임하고 경영의 일체를 재환에게 맡긴 뒤, 국내에서의 모든 일을 정리하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발걸음으로 시간여행장치에 관한 비밀 연구 조직 ‘TMRO’에 들어가 극비 프로젝트에 몸을 담게 된 것이었다.
“요즘 공부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야? 아직 시험 기간도 아닌데.”
시후가 태블릿 PC 화면 너머에서 작게 하품하는 겨울을 귀엽게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들어간 대학인데 열심히 해야지. 늦은 만큼 남들보다 배는 더 노력할 거야.”
겨울이 하나로 높게 묶은 머리를 풀며 픽 웃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서울에 있는 한 의대에 진학한 겨울은 자신보다 열 살은 어린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며 30대의 청춘을 보내고 있었다.
비록 장거리 부부가 된 두 사람은 무려 16시간의 시차가 나는 곳에서 떨어져 지냈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영상통화를 하며 서로의 시간을 공유했다.
각자의 꿈을 위해 떨어져 있는 이 시간이 아쉽기도 했지만, 되려 물리적 거리를 딛고 사랑은 더욱 애틋하게 깊어져 갔다.
“오빠는 아침 먹었어?”
“응. 여보가 꼬박꼬박 챙겨 먹으라고 했는데 당연히 먹었지.”
“우리 남편 말 잘 듣네. 착하다.”
겨울이 맑게 웃으며 화면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상으로 뽀뽀 한번 해줘야겠다.”
달콤하게 속삭인 겨울이 액정에 대고 쪽, 입을 맞추는 시늉을 했다.
사랑스러운 모습에 나사 풀린 사람처럼 웃던 시후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액정 위 비치는 겨울의 얼굴을 손끝으로 쓸며 비스듬히 턱을 괬다.
“오늘 낮에 머리 잘랐어?”
“헉, 맞아. 3센티도 안 잘랐는데 어떻게 알았지?”
“나야 우리 여보 머리카락 한 올 떨어진 것도 알아보지.”
장난스러운 말에 푸스스 웃음을 터뜨린 겨울이 머리를 수줍게 만지작거렸다.
“사실 나도 알아봐. 오빠 아직 면도하기 전인 것도. 맞지?”
“응. 샤워만 하고 나왔어. 이제 해야지.”
아직 면도하기 전이라 깔끔하지 않은 턱을 문지르며 답하자 겨울의 눈이 반짝거렸다.
“아, 그립다. 아침에 막 일어났을 때 약간 까끌까끌한 오빠 턱 내가 진짜 좋아하는데. 나중에 만나면 깨물고 뽀뽀해야지.”
“지금 해줘.”
“뭐? 지금?”
해맑은 겨울의 웃음소리에 따라 시후가 턱을 화면으로 가깝게 당겼다.
장난스럽게 입을 벌린 겨울이 앙 깨무는 흉내를 내고는 입술을 동그랗게 말고 쪽쪽 깜찍한 소리를 냈다.
그런 겨울을 꿀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보던 시후가 작게 한숨을 지었다.
“오늘따라 더 보고 싶네, 우리 여보.”
미래를 위해 잠시 떨어져 지내는 것뿐이었지만, 그래도 함께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아침을 맞고 잠들지 못해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얼른 연구소 갈 준비나 해. 이러다 늦겠다.”
“겨울이 넌 언제 잘 거야?”
“슬슬 자야지. 여긴 이제 곧 자정인걸.”
오전 8시도 안 된 시후의 시간과 달리 겨울이 있는 서울은 모두가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드는 시간이었다.
“네가 너무 예뻐서 출근하기가 싫다.”
결혼한 지 어느덧 3년이 넘었지만, 사랑은 조금도 식지 않은 채 여전히 애틋하게 불타올랐다.
“그럼 나 오늘도 영상통화 켜놓고 잘까?”
“응. 자는 모습 보여줘.”
어느 순간부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잠든 겨울의 모습을 보며 웃는 게 습관이 되었다.
“너 잠드는 거 봐야 나도 오늘 하루 힘낼 수 있을 것 같아.”
진솔한 속삭임에 부드럽게 미소 지은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화면이 잘게 흔들리고 침대에 누운 겨울의 모습이 시후의 동공에 한가득 담겼다.
약 2주 전 함께 누웠던 커다란 침대에 홀로 누운 겨울의 모습에서 시후가 눈을 떼지 못했다.
“얼른 출근 준비해, 오빠. 나 진짜 잘 거야.”
“응. 너 잠들면 할게.”
오늘도 겨울이 먼저 잠들기 전에는 통화를 끄지 않겠다는 듯 시후는 고집스럽게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겨울의 마음도 그와 다르지 않았기에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보고 싶다, 오빠. 빨리 다음 주 됐으면 좋겠어.”
배시시 웃은 그녀가 지그시 눈을 내리감았다.
“안 되겠어. 얼른 잠들어서 꿈에서라도 만나야겠다.”
귀여운 속삭임이 시후의 고막에 은은하게 녹아들었다.
길쭉한 손을 뻗은 그가 눈을 감고 있는 겨울의 모습을 느릿하게 쓸었다.
“그래. 우리 꿈에서 만나.”
액정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웃었다.
“잘자, 겨울아.”
수없이 저물어간 낮과 밤들이 무색하도록…….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다.
***
“뭐?! 못 오게 됐다고?”
금요일 저녁,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두꺼운 전공 책을 가방에 넣던 겨울이 그만 책을 쿵 떨어뜨렸다.
“이번 주말에 오기로 했잖아……. 저번 주부터 약속해놓고.”
지난 3주간 달력에 하루하루 지워가며 시후와 만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강의를 버틸 힘은 곧 시후를 만난다는 기대에서 나올 정도였다.
덕분에 약 이틀 전부터 들뜰 정도로 온종일 가슴 설레했는데…….
-미안. 요즘 갑자기 일이 바빠져서…… 아무래도 이번 주는 한국 못 들어갈 것 같아.
이렇듯 전화 한 통에 모든 흐뭇한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휴대전화를 움켜쥔 겨울이 입술을 꼭 옹송그려 물었다.
주말에 함께 어디를 놀러 가면 좋을지, 뭘 먹으면 좋을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으로 일주일을 겨우 버텼는데 또다시 한 주를 기다려야 한다니.
“……나, 진짜 내일만 기대했는데.”
-정말 미안해, 겨울아. 다음 주에 꼭 갈게.
“……아니야. 바쁜데 어쩔 수 없지.”
애써 힘겹게 웃은 겨울이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며 활기차게 목소리를 냈다.
“보고 싶어도 참아야지, 뭐. 난 괜찮아.”
-이해해줘서 고마…….
“응. 남편 보고 싶어서 상사병 걸려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도 어쩔 수 없지, 뭐.”
-……응?
“한 달 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는 남편 때문에 수절하다가, 열 살 연하 의대생이랑 바람나도 어쩔 수 없고. 그렇지?”
-뭐……? 누가 누구랑 바람이 나? 그게 누구야?
“누구긴 누구야.”
서러움이 폭발한 겨울은 애써 웃다가 돌연 급발진하기 시작했다.
“20세기에 태어난 살아 있는 화석 강시후 너보다 무려 열 살이나 어린 연하남이지!”
-너 그게 무슨…….
“아니, 이왕이면 띠동갑이 좋나?”
-띠동갑? 넌 무슨 유부녀가…….
“아, 바쁘다, 바빠. 지금 당장 나가서 21세기에 태어난 남자애들이랑 2박 3일 동안 아주 찐하게 세기의 데이트를 해야겠다.”
-2박 3일? 너 그럼 죽어.
“와, 대박. 지금 나를 죽인다고? 한국도 못 오는데 어떻게 죽이게? 블루투스로 화살이라도 쏘게? 와이파이에 독극물이라도 탈 건가?”
-네가 아니고 그 21세기에 태어난 놈인지 뭔지가 죽어. 내 손에 죽어.
“허, 그래. 어디 한번 죽여 보셔. 나 바쁘니까 끊어!”
래퍼에 빙의하여 속사포로 쏟아낸 겨울이 꽥 소리 지르며 일방적으로 끊었다.
“하아…….”
겨울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차오르는 섭섭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저도 모르게 폭풍으로 서운함을 쏟아내고 말았다.
‘내가 너무 심했나…….’
하지만 우습게도 전화를 끊자마자 후회하는 소심쟁이가 여기에 있었다.
‘아, 역시 내가 너무 욱했어. 바보, 함겨울 바보…….’
늘 바쁜 와중에도 저를 보러 먼 길을 찾아와줬던 다정한 남편이었다.
그런 그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무작정 화를 낸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어찌 된 게 나이를 먹어도 사랑 앞에서는 덤덤해지지 못하고 되레 더 유치해지기만 하는지.
이따 꼭 사과하기로 하고 고개를 들어 올린 겨울은 문득 한데 집중된 시선을 느꼈다.
“……아.”
호기심 어린 눈빛들이 겨울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같은 해에 진학했던 대학 동기인 예지와 현아는 벌써 물음표 살인마 같은 얼굴로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 있었다.
“언니,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전화한 사람 남편이에요? 그 소문의 자산이 몇백억씩 있다는 부자 남편?”
“뭐, 뭐? 그런 이상한 소문은 대체 누가…….”
입학할 때부터 빼어난 미모로 시선 집중이었던 겨울은 아이돌 같은 얼굴과 달리 서른 줄에 들어선 나이로 많은 관심을 받았었다.
그렇기에 입학할 때부터 이미 유부녀였던 겨울의 남편에 대한 소문이 교내에 무성했고, 간간이 진짜 목격한 자들은 과장을 보태 입 아프게 떠들어 댔었다.
“어쨌든 아니야, 아무것도. 하하.”
머쓱하게 동공을 굴린 겨울이 대충 얼버무리고는 얼른 가방을 챙겼다.
빠른 걸음으로 강의실을 빠져나가자 그 뒤를 쫓아온 예지가 그녀의 팔에 살갑게 팔짱을 꼈다.
“언니, 언니. 그보다 오늘 불금이잖아요! 우리 한강 가서 치맥하기로 했는데, 언니도 같이 가요!”
“치맥? 아…… 좋긴 한데. 나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려고 했는데.”
“금요일 밤에 무슨 도서관이에요! 가요, 네? 강세혁이랑 김준호도 오기로 했어요.”
“맞아요. 가요, 언니!”
현아 또한 설득에 합류하여 겨울의 팔을 붙잡고 떼를 썼다.
양쪽에서 붙잡자 마치 연행되는 듯한 자세였다.
당황한 겨울이 어쩔 줄 모르고 고민하는데, 문득 뒤에서 빠르게 달려온 누군가가 겨울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
흠칫 놀란 겨울이 뒤를 돌아보자, 저 멀리 강의실에서부터 뛰어온 동기 강세혁이 가쁜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누나. 잠깐만. 제가 계속 불렀는데…….”
“어, 세혁아. 못 들었는데, 무슨 일이야?”
“그게……, 저…….”
잠시 머뭇거리던 세혁이 겨울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며 말을 이었다.
“누나가 오늘 저희랑 같이 한강 갔으면 해서요…….”
“응? 한강?”
“네. 제가 개인적으로 누나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무슨 할 말인데?”
“아. 그게…….”
약간 얼굴이 붉어진 세혁이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뜸을 들였다.
묘하게 껄끄러운 행동에 고개를 갸웃한 겨울이 미간을 좁혔다.
“어쨌든 오늘 저희랑 같이 한강 가요. 네?”
세상 간절하게 설득하며 애절한 눈빛을 발사하는 바람에 난처해진 겨울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차피 이번 주는 시후가 오지 못한다고 했으니 오늘 밤부터 주말까지 내내 혼자일 터였다.
상사병으로 방구석에 틀어박혀 우울하게 땅을 파고 싶지는 않았기에, 겨울이 고개를 끄덕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저 멀리 정문에서부터 빠르게 질주해온 네이비색 스포츠카가 겨울의 앞에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