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Clover Bloom (2)
* * *
레넌 시리우스. 그는 빙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리스 마법을 이용한 전법을 구사하는 편이다.
겉보기에는 단순히 사람을 미끄러트리는 마법처럼 보이지만, 그 사실 하나가 전투에 있어서만은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나와 시넬이 레넌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 마법에 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레넌의 그리스 마법을 깨트리기 위해 내가 가장 먼저 고안해낸 방법은 바로 바닥에 구슬을 뿌리는 것이었다.
그리스는 영역 내에 있는 사람의 움직임을 방해한다.
그리스가 적용되는 지면에서는 오직 레넌만이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면 위에 흩뿌려진 구슬을 상대로는 어떻게 될까.
바닥에 떨어진 구슬이 그리스의 효과를 적용받는다면, 구슬은 지면과의 마찰에 의한 에너지 손실이 최소화된 상태로 그리스가 펼쳐진 영역을 오랫동안 움직일 것이다.
계속해서 그리스의 영향을 받는 구슬과 영향을 받지 않는 레넌.
모순되는 상태의 두 대상이 만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예상되는 경우는 대략 두 가지였다.
하나는 레넌의 발이 닿은 순간 구슬이 그리스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되는 경우.
이 경우에는 구슬에 남아있는 운동에너지와 레넌의 신발에서 일어나는 마찰이 문제를 일으킨다.
아마 높은 확률로 레넌은 균형을 잃고 넘어질 것이다.
다른 하나는 레넌의 신체가 구슬에 닿아도 그리스의 효과에 계속해서 영향을 받는 경우.
이 경우에는 레넌이 구슬을 밟는 순간, 구슬이 미끄러지며 레넌의 몸을 넘어뜨릴 것이다.
이후에는 바닥에 있는 구슬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움직임에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눈앞에서 굴러다니는 레넌의 모습처럼 말이다.
“고생했다, 시넬.”
똑같이 그리스의 영향을 받는 상태의 레넌이라면, 헤이스트를 사용하고 있는 시넬 쪽이 전투상의 우위를 점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을 증명하듯이, 시넬은 훌륭하게 레넌을 제압했다.
레넌은 팔과 다리를 단검에 찔려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몸을 추스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넬을 향해 걸어갔다.
팔다리를 붙잡고 바닥을 뒹구는 레넌의 정신상태로는 마법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인지, 지면이 걸려있던 마법은 풀려버린지 오래였다.
힐끗. 이쪽을 한 번 바라본 시넬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허리는 괜찮으신가요?”
“별거 아니었다.”
최대한 그리스의 영향을 덜 받도록 만들기 위해서, 나는 시넬에게 벽면을 박차고 움직일 것을 텔레파시로 주문했다.
물론 시넬이 레넌을 향해 도약하는 동안, 나는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지만 말이다.
“구슬을 이렇게 사용하실줄은 몰랐어요.”
“어느 정도는 먹힐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처참한 모습으로 만들어놨군.”
“그리스 마법을 쓰면 저희를 넘어뜨리고 도망갈 수 있으니까요.”
“뭐, 그거야 그렇겠지.”
터엉!
내 발에 걷어차인 정글칼이 골목의 구석으로 날아갔다.
위험이 될만한 무기를 제거한 나는 바닥을 나뒹구는 레넌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여기저기 자상을 입은 채 신음하는 빙판의 모습은, 빈말로라도 썩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끄으으윽…….”
“확실히 평범한 방법으로 몸을 묶기는 힘들겠군.”
“치안대까지 데려가실건가요?”
“아니. 이 녀석은 블랙마켓으로 데려갈 생각이다.”
레넌은 치안대의 현상금보다 블랙마켓의 비공식 현상금쪽이 액수가 높은 편이었다.
당연히 치안대에 끌고 가는 것보다는 블랙마켓으로 향하는 편이 이득이었다.
그리고 블랙마켓에서 구해야하는 물건도 있었으니, 이 기회에 한차례 마켓에 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전화를 꺼내들고는, 번호를 눌러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별 다른 잡음없이 녀석을 운반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운반 서비스가 필요한 법이었다.
“위넌 사무소입니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세 사람정도 탈거다. 하나는 상태가 좀 안좋은데, 마켓에 옮겨줬으면 하는군. 8구역에 있다.”
“딜리버리 서비스 이용을 원하시는겁니까?”
“그래. 비용은 얼마나 나오지.”
“800크레딧입니다.”
블랙마켓에 입점한 위넌 패밀리에서 운영하는 운반 서비스.
‘전쟁도시’의 주인공인 어셔 헤이즈가 블랙마켓 편에서 현상범을 데리고 움직일 때 사용했던 수단이다.
저들은 스스로 딜리버리라고 칭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단어의 의미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가장 특이한 점은 대상이 어떤 상태던간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마켓으로 운반한다는 것이었다.
대신 이용요금이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문제 없군. 곧장 오면 된다.”
“정확한 주소를 불러주시면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나는 상담원에게 현재 위치를 불러주고선 전화를 끊었다.
이제 마켓으로 향하는 차량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시넬은 방금전의 대화가 신기한 것인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바닥에 쓰러진 레넌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레넌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 * * * * *
블랙마켓에 대한 견해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작중에서 그곳을 설명할 때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말이 있다.
양지에 크로스 네트워크가 있다면 음지에는 블랙마켓이 있다.
그만큼 블랙마켓은 음지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많은 의미를 가지는 장소 중에 하나였다.
수많은 조직들이 기업이라는 가면을 쓰고 블랙마켓에 입점해있으며, 무기, 약품, 장물, 용병 등 수많은 물품 및 서비스들을 암암리에 판매하고 있다.
때로는 도시의 거대기업체마저 어두운 일을 처리하기 위해 블랙마켓을 찾아올 정도였으니, 이쯤되면 누구라도 블랙마켓의 위상이 어느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신기하네요.”
마켓에 위치한 현상수배 데스크.
정산처리를 기다리는 내 옆자리에 서서 블랙마켓을 둘러보던 시넬이 말했다.
그녀는 마켓에 들어왔을 때부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마켓의 이곳저곳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도시의 이면과는 담을 쌓고 지내던 시넬이다.
블랙마켓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블랙마켓에 오는건 처음인가?”
“소문으로만 들었지, 이런 곳에 올 이유가 없었거든요.”
“골치아픈 일이라도 규모가 큰게 아니라면, 어지간해서는 이런데에 찾아오지 않지. 각종 장물이나 음성화된 자금을 처리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대표적인 예시가 고물상을 운영하는 제임스다.
그는 자신의 가게에 아무나 손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지만, 그에게 인정받은 손님에 한해서는 어느 곳보다도 탁월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블랙마켓에서 불확실한 일처리에 바가지를 쓸바에야, 제임스에게 4할을 떼어주고 확실한 결과물을 받아보는게 나았다.
내 경우에는 ‘전쟁도시’에 나왔던 절름발이 브루노에 대한 정보를 알고있던 것이 행운이었다.
“사장님은 아는게 많으시네요. 분명 암흑상인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엄청 노력하셨겠죠.”
“…….”
시넬의 말을 듣자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그런 노력이라고는 손톱만큼도 했던 기억이 없다.
애초에 그런 소름돋는 이름은 조금도 갖고싶은 생각이 없다.
“사장님을 만난건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그런가.”
“네. 분명 행운일거에요.”
“나도 마찬가지다. 믿을 수 있는 동료를 얻는 일은 쉬운게 아니니까.”
내 말을 들은 시넬이 고개를 푹 숙였다.
표정의 변화같은 것은 없었지만, 직전과는 미묘하게 다른 기류가 시넬의 주위에 흐르고 있었다.
“믿을 수 있는 동료……. 그런가요.”
“퍼시발 씨, 계십니까.”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시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데스크에서 나를 호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정산절차가 끝난 모양이었다.
나는 데스크에 다가가 나를 부른 직원을 마주했다.
데스크에 있던 직원은 나에게 종이 하나를 내밀면서 말했다.
“1만 2천 크레딧입니다. 여기 아래에 서명해주시면 됩니다.”
“1만 2천 크레딧? 이전에 봤던 것보다 금액이 큰데.”
“어제 다른 회사에서 녀석에게 추가적인 현상금을 걸었더군요. 그래서 그럴겁니다.”
“추가 현상금? 아, 레서트에서 현상금을 추가한 모양이군.”
전에 마주한 윌슨이라는 이름의 연구원은 자신이 극비리에 회사의 일을 처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녀석에 대해 새로 추가된 현상금은 높은 확률로 레서트 인더스트리에서 제공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윌슨이 옮기고 있던 가방의 내용물이 생각보다 중요한 물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죄송하지만 현상금을 누가 걸었는지까지는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겠지. 전부 적었는데 그냥 내면 되나?”
“확인했습니다. 이쪽에 수수료를 제외한 금액을 넣어두었습니다. 언제나 저희 마켓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점원이 내민 검은 가방을 챙겨들었다.
가방을 든 내가 데스크를 벗어나 마켓의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시작하면, 정신을 차린 시넬이 나를 뒤따라왔다.
1만 2천 크레딧. 수수료를 제외하고도 1만 8백 크레딧.
정보비용으로 지출한 크레딧을 제외하더라도, 오늘은 생각보다 만족스러운 금액을 벌어들였다.
돈가방을 쥐고 있는 마음속이 풍족해진다.
사무실에 돌아간다면 배달음식들을 잔뜩 시켜, 시넬과 단 둘이 파티를 벌여도 좋을 것이다.
“시넬.”
“네.”
“일정이 끝나면 먹고 싶은거라도 있나?”
“먹고 싶은거 말인가요?”
“그래. 가격은 신경 쓸 필요 없다.”
사치스러운 질문에 시넬이 입을 다물고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무엇을 시켜먹을지 고민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러나 시넬의 행복한 고민이 길게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갑작스럽게 뒤에서 튀어나온 누군가가 시넬의 목을 끌어안은 것이다.
“시넬, 오랜만이네. 네가 이런 곳에 올줄은 몰랐는데.”
시넬과 닮은 잿빛의 머리카락.
앞머리를 정성스럽게 땋아내린 소녀의 탁한 눈동자가 시넬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시넬과 안면이 있는 사이인지, 시넬에게 매달린 채로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깜짝 놀란 시넬은 허벅지의 단검으로 손을 가져가다가, 이내 상대의 얼굴을 보고는 움직이던 손을 멈춰세웠다.
“스피넬……?”
스피넬. 잿빛 머리카락. 허벅지에 묶어놓은 케이스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은색의 칼날들.
익숙한 이름과 시야에 들어오는 다양한 정보들을 통해, 나는 눈앞에 있는 소녀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마천루의 마법사, 스피넬.
그녀는 스펠 오버로드를 사용할 수 있는 6서클의 대마법사이자, 도시의 가장 깊은 어둠에 몸을 담고 있는 특급 수배범이었다.
“네가 동행인도 데리고 다니다니, 별일이네. 이 사람은 누구야?”
“……스피넬. 사장님은 건드리지마.”
“사장님이라. 아하, 그런 관계였구나?”
대마법사. 그 단어가 전쟁도시에서 가지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눈앞의 소녀는 도시의 어둠속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런 괴물이 이번에는 나를 향해 웃으며 손을 내밀어왔다.
“나는 스피넬 클로버블룸. 당신은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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