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사명 (4)
* * *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허공에 떠오른 그 모습은, 처음 마주함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익숙한 외형이었다.
전신을 뒤덮은 푸른 색의 비늘.
세로로 쭉 찢어진 날카로운 금색의 동공.
허공에 날갯짓하는 푸른 빛의 피막 날개.
전설속에서만 존재하던 푸른 색의 드래곤이 현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저 모습을 보는 것도 오랜만인걸.”
하늘을 유영하던 거체는 이내 상공을 향해 비상했다.
눈앞의 드래곤이 움직임을 보일때마다 압도적인 존재감이 주변에 퍼져나갔다.
변신술사의 ‘폴리모프’ 마법은 원하는 생명체로 변화할 수 있다.
그것이 지금은 멸망해버린 존재라고 하더라도, 그의 마력이 허락하는 한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변신술사가 언제까지고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과도한 변화는 그만큼의 소모를 동반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크르르…….
쩌어억.
드래곤의 입이 벌어지며 흉부가 크게 팽창하기 시작했다.
입을 벌린 드래곤의 입가에 방대한 에너지가 서서히 응집된다.
그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는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용종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 ‘브레스’를 결계를 향해 쏘아내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크기를 더하던 드래곤의 흉부가 부풀더니, 어느덧 한계에 다다른 모양인지 팽창을 멈추었다.
“브레스를 쏘겠군. 준비해라.”
“응. 기다리고 있어.”
스피넬의 대답을 들은 나는 난간에서 약간 뒤로 물러섰다.
드래곤의 숨결에 주변에 불어오던 바람의 흐름이 뒤바뀌었다.
벌려진 입가에 응축되던 에너지의 흐름이 멈추더니, 그 직후 드래곤이 참아두었던 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콰과과과과과과!
냉기의 폭풍이 터져나오며 마탑의 결계와 격돌했다.
차가운 밤공기는 폭풍에 얼어붙었고, 그 여파로 사방에 얼음의 결정이 흩날렸다.
대마법사라는 이름이 결코 아깝지 않은 풍경이었다.
브레스에 직격당한 결계의 일부도 어느새 기능을 멈추고 얼어버린 채였다.
“다치지 않게 잘 피해보라고.”
장난기 가득한 말을 내뱉은 스피넬이 철근을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상공에 머무르던 철근들이 재차 지상을 향해 낙하했다.
철근이 가진 막대한 질량. 그리고 아찔한 고공에서의 낙하.
이 두가지 요소가 합쳐져 다시 한 번 막대한 충격량을 만들어낸다.
쿵! 콰앙! 쿠궁!
바람을 가르며 내려꽂힌 철근들이 약화된 결계를 두드렸다.
이전에는 단순히 파문을 일으켰을 뿐이지만, 이번에는 직전과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냈다.
쩌적, 쩌저적.
철근에 직격당한 결계에 균열이 일어난 것이다.
충돌의 여파는 결계 전체에 전달되었고, 개중에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만한 것도 있었다.
크륵, 크르르르르.
브레스를 전부 쏘아낸 드래곤이 날개를 펄럭이며 뒤로 물러섰다.
낙하하던 철근들 중 하나는 그렇게 드래곤이 벗어난 자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콰아앙!
표면이 얼어있던 결계는 날아오는 철근과의 충돌을 완전히 버텨내지 못했다.
커다란 파열음이 사방에 울려퍼지면서, 결계의 한구석이 완전히 깨져나갔다.
“결계를 부수는데 성공했군.”
“조금밖에 안깨졌는데 괜찮은거야?”
“기다리도록. 곧 완전히 무너져 내릴거다.”
마탑의 결계는 한곳이 받은 충격을 분산시키는 구조다.
일부가 완전히 붕괴되어버린 이상에야, 그 기능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내 말을 증명하듯이 부서진 결계가 산산히 흩어져내렸다.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마력광을 발산하는 결계의 잔해들을 마주하고 있자면, 어두운 밤을 밝히는 별가루를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정말이군요.”
무너져내리는 결계를 바라본 사령관이 감탄했다.
그러나 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마탑을 둘러싸던 결계가 무너져내리자, 스피넬이 움직이던 철근이 건물에 틀어박히기 시작한 것이다.
콰광! 쾅!
유리창을 부수며 파고들거나. 혹은 비스듬히 벽면을 무너트리고 들어가거나.
나무통을 꿰뚫는 해적들의 칼날처럼, 스피넬의 철근들은 무자비하게 마탑을 난도질했다.
가지고 있던 철근들을 전부 꽂아넣은 스피넬은 그제서야 시원하다는 듯이 손을 털며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꽤나 과격하군.”
“뭐든지 확실한게 좋잖아.”
스피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선, 난간에 달라붙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비명소리가 울려퍼지며 소란스러워진 모습이었다.
드래곤이 나타나고 철근이 내려꽂혔다.
소란스러워지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마탑을 보호하던 결계도 완전히 파괴되었겠다, 가능한 빠르게 작전에 들어가는게 좋아보였다.
“변신술사가 지상에서 진입을 시도할거다. 그 다음의 경과를 지켜보도록 하지.”
“응, 알겠어.”
스피넬의 철근이 마탑을 완전히 헤집어 놓았다.
마탑이나 세컨더리 비트쪽의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는 몰라도, 방금 전의 공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거라 생각한다.
적어도 어느정도의 전력약화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전면전으로 나설 때가 되었다.
튕겨져나온 철근에 맞아 지상으로 추락하는 드래곤을 바라보면서, 나는 머릿속으로 다음의 움직임을 준비했다.
* * * * * *
“주문하신 메론 빙수입니다.”
3구역에 위치한 유명한 디저트 전문점.
시넬은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거대한 특대사이즈 메론 빙수를 바라보았다.
스피넬과 함께 살았던 어린 시절에는 꿈도 못꾸던 음식이다.
사실 굳이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얼마 전의 시넬은 지갑사정이 좋지 않아 이런 간식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곤 했었다.
“……이건 맛있겠네요.”
꿀꺽. 침을 삼킨 시넬이 쟁반에 놓인 스푼을 집어들었다.
시넬은 이곳에 오자마자 무작정 가장 큰 메론 빙수를 주문했다.
눈앞에 놓인 특대사이즈의 빙수는 그런 주문의 결과물이었다.
점원은 혼자서 먹을 수 없다고 재차 경고했지만, 그런 문제쯤이야 시넬 클로버블룸에겐 큰 장애물이 아니었다.
자신의 돈으로 만끽하는 사치가 얼마만이던가.
머릿속으로 시간을 세던 시넬은 이내 고개를 세차게 휘젓고선, 빙수를 향해 스푼을 움직였다.
푸욱. 깊숙히 꽂아넣은 스푼이 큼지막하게 빙수를 들어올렸다.
얼음 위에 놓인 탐스러운 메론의 모습이 잿빛 눈동자에 비추어졌다.
“냐암.”
큼지막히 퍼올린 빙수를 시넬이 스스로의 입에 넣었다.
얼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며 입안에 단맛이 가득 퍼져나갔다.
달콤하다. 그리고 시원하다.
입안에서 펼쳐지는 디저트의 하모니에 시넬의 눈이 반짝였다.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은색의 스푼이 재빠르게 움직이며 얼음의 산을 파헤쳐 나갔다.
한입. 그리고 또 다시 한입.
열심히 메론 빙수를 만끽하던 시넬은 머릿속에서 전해져오는 띵한 느낌에 잠시 휴식을 가졌다.
“맛있네요.”
시넬이 생각하기에 자신과 스피넬의 입맛은 비슷한 편이었다.
그녀를 데리고 이곳에 찾아온다고 하면, 분명 빙수를 먹은 스피넬도 좋아할 것이었다.
잠시동안 스피넬에 대해 떠올려보던 시넬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다시 부정했다.
생각해보면 자신보다 여유로운 삶을 보내는 스피넬이다.
어쩌면 스피넬은 이미 이곳의 빙수를 전부 섭렵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느쪽이든 지금 당장은 이룰 수 없는 꿈에 불과했다.
“약속은 지킬 수 있으려나요.”
지금의 스피넬과 시넬이 쫓는 이상은 다르다.
그럼에도 하나의 약속만은 이루어지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어린시절에 하나뿐인 가족과 나누었던 약속.
사이가 잠시 멀어지더라도 그것만큼은 저버리지 않을 것이었다.
과거의 기억을 짤막하게 회상하던 시넬은, 머리를 뒤흔들던 통증이 가시자 다시 스푼을 주워들었다.
“일단은 마저 먹고서 고민해야겠어요.”
사각, 사각. 얼음을 파고든 스푼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처음에는 제법 수북하게 쌓여있던 메론 빙수였지만, 그렇다해도 시넬의 스푼 공세를 완전히 이겨낼 수는 없었다.
어느덧 산더미같던 메론 빙수의 양은 3분의 2정도밖에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부르르르르.
급하게 먹던 탓인지 다시 한차례 머리가 차가워진 시넬은 스푼을 입에 물고서 잠시 몸을 떨었다.
메론 빙수. 맛있지만 참 위험한 디저트였다.
한기에 떨던 몸이 가라앉자 시넬이 스푼을 손에 들었다.
“……?”
하지만 시넬은 곧바로 빙수에 손을 댈 수 없었다.
가게의 창문에 비치는 너머, 머나먼 건물에서부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던 것이다.
무언가 사고가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퍼져나가는 먼지의 규모를 보건데, 범상치 않은 일처럼 보였다.
“마탑에 테러리스트가 나타났다는 모양이야.”
“마탑이 테러를 당했다고?”
“그래! 지금 저기 연기가 그 증거라니까!”
창밖을 바라보는 시넬의 귓가에 주변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마탑. 그리고 테러리스트.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야기에 시넬의 귀가 집중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쓸만한 이야기가 더 들려오지는 않았다.
적어도 근처에 범죄자가 있다는 것만은 확실해보였다.
저런 규모의 사건이라면 많은 현상금이 걸려있는 수배범이 현장에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다 먹으면 한번 가봐야겠네요.”
혹시나 엄청나게 많은 크레딧을 벌어들이게 될지도 몰랐다.
만약 그렇게 되면 신세를 지고 있는 사장님에게 선물을 하나 사주는 것도 괜찮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에 남은 돈으로는 무엇을 살까.
머릿속으로 행복한 상상을 펼쳐나가면서, 시넬은 메론 빙수를 한가득 퍼올려 입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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