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어둠의 집행자 (1)
* * *
결사와의 마찰. 그리고 네이와의 갈등.
그런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내가 느낀 것은, 나를 위해 움직일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암흑상인의 사무소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검성과 시넬은 이미 부하로 두기에는 분에 넘칠정도로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비밀리에 움직일 수 있는 조직이 필요했다.
결사와 어셔에게 내 움직임을 들키지 않고서, 내가 원하는 일들을 처리해줄 수 있는 특별한 조직.
다시 말해서 비밀조직을 결성하기로 한 것이다.
“시시하네…….”
그걸 위해서 오늘은 필립이 자주 다니는 길목에 혼자서 찾아온 상태였다.
스스로를 어둠의 계약자라 칭하는 필립.
그를 내 비밀조직의 첫번째 조직원으로 넣을 생각이었다.
당연하지만 정체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새부리 가면과 펑퍼짐한 검은 코트를 입은 채였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수상하다고 느낄 수 있는 복장이기는 해도, 이 모습을 보고서 정체를 유추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건물의 옥상에서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필립을 바라보다가, 그에게만 들리도록 텔레파시를 사용했다.
“때가 되었다. 계약을 이행하라.”
“……?”
필립에게 계약을 주장하던 그때의 그 목소리다.
그가 마법을 각성하지 못했더라면 단순한 사기꾼의 목소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법을 각성한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는 자신의 각성에 목소리가 관여했다고 굳게 믿고 있는 상태였다.
내가 어떤 말을 꺼내더라도 어느정도는 믿어줄 가능성이 높았다.
“계약을 이행하라.”
반복해서 울려퍼지는 목소리.
그것을 들은 필립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잠시동안 주위를 돌아보며 사람들을 살펴보더니, 이내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들어섰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필립이 허공을 향해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너는 선택받았다. 너의 힘은 거대한 악에 맞서기 위한 것이다.”
“……거대한 악.”
“때가 되었다. 어둠의 집행자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계약을 이행하라. 도시를 구원하라.”
꿀꺽.
이야기를 들은 필립이 침을 삼켰다.
거대한 악. 도시의 위기. 그리고 어둠의 집행자.
연달아 던진 거대한 떡밥들은 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힘을 주겠다는 말에도 넘어갔던 필립이다.
비밀조직에 초대하겠다는 말을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후우. 필립이 짧은 심호흡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좋아. 어떻게 하면 되는거야?”
“집행자들의 요람을 알려주겠다.”
“집행자들의 요람?”
“그곳에 너를 안내해줄 사람이 있을거다.”
집행자들의 요람.
이름은 거창하지만 실상은 그냥 아지트다.
지난번에 시넬과 함께 블랙마켓에 찾아갔을때, 브로커를 거쳐 익명으로 임대한 장소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8구역의 외진 골목에 숨어있어 꽤나 으슥한 장소였다.
그 덕분에 비밀기지로 사용하기에는 적당하겠지만 말이다.
“그곳에 찾아가면 되는거야?”
“각오는 되었나. 발을 들이는 이상 쉽게 빠져나올 수 없을거다.”
“각오는 이미 되어있어.”
필립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갑작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필립의 모습에, 나는 빠르게 난간 너머로 모습을 숨겼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하늘을 바라본건지는 모른다.
다만 그는 뜨거운 결의와 함께 나에게 대답을 돌려줄 뿐이었다.
“이 힘을 손에 넣은 순간부터, 이미 운명은 결정되었을테니까.”
“마음을 굳혔군.”
“위치를 알려줘. 내가 그곳으로 찾아갈게.”
“그래. 장소를 알려주지. 그곳은.”
인적이 드문 골목길.
그곳에서 필립은 주소를 받아적었다.
사각. 사각.
펜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한적한 골목에 울려퍼졌다.
* * * * * *
공권력의 힘이 닿지않아 마굴이라 불리는 8구역.
그곳에서도 외곽쪽에 위치한 인적없는 길목에는 불이 꺼진 술집 간판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폐점한 가게처럼 보이는 장소다.
하지만 낡아빠진 문을 열고 들어가면, 모니터와 장비들로 가득 차있는 실내가 나타난다.
벽을 종류별로 채우고 있는 총기.
사람들이 둘러앉을 수 있는 커다란 원형 테이블.
마지막으로 자리마다 하나씩 존재하는 레서트 인더스트리의 첨단 장비들.
나는 그 한구석에 앉아 아지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흐음…….”
완벽하다.
어떻게 보아도 비밀기지 그 자체였다.
겉으로 보았을 때 술집처럼 위장하고 있는 점도 그렇지만, 안에 있는 장비들의 수준도 훌륭했다.
누가 오더라도 우리가 범상치 않은 조직이라는 것을 믿을 것이다.
내가 만들었지만 정말 훌륭한 장소였다.
이제 남은 것은 필립이 이곳에 찾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 뿐이다.
“…….”
째깍. 째깍.
정적속에서 흘러가는 시계소리를 들은지 얼마나 되었을까.
모니터에 비치는 뉴스들을 읽으며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면, 마침내 문이 열리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끼익. 낡아 떨어진 경첩소리를 울리며 사람 하나가 들어섰다.
손님의 정체는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인물이었다.
필립. 그가 아지트에 찾아온 것이다.
“어, 저기…….”
긴장한 모습의 필립이 굳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들어서는 비밀조직의 아지트다.
필립 나름대로 긴장이 되는 상황일 것이다.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무기와 장비들에 위압감마저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필립을 무시하고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째깍. 째깍. 째깍.
느긋하게 시계바늘이 몇차례 더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십 초 가량의 시간이 더 흐른 이후.
나는 필립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전했다.
“손님이 찾아온건 오랜만이군.”
새부리가면 너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굳이 입술을 움직여 말을 전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비밀조직의 일원이라면 나름대로 무게가 있어야 한다.
바로 대답하지 않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여유로운 태도. 묵직한 분위기.
그것이 비밀조직의 선배가 갖춰야 할 덕목일 것이다.
“……안녕하세요.”
“무슨 용건이지?”
“그게…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서…….”
분위기에 주눅이 든 필립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누구라도 그럴만한 이야기였다.
계약을 이행해 도시를 위기에서 구하겠다니.
어떻게 자신의 입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나조차도 텔레파시로밖에 못하는 이야기를 말이다.
나는 그런 필립을 배려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계약이라. 우리가 누구인지는 들었나?”
“어둠의 집행자라 들었습니다.”
“잘 알고 있군. 나는 집행자 넘버 투. ‘전령’이라고 부르면 된다.”
내가 넘버 투인 이유야 간단했다.
내 전투력으로 ‘넘버 원’이라 우기면 비밀조직 전체가 우스워보이지 않겠는가.
누구든 숨겨진 패 하나는 있어야하는 법이다.
대충 넘버 투라고 둘러대고서 넘어가는 편이 나중에 편할 것이었다.
넘버 원이야 나중에 강한 사람을 하나 데려와서 끼워넣으면 그만인 일이었다.
“전령……. 알겠습니다.”
“그래서 계약을 이행하겠다고 했는데… 누가 이곳의 위치를 말해주었지?”
“제 마음속의 목소리가 저를 이곳으로 이끌었습니다.”
“마음속의 목소리… 그대는 선택받은 자로군.”
“선택받은 자?”
있어보이는 단어에 필립이 되물었다.
선택받은 자.
그것은 방금 만들어낸 단어였다.
필요한 설정은 이제부터 구상해 볼 생각이었다.
“가끔씩 그런 일이 있지. 무언가를 위해 강한 힘이 주어진 자들이.”
“제가 그런 사람인거군요.”
“그리고 자네는… 불꽃의 마법을 가지고 있군. 우리의 적과 싸우기에 적합한 마법이야.”
“어떻게 그걸……!”
내가 이야기를 꺼내자 필립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미 진작에 그의 뒷조사는 끝났다.
필립은 ‘버닝 핸즈’라고 불리는 화염 계통의 마법을 가지고 있었다.
진작에 텔레파시를 사용해 검증까지 한차례 마친 이야기였다.
“그게 내가 전령이라 불리는 이유지.”
“전령… 당신은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군요.”
“죽음의 지배자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아무나 데리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죽음의 지배자…….”
“그럼 어리숙한 자여. 집행자들의 요람에 온 것을 환영하도록 하지.”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계속해서 서서 떠드는 것도 다리가 아픈 일이다.
나는 원탁의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원탁의 맞은편을 가리키며 필립을 바라보았다.
“앉도록. 앞으로 저곳이 자네의 자리다.”
“제 자리라고요? 그럼 저를 이곳에 받아준다는 뜻입니까?”
“당연한 이야기를. 자네는 선택받은 자가 아닌가.”
“그렇군요.”
“자네는 지금부터 집행자 넘버 세븐. 이곳에서 자네의 이름은 잊어버리도록.”
넘버 세븐.
넘버 투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숫자다.
필립에게 넘버 세븐을 준 이유 역시 아까와 마찬가지였다.
조직의 무게감을 위해서였다.
내가 넘버 투였는데 넘버 쓰리를 주면 조직원이 너무 없어보인다.
쓰리. 포. 파이브.
이런 숫자는 언제든지 채울 수 있는 자리였다.
“넘버 세븐…….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찾아올 때는, 꼭 변장을 하고 안으로 들어오도록.”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