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어둠의 집행자 (2)
* * *
“넘버 세븐…….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찾아올 때는, 꼭 변장을 하고 안으로 들어오도록.”
명색이 비밀조직인데 신분을 노출한 채로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체가 드러나면 비밀리에 움직이는 의미가 전혀 없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테이블에 있던 버튼 하나를 눌렀다.
지잉.
묵직한 기계음과 함께 벽에 붙어있던 캐비닛이 열렸다.
캐비닛의 안에는 필립을 위해 준비한 장비와 의복들이 들어있었다.
“저걸 입으면 될거다.”
“저건…….”
“집행자를 위한 복장이다.”
내가 입고 있는 것과 같은 펑퍼짐한 검은 코트.
음성변조 기능이 내장되어있는 커다란 방독면.
마지막으로 레서트 인더스트리에서 제작한 통신용 이어셋까지.
정체를 숨기며 본부와 연락할 수 있는 기능을 전부 갖추어둔 물건이었다.
“그렇군요. 집행자를 위한 복장.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필립이 문이 열린 캐비닛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안에 있던 코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펄럭. 크게 한바퀴 휘둘러진 코트가 필립의 몸을 완전히 감쌌다.
코트를 입은 필립은 이어셋을 귀에 꽂아넣은 후, 옆에 놓여있던 방독면을 머리에 착용했다.
방독면을 쓰고 있는 검은 코트의 남자.
누가봐도 수상쩍은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
“잘 어울리는군. 넘버 세븐.”
“과찬입니다.”
당연히 과찬이다.
저 모습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필립의 얼굴과 체형은 완전히 가려진 채로, 빈민가에 수상한 사람이 하나 더 추가되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앞의 의자를 가리켰다.
“긴 이야기가 될거다. 자리에 앉도록.”
“좋습니다. 어떤 이야기죠?”
“집행자들의 사명. 그리고 우리가 상대해야하는 적. 지금부터 꺼낼 이야기는 거기에 대한 이야기다.”
방독면 너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필립의 감정만은 여실히 전해져오고 있었다.
“중요한 이야기겠네요.”
“이것을 알게되는 순간 더 이상 평범한 삶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을거다.”
“그렇군요.”
“밖에서 이 이야기를 절대 흘리지마라. 우리가 움직이지 않더라도 결국 죽을거다.”
그동안 했던 이야기들과는 다르게, 지금 하는 이야기만은 틀림없는 진심이었다.
이야기에는 정해진 흐름이 있다.
결사에 대한 정보가 풀리는 것은 반드시 시간과 순서를 지켜야만 한다.
자신의 손으로 결사를 상대할 어셔에게도 결사에 대한 정보만큼은 철저히 숨겨온 이유였다.
일련의 사건들이 앞으로 당겨질수록, 도시의 멸망 역시 함께 앞으로 당겨진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지막 페이즈로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결사에 대한 정보는 다루는데 있어서 신중해야만 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물고 있겠습니다.”
“그 각오다. 넘버 세븐.”
“그래서… 우리의 적은 어떤 녀석들입니까?”
“그들의 이름은 결사. 도시의 어둠에 숨어 제국의 멸망을 기원하는 이들이다.”
“결사…….”
결사에 다른 이름은 없다.
제국에 반역을 꾀하는 이들에게 다른 이름이 주어질 필요는 없었다.
성공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실패하거나.
역사속에 이름을 남기는 것은 이야기의 승리자가 대신할 것이라는게 결사의 지론이었다.
그들은 오직 거짓된 황제를 몰아내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아벨 테르도스가 계승자가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계승자라 불리는 우두머리에게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에 불과하지.”
“계승자. 그런 이름이군요.”
“우리의 목표는 하나다. 최후의 결전이 찾아오기 전까지 싸움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
계승자와의 전투는 필연적이다.
때가 되면 도시 전체가 난장판이 될 터.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가능한 적의 숫자를 줄여놓는 것이 필립의 일이었다.
적이라고 해도 결사의 간부같이 나조차도 버거운 이들을 상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부탁할 것은 의외로 간단한 임무였다.
“저는 무슨 일을 하면 되는겁니까?”
“도시 전역에서 죽음의 흐름을 읽어라. 그리고 그 숫자에 따라 우선순위를 매겨라.”
“죽음의 흐름이요?”
“계승자는 죽은 자들을 부릴 수 있다. 언젠간 도시 전역의 망자들을 되살려 소요사태를 일으키겠지.”
“때가 되면 너무 늦는다. 그 전에 가능한 시체의 숫자를 줄여둘 필요가 있다.”
계승자의 마력은 도시의 누구보다도 많은 편이다.
결사에 새로운 계승자가 탄생할 때마다, 서로간에 마력의 계승이 이루어진다.
수백 년간 누적되어온 마력의 총량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지금의 계승자라면 도시 전역을 커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순간에 벌어질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가능한 시체를 소각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런 임무였군요.”
“8구역에는 연고 없는 사망자가 자주 발생한다. 그들을 보면 불태워라.”
“알겠습니다.”
“간혹 미약하게 영향을 받아 언데드로 변한 경우도 있을거다. 그런 녀석들은 넘버 세븐의 불꽃으로 충분히 처리 가능하겠지.”
나는 코트의 주머니에서 열쇠 하나를 꺼냈다.
이곳의 열쇠를 미리 하나 복사해두었다.
어지간해선 내가 이곳에 자주 찾아오는 일은 없을 터.
손에 쥔 열쇠는 오로지 필립을 위한 물건이었다.
들고 있던 열쇠를 필립을 향해 던졌다.
필립은 어정쩡한 자세로 열쇠를 받아들더니, 이내 열쇠를 바라보며 나에게 물었다.
“이건…….”
“이곳의 열쇠다. 물건이든 장비든 벽에 걸려있는 것들은 마음대로 사용해라.”
“마음대로… 알겠습니다.”
“집행자들을 위한 물건이니 부담가질 필요는 없다. 그럼 잘 부탁하지, 넘버 세븐.”
나는 마지막 안내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무에 대한 안내는 이걸로 끝이다.
상세한 내용이 필요한 경우에는 지급한 단말기를 통해 전달하면 될 터.
이제 더 이상 이곳에 버티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암흑상인의 사무실은 여기가 아니니까.
* * * * * *
“여기가 새 사무실이야?”
3구역에 위치한 고층빌딩.
그 한켠에 자리잡은 사무실에 들어선 검성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3구역은 도시 안에서도 번화한 구역이다.
마탑과 백화점이 위치하던 구역이기도 했다.
일련의 소란들이 벌어지며 근처의 부동산이 떨어지기는 했으나, 아직도 3구역의 위상은 높은 편이었다.
그런 3구역의 고층빌딩에 사무실을 구했으니 검성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새 사무실은 마음에 드나?”
“마음에 드는 수준이 아니잖아!”
“그러면 뭐지?”
“엄청나게… 대단한 회사같아 이젠.”
검성이 감탄하며 사무실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시넬은 진작에 창문에 달라붙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시넬의 머리 위에서는 까망이가 하품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커피를 꺼내기 위해 근처에 있던 냉장고로 향했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니 다행이군.”
“그런데 왜 이런 곳으로 옮긴거야?”
커피캔을 여는 도중 검성이 나에게 질문해왔다.
이전의 사무실과 지나치게 수준이 비교되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나라고 좋은 곳에서 사는게 싫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동안에 돈을 아껴왔던 것은 가능한 비상금을 비축해두기 위함이었다.
돈이 있어야 용병을 고용하고 몸을 지킬 수 있으니까.
하지만 결사와 깊숙하게 엮이고, 절름발이 브루노와 마주한 이후에 생각이 바뀌었다.
길어봐야 1년.
그 후에는 도시 전역이 잿더미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이제는 좀 넓은 곳으로 갈 필요를 느꼈다.”
그동안의 사건들을 통해 나는 제법 돈을 벌어들였다.
도시 전체가 마비된 이후라면, 가지고 있는 돈을 지키는 일조차 버거워진다.
그렇다고 무식하게 현물을 싸들고 다닐수도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 죽으면 이 돈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용할 수 있는 동안에 최대한 여유를 즐기는 것이 좋았다.
냉장고에 채워놓은 커피와 음료수들 역시 예전과는 달리 고급품으로 채워넣었다.
물론 양산품중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캔당 10크레딧짜리 어마무시한 물건들을 사오지는 않았다.
“……그렇구나. 저건 또 뭐야?”
고개를 끄덕인 검성이 이번에는 인테리어처럼 세워진 나무 구조물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구조물은 내가 구매한 물건이 아니다.
새롭게 월급을 받은 시넬이 배달시킨 물건이었다.
“캣타워 말이군. 시넬이 가져온 물건이다.”
“아… 까망이를 위한 물건이구나.”
“그래.”
“생각보다 괜찮은 디자인이네.”
“까망이도 좋아해요.”
어느새 캣타워에 가까이 다가간 시넬이 까망이를 캣타워에 얹으며 말했다.
예전에는 시넬의 손길을 거부하던 까망이였지만, 슬슬 익숙해진 것인지 손길을 곧잘 받아들인다.
시넬은 움직이지 않는 까망이를 캣타워 위에 올려놓고서 옆으로 비켜섰다.
까망이는 무심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좋아하는거 맞지?”
“네.”
“고양이 마음도 알아?”
“고양이를 좋아하면 알 수 있어요.”
사실인지 여부는 잘 알 수 없다.
고양이 마음이야 텔레파시를 사용해도 알 수 없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누구도 공감할 수 없는 고양이 마음에 대해 토론하고 있으면, 사무실 밖에서 인기척이 울려퍼졌다.
터벅. 터벅. 터벅.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선명한 발소리.
그것을 들은 검성이 나를 바라보았다.
“퍼시발. 누가 찾아온 모양이야.”
“오늘은 손님이 찾아오기로 했다.”
“손님?”
“사무실도 이전했으니, 집들이 겸… 아니, 집들이라고 하면 안되겠군.”
“아무튼 축하 손님인거네?”
“오면 축하해줄거다. 아마도.”
사무실에 가까이 다가오던 발소리는 이내 완전히 잦아들었다.
그것을 대신하는 것은 새롭게 설치된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지이잉.
큰맘먹고 설치한 사무실이 열리며 손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장차림에 가방을 든 손님의 정체는 헤리오였다.
“찾아오느라 고생많았군. 이전한 사무실의 첫 손님이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온 헤리오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헤리오는 인사에 대답하는 대신, 어두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와 얼굴을 마주하자 헤리오의 감정이 전해져왔다.
분노. 슬픔. 그리고 좌절.
그 모든 감정들을 억눌러둔 채로, 굳은 얼굴의 헤리오가 입을 열었다.
“……암흑상인. 부탁이 있다.”
“무슨 일이지?”
“아니, 의뢰가 있다. 내 전재산을 걸고 너에게 한가지 부탁하고 싶다.”
“…….”
“벨 아가씨가 유령군단에게 납치당했다. 아가씨를 구할 수 있게 부디 도와줬으면 좋겠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