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무엇을 위해 강해졌는가 (6)
* * *
그가 연구소 안에 들어서자, 이번에는 또 다른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새하얀 연구가운. 그리고 피로에 찌든 커다란 다크서클.
말을 걸어온 것은 그와 같은 처지의 연구원이었다.
연구원은 멍한 눈으로 자신의 동료를 바라보더니, 이내 무심하게 한마디 툭 내뱉었다.
“나 많이 바쁘다.”
“아, 실례했습니다.”
연구원의 말을 들은 그의 동료는 생각보다 쉽게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자신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입장이기 때문일까.
해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앞을 가로막던 연구원의 동료를 지나쳐가고, 그로부터 우리는 3개 가량의 층계를 더 걸어올라갔다.
터벅. 터벅.
고요한 층계에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
밖에서 볼 때는 연구소가 작아보였는데, 직접 자신의 발로 걸어보니 생각보다 넓은 느낌이었다.
다만 넓은 면적과는 다르게 사람의 숫자는 적은 편이었다.
범죄조직에서 극비리에 운영하는 연구소다.
대놓고 사람을 모집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보안카드를 요구하던 3층을 넘어서 그 위의 4층에 도달했을 즈음.
아까와는 다른 경비병들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용건이지. 뒤에 두 사람은 외부인 같은데.”
4층을 지키던 경비병이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굴만 보면 아까 마주했던 녀석보다도 배는 험상궂게 생긴 모습이었다.
경비병이 총을 어루만지며 연구원에게 묻자, 연구원은 우물쭈물하며 쉽사리 답을 꺼내지 못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연구소에 반하는 일을 하는 중이다.
저렇게 생긴 범죄조직 출신의 경비 앞에서 쉽게 거짓말을 하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이게…….”
“뭐?”
“소장님 명령으로 왔으니 빨리 문이나 열어라.”
용기를 내기 힘들어하는 연구원의 모습에, 내가 대신 용기를 내주기로 했다.
나는 화끈하고 간략하게 경비에게 본론을 전달했다.
누가 듣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요약이었다.
연구원의 이야기를 들은 경비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소장님의 명령이라고?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다.”
“아니, 내가.”
“못들었으면 어쩔 생각이지? 애시당초 너 같은 말단이 뭘 알 것 같지도 않다만.”
“뭐?”
“시간 아까우니까 닥치고 문이나 열어.”
연구원의 얼굴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경비병의 얼굴은 그와 대비되게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경비병은 붉어진 얼굴을 연구원에게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연구원의 이마를 콕콕 찌르며 따지듯이 물었다.
“너, 지금 뭐라고 말했냐?”
경비병의 손가락에 닿은 연구원의 이빨이 달달 떨렸다.
하지도 않은 말 때문에 시비에 걸렸다.
억울해도 단단히 억울한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연구원의 모습과는 상반되게, 연구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거칠었다.
그야 내가 연구원을 대신해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문이나 열라고 했을텐데. 혹시 지능이 많이 모자란건가?”
“하하하! 네가 원하는 문이 황천길 문이었던거냐?”
“소장님이 기다리고 계시잖아. 늦으면 네가 목숨걸고 책임질거냐?”
“이, 이 자식이…….”
아무리 막나가는 녀석들이라도 소장이라는 이름에 어느정도 주눅이 들었던 것일까.
경비병은 이를 갈면서도 끝내 길을 열어주었다.
층계를 지키던 경비병이 길을 터주자, 연구원을 필두로 우리 일행이 앞으로 나아갔다.
경비병은 길을 내주면서도 끝까지 엄포를 놓았다.
“나중에 두고보자……!”
“쯧. 저래서 무식한 녀석들이란.”
연구원의 목소리로 마지막 한 수까지 철저히 교환해주었다.
이쯤되자 연구원도 포기한 것 같은 기색이었다.
후우. 짧은 한숨소리가 연구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들고 있는 총만 아니었으면 당장이라도 한소리 퍼부었을 것 같은 얼굴이다.
물론 연구원의 등에 맞닿은 총구가 이성을 붙잡아주고 있었기에, 다행히 그런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여기서부터는 경보가 울릴거야.”
마지막으로 우리를 가로막던 경비를 지나치자, 이제 남은 것은 굳게 닫혀있는 철문들이었다.
각각의 철문에는 카드를 꽂아넣는 구멍이 존재하고 있었다.
만약 연구원의 도움없이 이곳에 찾아왔다면, 내용물을 일일히 확인하는 것만 하더라도 제법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늘어선 철문들 중 하나에 자리잡은 연구원은 문 너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경고했다.
경보가 울릴 수 있다. 괜히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의 영향력으로도 무마할 수 없는 규모의 일이 일어난다는 뜻이었다.
“열 수는 있나?”
“여는거야 가능하지. 근데 기록이 남아. 경비병력도 찾아올거고.”
“뒷일은 신경쓰지마라. 눈앞의 일에만 집중하도록.”
어차피 뒷일은 눈앞의 연구원이 처리할 몫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연구원은 카드를 꺼낸 채 보안문의 비밀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삑. 삑. 삑. 삑.
연구원의 손이 분주하게 숫자패드 위를 돌아다녔다.
열 자리. 혹은 열두 자리 가량의 비밀번호가 눌러진 이후, 연구원이 가져다대었던 카드키를 제거했다.
지이잉.
묵직한 기계음과 함께 두터운 철문이 그 너머의 모습을 드러냈다.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울려퍼지는 경보는 덤이었다.
삐이. 삐이.
귀가 아플정도의 경보음이 4층 전체에 울려퍼졌다.
연구원이 문을 열기 전에 경고했던 그대로였다.
경보가 울려퍼지기 시작한 이상, 머지않아 경비병들이 이곳에 들이닥칠거다.
그 전에 벨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상태가 왜 이러지?”
열려있는 보안문의 너머에 들어선 나는 의자에 묶여있는 벨을 보며 말했다.
손목을 구속하고 있는 두터운 강철의자에 벨이 앉아있었다.
이곳에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멍하니 앉아있는 벨의 상태가 정상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다소 이상한 벨의 모습에 이유를 찾아 연구원을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약을 놨으니까. 해독제를 놓으면 금방 정신을 차릴거야.”
“약?”
“무언가 쓸만한 정보를 알아내려고 했겠지.”
그렇게 말한 연구원은 근처에 있던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테이블의 위에는 투명한 액체가 담긴 용기가 올려져있었다.
벨이 자신의 발로 걸어나가기 힘들다면, 탈출이 힘들어지는 것은 우리의 몫이었다.
멀쩡하게 만들 수 있다면 가능한 빠르게 조치하는 편이 좋았다.
망가진 벨의 모습을 보고서는 헤리오가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고 말이다.
“빨리 투여하도록.”
“하… 알았어.”
“의자는 어떻게 풀지?”
“저기 저 버튼.”
연구원이 해독제에 주사기를 꽂는 사이에, 나는 벨을 풀어주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벨이 앉아있는 의자의 뒤편에는 구속기능을 해제하는 버튼이 붙어있었다.
철컥. 버튼을 누르자 벨의 손을 묶어놓던 구속장치가 완전히 해제되었다.
연구원은 구속이 풀린 벨의 목에 해독제를 투여했다.
주사기를 가득 채우던 액체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벨의 목에 파고들었던 주사바늘이 뽑혀나왔다.
해독제라고 해서 당장에 벨이 정신을 차린다던가 하는 극적인 효과는 없었다.
나는 의식을 잃은 벨을 등에 들쳐업고서, 뒤를 따르던 검성에게 지시를 내렸다.
“유엘. 추격하는 녀석들이 있으면 네가 처리해라.”
“알겠어.”
“너는 옥상으로 향하는 길이나 안내하도록.”
“……옥상?”
옥상이라는 말을 들은 연구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여기서 탈출할 생각이다. 설마 여기 남아있다가 죽을 작정이냐?”
“아니, 나는…….”
“우리한테 협조한 너를 살려둘거라 생각하진 마라.”
“아, 알았어.”
목숨이 걸려있다는 말에 금세 수긍하는 연구원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자신까지 챙겨주려는 것 같아 의외였던 모양이다.
당연하지만 내가 연구원을 4층에 놓아두고 갈 이유는 없었다.
연구원은 다른 방법으로도 충분히 쓸데가 있었다.
“그럼 출발하지.”
벨 바이어틴을 들쳐업은 나는 연구원의 뒤를 따라 옥상으로 향했다.
벨이 감금되어 있던 4층은 연구소의 최상층이다.
조금만 더 위로 올라가면 옥상이 나온다는 이야기다.
연구원의 안내를 따라 위층으로 향하는 층계를 넘어서면 바로 옥상이 나왔다.
물론 층계를 오르는 동안 우리를 뒤쫓는 경비병들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검성이 어렵지 않게 처리했다.
“검성류 일섬.”
보이지 않는 참격에 맞은 적들은 깔끔하게 양단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검성은 오랜 전투경험으로 무장한 5서클의 마법사다.
범죄조직의 경비병들 따위가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연구원과 검성의 노력에 힘입어 아무런 피해없이 층계를 오르면, 우리는 굳게 닫힌 옥상의 출입문을 마주할 수 있었다.
끼이익.
다행히 문이 잠겨있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손잡이를 돌리자 문이 쉽게 열렸다.
“유엘.”
옥상으로 향하는 문이 절반정도 열렸을 때.
나는 열려있는 문을 손으로 붙잡아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검성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손잡이를 잘라버려라.”
“손잡이를?”
“그래.”
“으응.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알았어.”
카앙!
검성의 바람이 한차례 휘몰아치고, 이내 청명한 소리와 함께 손잡이가 잘려나갔다.
비스듬히 잘려나간 손잡이는 누가 봐도 쉽게 열기 힘든 모습이 되었다.
쫓아오는 이들의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한 수작이었다.
“잘했다.”
“응.”
열려있던 문 사이로 검성이 지나갔다.
나는 그녀를 뒤따라 옥상으로 들어서고는, 업고있던 벨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벨은 아직까지 의식을 찾지 못한 모습이었다.
아직은 좀 더 시간이 있다.
가능하면 전투가 끝나기 전에 눈을 떴으면 하는 바램이다.
의식을 잃은 벨을 내려놓은 이후에는, 우리를 따라 옥상에 들어왔던 연구원을 문앞으로 불렀다.
“여기에 서라.”
“갑자기 무슨…….”
“닥치고 서도록.”
“옙.”
총을 들이밀자 연구원은 얌전히 열려있는 문앞에 섰다.
우리를 안내해준 연구원을 굳이 힘들게 옥상까지 데려온 이유.
그것은 녀석들을 상대로 시간을 끌기 위함이었다.
퍼억. 발길질에 맞은 연구원의 몸이 문 너머로 날아갔다.
층계에 쓰러진 연구원은 무척이나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윽…….”
“그동안 고생했다.”
그런 연구원에게 내가 해줄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콰앙!
나는 연구원이 빠져나간 옥상문을 거세게 닫았다.
그 직후 잠금레버를 돌려 문을 걸어잠궜다.
밖에서 잡을 수 있는 손잡이는 이미 날려버린지 오래다.
이제 공구가 없이는 옥상으로 진입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것으로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문 너머의 연구원도 굳이 무언가를 할 필요는 없었다.
분노에 가득찬 경비병들이 그를 상대로 시간을 소모할테니 말이다.
쾅. 쾅. 쾅.
문을 두드리는 연구원의 소리가 울려퍼지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귀에 착용하고 있던 이어셋의 버튼을 눌렀다.
“듣고 있나? 벨 바이어틴을 구출했다.”
“잘 들리는군. 좋은 소식이다.”
“그럼 지시를 내리도록 하지. 연구소의 정문을 공격해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