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무엇을 위해 강해졌는가 (7)
* * *
“느낌이 좋지 않군.”
헤리오는 텅 비어있는 자신의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암흑상인으로부터 공격명령을 받은 이후, 어느덧 십여 분 가량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헤리오의 포격을 받은 연구소의 정문은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헤리오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입구에 모인 경비만 하더라도 상당한 숫자다.
물론 그들의 공격을 받아낸 헤리오의 상태도 완전히 멀쩡하지는 않았다.
적들의 포화를 방어하기 위해 펼쳐놓은 헤리오의 방어벽에 슬슬 한계가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적들이 다가오고 있나요?”
“거의 다 다가온 상태다.”
“그런가요.”
시넬 클로버블룸.
자신과 함께 전장에 남겨진 동료에게 질문을 받은 헤리오는, 마을 곳곳에 숨겨두었던 장치를 작동시키며 대답했다.
그가 아는 한 암흑상인이 자신에게 연구소를 공격하라고 지시한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암흑상인이 잠입한 연구소의 옥상으로 향하는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유령군단의 병력을 이곳으로 끌어내기 위해서.
헤리오의 눈에 비치는 적들의 숫자만 보더라도, 첫번째 목적은 이미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고 보아도 무방한 상태였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두번째였다.
“숫자가 제법 많군. 적들이 움직이는게 느껴지나?”
“저는… 알아채기 힘들 것 같아요.”
눈에 보이지 않는 적들이 무더기로 이곳에 다가오고 있었다.
연구소 앞에 엄폐하고 있는 병력들과, 이곳으로 향하는 괴한을 둘러싼 투명한 군세.
헤리오의 감각에 걸리는 숫자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양쪽에서 다가오는 전력들을 상대로 가능한 오래 버텨내야만 한다.
사실상 이번 작전에서 가장 압박감이 큰 역할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옆에 있는 동료는 다가오는 유령군단을 감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연구소를 지키고 있는 경비병력을 제외하고는, 이번 전투에서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없는 셈이었다.
“다가오는 녀석들은 내가 저지하겠다. 너는 경비들을 상대하는데 주력하는게 좋겠군.”
“알겠어요.”
다가오는 유령군단의 공세를 받아칠 수 있는 것은 오직 헤리오 자신뿐이었다.
시넬에게 연구소 방향을 맡긴 헤리오가 투구의 바이저를 들어올렸다.
한겨울의 태양이 쌓여있는 눈을 녹여내고 있는 아래.
가면을 뒤집어 쓴 남자 하나가 헤리오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남자의 정체는 헤리오 역시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사령관. 표면상으로 유령군단 전체를 지휘하고 있는 우두머리.
그는 헤리오로부터 약간 떨어진 거리에 멈춰서서는, 가면 너머의 시선으로 헤리오를 훑어보았다.
“이거야 원. 나이트테일의 섬광기사가 왔군요.”
조금 먼 거리에서 헤리오와 마주보게된 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까득.
사령관을 마주한 헤리오가 이를 악물었다.
가면으로 뒤덮힌 얼굴을 마주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헤리오의 안쪽에서는 증오가 솟아올랐다.
후우. 헤리오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솟아오르는 분노를 최대한 억누른 헤리오가 사령관에게 말했다.
“뻔뻔하게도 내 앞에 나타났구나.”
“처음 뵙는군요, 섬광기사. 정말이지 주인을 잃어버린 개 같은 모습입니다.”
“……무슨 자신감으로 아가씨를 납치했지?”
“자신감? 그런게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다. 당신 혼자서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 중요한거죠.”
가면 너머의 얼굴에서 이죽거림을 느낀 헤리오였다.
경박한 도발. 그것을 마주한 헤리오의 손아귀가 분노에 짧게 떨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빠르게 분노를 잠재운 헤리오가 손에 든 검을 들어올렸다.
지금 자신의 역할은 유령군단을 상대로 전력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숫자가 자신의 앞에 찾아온 마당에, 언제까지고 분노에 젖어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것 치고는 급하게 달려온 모양이군.”
“맞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장비를 챙겨서 나왔죠. 이런식으로 습격할거라고는 예상도 못했거든요. 아니, 연구소가 이렇게 조용히 뚫릴거라고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그랬겠지. 오늘은 그 오만의 대가를 치르게 될거다.”
“오만이라. 원탁의 기사들에게 더 잘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요?”
사령관의 말을 넘겨흘린 헤리오가 적들의 숫자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미약하게 흘러나온 전격의 마법이 헤리오의 적들을 스쳐지나갔다.
이런식으로 사용하는 마법은 탐지에 누락되는 숫자가 제법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고서 세어봐도, 헤리오의 탐지에 걸린 적들의 숫자는 상당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맞상대할 수 있는 규모는 결코 아니었다.
“남의 뒷꽁무니에 숨어 중얼대는 놈이, 잘도 그런 말을 늘어놓는군.”
“남의 뒷꽁무니? 저를 보고 하는 말입니까.”
“네가 아니면 누가 있지? 네 옆에 늘어서있는 겁쟁이들을 말하는 줄 알았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과는 다르게, 헤리오의 속은 점점 타들어가고 있었다.
헤리오의 탐지에 걸려들고 있는 적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급하게 찾아왔다는 사령관의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유령군단이 가용가능한 병력은 이보다도 더 많다는 이야기가 된다.
지금의 숫자조차도 전부 감당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런데 이보다 더 많은 규모의 병력이 완벽하게 무장을 갖추고 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때는 유령군단을 사살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헤리오 자신을 포함한 일행 전부의 탈출 자체가 어려워질 것이었다.
“겁쟁이? 좋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보이지 않는 군세들이 자신감의 원천인 것일까.
사령관이 헤리오와의 거리를 서서히 좁혀오기 시작했다.
헤리오는 다가오는 사령관의 모습을 경계하면서도, 이후의 대응을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렇지 않나? 너는 무능력한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것도 세상을 좀먹는 더러운 쓰레기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요? 아무래도… 오늘은 좀 특별한 것들을 보여줘도 될 것 같습니다.”
“특별한 것?”
“이런 물건을 만들고 있거든요. 운좋게 강한 마법을 가지게 되었으면서, 다른 사람을 깔보는 당신같은 이들을 망가뜨리기 위해서.”
말을 마친 사령관이 주머니에서 앰플 하나를 꺼내들었다.
헤리오의 시선이 사령관의 손에 들린 앰플을 쫓았다.
사령관이 들고 있는 앰플은 헤리오의 눈에 익은 물건이었다.
나이트테일 기사단에서 벌였던 짧은 전투에서, 헤리오는 스스로에게 앰플을 투여한 의사를 마주했었다.
분명히 아무런 마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에도, 헤리오의 상대는 타인의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도 순식간에 마법사로 탈바꿈시키는 정체불명의 약물.
사령관의 손에 들린 앰플의 정체는 그런 물건이었다.
“그건…….”
“알고 있나보군요. 물론 그런 양산형들과는 차원이 다른 물건입니다.”
푸욱.
사령관은 들고 있던 앰플을 스스로의 목에 찔러넣었다.
앰플속에 들어있던 내용물이 순식간에 앰플을 빠져나갔다.
약물을 투여한 사령관은 잠시 눈을 찌푸리더니, 이내 비어버린 앰플을 내던지면서 헤리오를 바라보았다.
헤리오를 마주하고 있는 사령관의 눈은 어느덧 호승심에 가득 차오른 채였다.
“힘이 느껴지는군요. 마법사들은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던겁니까.”
흐하하하.
광기에 젖은 웃음소리가 마을에 울려퍼졌다.
미친듯이 웃는 사령관의 주변에선 짙은 마력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스스로의 마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미숙한 마법사들이 익히 보이는 풍경이었다.
힘에 취한 사령관의 모습을 본 헤리오가 짧게 혀를 찼다.
“약을 맞고서 미쳐버린 모양이군.”
“뭐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멋대로 입을 열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니까요.”
터벅. 터벅.
앞으로 걸어나오는 사령관의 손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왼쪽. 그리고 오른쪽.
걸어나오는 사령관의 주위를 본 헤리오는 빠르게 마력을 끌어올렸다.
약을 맞았다고는 해도 사령관은 사령관이었다.
그를 둘러싼 인파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따라나오고 있었다.
“전투보조시스템. 공격모드 기동.”
지금의 도발은 단순한 탐색전이다.
아직 헤리오 자신과 유령군단의 선두 이외에는 별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헤리오가 들고 있는 검에 전류를 흘려보냈다.
헤리오를 마주한 사령관의 불꽃 역시 더욱 그 크기를 키워나갔다.
그리고 사령관의 손아귀가 머금고 있던 불길이 한계까지 그 크기를 부풀린 순간.
“[인페르노].”
“최대 출력. 발사.”
허공에서 폭염과 뇌격이 맞부딪혔다.
콰아아아앙!
거센 불길과 마주한 뇌격이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사방으로 짙은 연기가 피어나가며, 순식간에 근처의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자신의 공격을 상쇄시킨 사령관의 마법에 헤리오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묵직하군.”
5서클의 마법사가 장비의 힘을 빌려 쏘아낸 공격이다.
그런 공격을 약물로 급조한 마법으로 억눌러냈다.
고작해야 약물 하나로 이루어낸 것이라고는 결코 믿기지 않는 위력이었다.
하지만 그 위력을 오래 유지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헤리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뿐이다.”
강한 마법은 그만큼의 소모를 동반한다.
검귀의 오러는 찰나에 불과하며, 헤리오를 휘감은 전류조차 무한정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하물며 약물로 피워낸 불꽃은 어떠하겠는가.
눈앞에서 터져나온 폭발에도 매혹되지 않은 채, 헤리오의 시선은 계속해서 연기 너머의 적을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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