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무엇을 위해 강해졌는가 (8)
* * *
강한 마법은 그만큼의 소모를 동반한다.
검귀의 오러는 찰나에 불과하며, 헤리오를 휘감은 전류조차 무한정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하물며 약물로 피워낸 불꽃은 어떠하겠는가.
눈앞에서 터져나온 폭발에도 매혹되지 않은 채, 헤리오의 시선은 계속해서 연기 너머의 적을 쫓았다.
“이게 그 유명한 섬광기사의 일격입니까? 생각보다 별거 아니군요.”
짙게 드리워진 연기의 너머.
새로운 불꽃을 피워낸 사령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헤리오의 예상대로 아무런 피해조차 입지 않은 모습이었다.
“많이 기대했나? 실망시켜서 미안하군.”
“잘 알고있군요. 지금이라도 꼬리를 말고 도망간다면 목숨만은 붙여드리겠습니다.”
섬광기사. 수많은 전투를 넘어서며 그 이름을 얻었다.
그런 헤리오라고 해도 일방적으로 유령군단을 쓰러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헤리오에게 서서히 선택의 시간이 찾아오고 있었다.
싸울 것인가. 아니면 도망칠 것인가.
짧은 고뇌에 빠져있던 헤리오는 금세 결론을 내렸다.
“듣고 있나.”
“그래. 어쩔 생각이지?”
“우선 장치를 가동시키겠다.”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린 헤리오가 입을 열었다.
따지고보면 암흑상인도, 그의 부하들도 전부 자신의 아집에 휘말린 셈이다.
그럼에도 암흑상인은 끝내 벨 바이어틴을 구해내었다.
이제는 헤리오 자신이 보답할 때였다.
그들의 안전은 헤리오가 책임지지 않으면 안된다.
레서트의 고고한 아가씨도.
수수께끼의 정보상인도.
검성을 자처하고 다니는 용병도.
멍한 얼굴의 잿빛머리 소녀도.
누구 하나 자신때문에 죽게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위에서 지원하겠다.”
“그럼 부탁하도록 하지.”
꼬리를 말고 도망친다고 해도, 언젠가 모습을 숨긴 유령군단에게 보복당할 뿐이다.
반드시 여기서 유령군단을 죽여야만 했다.
그리고 이 자리의 모두도 살려야만 했다.
그것이 헤리오 나이트라인이 걷는 기사의 길이었다.
헤리오는 결의에 가득찬 눈으로 손에 들고 있던 버튼을 눌렀다.
“어디 그 잘난 마법을 보여보도록.”
치이이이익!
헤리오가 사전에 설치해두었던 장치들이 일제히 연기를 분사하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모습을 숨기는 유령군단에 맞서기 위한 수단.
그것은 상호간의 시야를 똑같이 가리는 방법이었다.
레서트 인더스트리에서 개발한 연막장치가 분주하게 연기를 퍼뜨렸다.
순식간에 퍼져나간 연기가 저층부의 시야를 완전히 잠식했다.
“뭐, 뭐야……!”
“앞이 안보여!”
마법속에 숨어있던 유령군단이 혼란에 휩싸였다.
헤리오가 가져온 레서트의 연막장치는 통상의 연막탄보다 더 빠르고 광범위했다.
연막 안에 가두어진 이들은 바로 앞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인비지블’ 마법의 효과로 모습을 감추고 있던 유령군단의 군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사방으로 연막을 퍼뜨린 헤리오의 귓가에 암흑상인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소리에 의존하지 마라.”
이어셋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헤리오는 암흑상인이 있을 장소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고, 피식 웃으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짙게 퍼져나간 연기의 안에서 헤리오는 몸을 움직였다.
헤리오가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는 작전을 시행하기 전에, 이 안에서 찾아야만 하는 인물이 있었다.
계속해서 이 자리에 내버려두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인물이었다.
“시넬. 어디에 있나.”
자신과 함께 싸우던 잿빛머리의 소녀.
헤리오는 경비병력의 상대를 맡겼던 시넬을 찾아 분주하게 움직였다.
절그럭거리는 갑옷 소리. 귓가에 울려퍼지는 적들의 고함.
그런 것들을 무시하며 앞으로 한참 달리다보면, 헤리오는 어두워진 시야속에서 익숙한 사람의 형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후드를 뒤집어 쓴 시넬이 입가를 가린 채 경비병들을 상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숨이 가빠보이네요. 무슨 일인가요?”
자신을 찾아 달려온 헤리오를 발견한 시넬이 그에게 물었다.
헤리오는 그녀를 마주하자마자 자신의 용건부터 이야기했다.
“너를 찾고 있었다.”
“저를 찾았나요?”
“그래. 너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
부탁하고 싶은 일. 말은 그렇게 해도 일종의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의 헤리오는 암흑상인의 지시를 대행하는 입장이었으니까.
그것을 알고 있는 시넬은 아무런 의심없이 헤리오를 바라보았다.
“어떤 부탁인가요?”
“연막이 걷히기 전에 후방으로 빠져나가라.”
“……?”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켜라. ”
“대피? 어째서인가요?”
“전투가 시작되면 이 일대가 전부 휘말릴거다. 그 전에 최대한 사람들을 대피시켜라.”
끄덕.
고개를 끄덕인 시넬은 더 이상 그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헤리오의 성격을 파악했다면, 질문이 의미없다는 것도 깨달았을 것이다.
시넬은 조용히 걸어가고 있던 발의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는 헤리오를 향해 짧은 답변을 돌려주었다.
“알겠어요.”
타다다다닥.
시넬이 경쾌한 발걸음소리를 내며 재빠르게 헤리오의 시야를 벗어났다.
마을에 향하는 시넬의 뒷모습을 보던 헤리오가 눈을 깜빡였다.
시넬을 보낸 헤리오는 마음 한구석에 남은 찝찝함을 털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주민들을 대피시키라는 이야기는 단지 구실에 불과했다.
방금 전에 내린 지시의 목적은 그녀를 이 전장에서 벗어나게 하는데에 있었다.
“역시 거짓말은 성미에 맞지 않는군.”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갑갑한 느낌이다.
헤리오 자신의 입으로 한마디씩 꺼낼때마다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하. 짧은 한숨을 내뱉은 헤리오가 지나왔던 곳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문제가 생길만한 요소는 전부 정리했다.
이제는 그의 싸움을 이어나갈 때가 되었다.
다시 한차례 마력을 끌어올린 헤리오가 미약한 전류를 주변에 흩뿌렸다.
“다섯. 열. 스물. 아니, 그보다 조금 더 많아보이는군.”
인비지블의 영향을 받은 적들이 어느새 그의 지척에 다다른 채였다.
파직. 헤리오가 들어올린 검에 전류가 덧씌워졌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전장에 그의 아군은 없다.
어디를 어떻게 공격하더라도, 아군에게 피해가 갈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적들은 어떠한가.
사방이 아군들뿐인 곳에서 보이지 않는 헤리오를 맞상대해야만 했다.
“적이 보인다! 쏴라!”
“최대 출력. 발사.”
콰과과과광!
허공에 빛무리를 흩뿌리며 선명한 궤적이 그려졌다.
짧은 굉음. 그리고 그 이후에 퍼져나간 스파크.
헤리오의 검에서 쏘아져나간 뇌격이 주변의 적들을 휩쓸었다.
새하얀 섬광을 휘둘러 적들을 지워버린 헤리오가 다시 자신의 앞을 보았다.
“또 오는가.”
쓸어버린 적은 일부에 불과하다.
헤리오의 탐지에 포착되는 적들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적이 보이지 않아 시각적인 압박감은 없지만, 적의 규모는 결코 가볍게 볼만한 숫자가 아니다.
그리고 개중에는 마법을 배워 특별한 공격을 해오는 이들도 있었다.
“[아이스 스피어].”
콰직.
빠르게 날아온 얼음의 창이 헤리오의 갑옷에 부딪혀 바스라졌다.
갑옷에 보호받은 덕에 크게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창을 맞은 자리에 둔탁한 통증이 전해지고 있었다.
얼얼한 감각이 퍼져나가는 어깨를 억누른 채로 헤리오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마법이 날아왔던 방향으로 뇌격이 뻗어나가며, 보이지 않는 적의 단말마가 들려왔다.
“끄아아악……!”
“최대 출력. 발사.”
“아악!”
“발사.”
“커흐윽…….”
“발사.”
콰앙! 쾅!
수차례 섬광이 번뜩이며 적들의 비명이 울려퍼진다.
헤리오의 공격이 뻗어나갈 때마다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포격의 뇌성. 그리고 사람들의 아우성.
그것에 더해 성난 비명과 날카로운 총성이 뒤섞였다.
어디로 쏘아재끼는지 모를 총기의 발포음이 멎으면, 그 후에 웅장한 헬기소리가 뒤따라왔다.
두두두두두두.
위이잉. 위이잉.
이런 곳에 헬기가 찾아올 리가 없다.
난데없는 소리를 들은 헤리오가 암흑상인의 말을 떠올렸다.
소리에 의존하지 마라.
연막이 퍼져나가기 시작한 시점에서, 암흑상인은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뇌전의 포격을 쏘아대는 자신을 제외하고도, 적들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총을 난사하고 있다.
헤리오의 짐작대로라면 지금의 난전은 암흑상인이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정말 죽여주는군. 적으로 만나면 상당히 골치아프겠어.”
시야를 가린 채로 청각적인 혼란을 줘서, 적들의 일부를 일거에 마비시켰다.
집단과의 전투에 있어서 굉장히 유용한 능력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 하나있다면, 적들의 시야를 가리고 있는 연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레서트의 연막장치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다.
언제까지고 근처의 사람들을 가둘만한 연막을 내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암흑상인은 이 연막이 유지되는 동안에 다음 플랜으로 이어나가는 계획을 짰다.
“발사.”
일행이 세워놓은 플랜은 크게 두가지였다.
한차례 퇴각하고 재정비의 시간을 가지거나.
유령군단의 수괴를 처치하고 끝까지 전면전을 이어가거나.
연막속에서의 싸움이 길게 이어진 시점에서, 헤리오에게 첫번째 선택지는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남아있는 선택지는 오직 한가지.
난전속에서 조금이나마 적의 숫자를 줄이고, 남아있는 적들을 헤리오 자신이 상대하는 것이다.
“[인페르노].”
“최대출력. 발사.”
익숙한 화염이 헤리오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왔다.
화염은 궤적에 서있던 유령군단의 병사들을 불태우고서, 그 앞에 서있던 헤리오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헤리오는 곧장 최대출력의 뇌격을 쏘아내 불길을 상쇄시켰다.
퍼어엉! 거센 폭음이 헤리오의 귀를 때렸다.
먹먹해진 귓가를 헤리오가 손으로 억누르면, 반대편에 착용하고 있던 이어셋에서 암흑상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택의 순간이다. 헤리오.”
목소리를 들은 헤리오는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았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연막이 서서히 옅어져가기 시작하는 모습이었다.
연막속에서 싸울 수 있는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헤리오의 대답은 진작부터 정해져있었다.
“때가 되었나?”
“그래. 이제 망설일 시간은 없다. 상대할 수 있어보이나?”
저 숫자를 정면에서 상대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물어보더라도 헤리오는 고개를 저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헤리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인생에는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순간들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헤리오 나이트라인에게는 지금이 그런 순간이었다.
“아직 적이 많이 모이지 않았다.”
“그거야 다행이군.”
“그러니 플랜 B로 가지. 쏴라.”
플랜 B. 유령군단과의 전면전 선언이었다.
투우웅!
이어셋 너머에서 총기의 격발음이 들려왔다.
그 직후, 묵직한 파공음이 허공에 울려퍼졌다.
비명. 포성. 굉음.
그 속에서 세상을 휘감고 있던 불가시의 마법이 사라지는 것을, 헤리오는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