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무엇을 위해 강해졌는가 (9)
* * *
“……적은 죽었다.”
“수고했다, 암흑상인.”
방금 전의 총성으로 유령군단의 수괴가 죽은 모양이다.
그 증거로 모습을 숨기고 있던 적들이 순식간에 나타났다.
어마어마한 숫자다.
어째서 저들이 스스로를 군단이라 칭하는지 알 수 있을만한 숫자였다.
무전 너머의 젊은 친구 역시 그것을 아는 모양인지, 무거운 목소리로 헤리오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왜 거짓말을 했지?”
“…….”
“대답해라, 헤리오.”
“어차피 누군가는 시간을 끌어야하지 않나.”
“설마 처음부터…….”
구출에는 성공했다.
까다로운 능력을 가지고 있던 특급 수배범도 죽였다.
이제 남은 것은 모두 함께 도망치는 것 뿐이었다.
자신을 내버려두고서 말이다.
모두가 살아남기에는 적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벨 바이어틴의 안전한 탈출을 위해서라도, 누구 하나는 시간을 끌어야만 했다.
“아가씨를 데리고 물러나라. 그리고 지원을 요청해라.”
“죽을 생각이냐?”
“걱정마라. 살아서 돌아갈테니. 지원이 빠르면 더 가능성이 올라가겠군.”
거짓투성이의 인사를 내뱉은 헤리오는 앞에 늘어선 적의 군세를 보았다.
아득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는 무수한 숫자의 살인마들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몸을 숨길 연막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인파의 살의를 혼자서 받아내었던 기억이 있던가.
마치 전쟁터에 혼자서 찾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헤리오의 항전을 응원하듯이, 무전기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꼭 살아서 오도록.”
“그렇게 하겠다.”
“벨 바이어틴을 데리고 먼저 퇴각하겠다.”
“아가씨를 잘 부탁한다.”
그 말을 남기고서 헤리오는 자신의 무전기를 부숴버렸다.
더 이상의 대화는 미련만을 남길 뿐이다.
그는 이미 확고하게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막아선다면 깨부순다.
몇번이고 일어서, 뚫고 지나간다.
그게 자신이 배운 기사도였다.
“진짜 더럽게 많군.”
이곳이 자신이 죽을 전장인가.
아득한 숫자의 적을 바라보던 헤리오가 바이저를 내렸다.
사람의 생각은 고민을 낳고, 사람의 고민은 의문을 낳는다.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무엇을 위해 강해졌는가.
수수께끼 투성이의 정보상인이 증명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은 자신이 필요한 자리가 있다.
그럼 지금의 자신이 필요한 자리는 어디인가.
“…….”
고민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필요한 자리는 이곳이었다.
가장 거대한 불합리에 대항하기 위하여, 자신은 강해지는 것을 허락받았다.
이제는 그 힘을 휘두를 차례다.
헤리오는 이 전장의 모두에게 들리도록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덤벼라!”
누구나 마음속에 검 한자루를 품고 살아간다.
그 검은 가장 불합리한 순간에야 비로소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고는 한다.
그것은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자신의 신념은 과연 어디까지 벨 수 있을까.
이제부터, 그것을 시험해볼 생각이었다.
“나는 섬광기사 헤리오 나이트라인.”
“…….”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기사를 참칭하겠다!”
적들에게 인사를 마친 헤리오가 웃으며 검을 들어올렸다.
파직. 파지직.
선명한 뇌광이 그의 검을 휘감기 시작했다.
역경이 오면 깨부순다.
악당이 오면 쳐죽인다.
약자를 지키며 강자에게 맞선다.
그것이 언제나 자신이 선망해오던 기사였다.
세상 모두가 그것을 부정한다고 할지라도.
자신만은 올바른 곳에 서서 모두를 지켜내야만 했다.
“쏴라! 쏴!”
“하나밖에 없잖아! 뭐하는거야!”
“빨리 녀석을 죽여!”
총탄이 빗발친다.
세상은 그들을 군단이라 부른다.
그럼에도, 자신은 혼자서 군단에 맞서야만 한다.
지켜야 할 이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니까 이들에게 쉽게 죽어줄 수는 없었다.
“전투보조시스템. 방어모드 기동.”
쾅! 콰앙!
군단의 총탄과 포가 빗발친다.
앞에 세워진 반투명한 방어벽이 그것을 막아내지만, 막아낼 수 있는 물리력에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상대는 군단이라 칭하는 숫자이지 않은가.
이전부터 한계에 직면해있던 방어벽이 부서지며, 집중포화가 헤리오에게 쏟아져내렸다.
카앙! 캉!
자그마한 탄환들이 갑옷에 부딪혀 찌그러진다.
강력한 일부는 갑옷을 뚫고 헤리오의 몸속에 틀어박혔다.
아프다. 죽을 것 같다.
그럼에도 물러설 수는 없다.
그 자신이 여기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도망치는 이들만은 지켜내야만 했다.
“[체인 라이트닝]!”
번개의 사슬이 주변을 휘감는다.
파지지직!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뇌전이 몇몇 적들을 침묵시켰다.
그러나 군단 전체에 비하면 적은 숫자였다.
“미친 새끼가! 빨리 저걸 죽여! [인페르노]!”
“쉽지는 않을거다.”
몸에 전해져오는 통증을 털어내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사람은, 정말로 죽을 것 같이 아픈 순간에도, 미칠 각오를 한다면 웃을 수 있었다.
모든 고통을 태워내려는 기세로 그는 미소를 지었다.
“막아선다면 깨부순다.”
콰아아아앙!
빛의 일격이 군단에 내려꽂혔다.
선두를 막아내고 있던 병사들이 쓸려나가며 공간이 비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몰려온 다른 군단병들이 자리를 메꾸었다.
“기사는 언제라도… 정면승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무엇을.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무엇을 위해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 길을 선택했는가.
몇번을 자신에게 묻더라도 역시 이유는 하나였다.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
그것은 자신의 의지로 죽을 자리를 고르기 위해서였다.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의 마지막을 장식할지 선택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자신은 가장 고귀한 방법으로 죽으리라고 결심했다.
“제발 뒤져 이새끼야!”
투두두두두!
수많은 포화가 헤리오의 몸을 스쳐지나간다.
검을 쥐고 있던 왼팔이 걸레짝이 되어 날아간다.
앞으로 전진하던 육체가 저항하지 못하고 뒤로 밀려난다.
쿵! 균형을 잃어버린 갑옷이 앞으로 허물어졌다.
그럼에도 헤리오는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을 이용해 앞으로 기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역시, 아직은 전진을 멈출 수 없었다.
조금은 더 싸울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자신을 불태우는 불씨가 꺼지기 전까지, 그는 결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체인 라이트닝]!”
검을 휘두를 손은 없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아직 살아있었다.
검이 없으면 마법을 사용해서 맞서면 되는 것이다.
콰지지지직!
이전보다 강해진 전류가 주변의 적들을 집어삼켰다.
“[체인… 라이트닝]!”
콰과과과광!
한층 더 강해진 벼락이 내리쳤다.
벼락에 휩쓸린 유령군단의 병사들이 행동불능에 빠졌다.
아직. 아직이었다.
아직은 조금 더 싸울 수 있었다.
헤리오는 이를 악물고 마법을 사용했다.
“[체인, 라이트닝]!”
콰아앙! 콰앙!
사방에 폭음이 울려퍼졌다.
헤리오의 마법에 휩쓸린 탄약들이 터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유령군단의 공세가 한층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헤리오에게 다가오던 군단병들의 숫자도 현저하게 적어진 채였다.
그래도 헤리오는 이를 악물고 숨을 가다듬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라도 더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야만 했다.
자신에게 다음 기회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있기에.
“아직… 아직이다……!”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 소리.
그런 헤리오의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일평생 바라왔던 것.
누군가 그것을 헤리오의 귓가에 속삭이기 시작한 것이다.
[오랜 맹약에 따라 너에게 사명을 부여한다.]
[고결한 기사가 되어라.]
그것은 확신이었다.
평생 믿어왔던 신념의 보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의였다.
부러질지언정 엇나가지는 않는 일말의 정의였다.
후읍. 헤리오는 커다랗게 숨을 들이켰다.
폐가 부풀어지도록. 누구보다 커다란 소리를 낼 수 있도록.
그렇게 모아놓은 커다란 숨결로, 헤리오는 세상 전체에 들리도록 외쳤다.
“[스펠 오버로드 : 체인 라이트닝]!”
콰릉!
콰르르르르릉!
천벌. 그런 이름으로밖에 부를 수 없는 공격.
하늘에서 내려꽂히는 각양각색의 뇌격이 지상을 휩쓸었다.
귓가를 가득 채운 소음에 헤리오의 귀가 마비되기 시작했다.
전장의 포성은 전부 묻혀버린 채로, 벼락의 잔재만이 그의 귓가를 가득채운다.
그럼에도 그는 행복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귓가를 채우는 천둥소리가 감미로운 음악처럼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체인…] 쿨럭!”
번개를 부르던 목소리에 피가 섞여나왔다.
한쪽 시야는 피에 가려 보이지 않고, 나머지 하나마저도 붉게 달아오른 채였다.
피를 닦아내고 싶어도 그의 손이 멀쩡하지 않았다.
아프다. 고통스럽다. 죽을 것만 같다.
그럼에도 헤리오 나이트라인은 웃었다.
자신의 인생에 그토록 찾아헤매던 정답을 찾았으니까.
무엇을 위해 강해졌는가.
누군가 그에게 물어본다면 이제는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체인 라이트닝]……!”
이 순간에 기사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
자신은 이 세계에 태어났노라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