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 여름같은 봄 (2)
* * *
여행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약간의 번거로움과, 약간의 낭만, 그리고 약간의 도전으로 쌓아가는 추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노력하지 않으면 추억이 되지 않는다.
번거롭지 않으면 낭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약간의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시넬과 검성을 잡아오는데에 성공했다.
“직원이라면 일을 해야겠지.”
양쪽 손에 하나씩 목덜미를 잡힌 시넬과 검성이 축 늘어져있었다.
이곳에 오자마자 바다로 뛰쳐나가려던 그녀들을 내가 저지한 것이다.
아직 우리에게는 처리해야하는 일들이 남아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놀고 먹고 하는 것을 봐줄만한 아량은 나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내 손에 붙들려있던 검성은 무언가 할말이 있는 모양인지,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있잖아, 퍼시발. 오늘 우리 놀러온거 아니야?”
“그래서 뭐가 문제지?”
“놀러왔는데 일하는건 조금 심하잖아.”
가만히 들어보면 나름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여기에 쉬러온 것이지, 어디까지고 일을 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지 않은가.
워크샵이 아니라 휴가라는게 검성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가방에는 분류를 기다리는 물건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특히나 바베큐를 위해 준비한 음식들은 이대로 놔두면 처치하기 곤란해질 터였다.
그들을 방치해두고 어디를 간다는 말인가.
여행에는 반드시 귀찮음이 뒤따라오기 마련이었다.
“당연히 나도 놀러왔다.”
“…….”
“하지만 사장이라는 이유로 권위에만 기대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겠지.”
“맞아. 가뜩이나 월급도 별로 안주는데.”
“아무튼… 그런 이유로 공평한 방식을 채택하도록 하겠다.”
사실 어느정도 일을 분담해서 하는게 최선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곳의 어디에서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쉬고 싶어하는 사람은 다수지만,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짐을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
책임감에 나 혼자 전부 짊어지는 것도 사양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가장 공평한 게임을 제안하기로 했다.
“공평한 방식?”
“가위바위보로 정하도록 하지.”
“……가위바위보인가요.”
흔히 말하는 가위바위보로 일감 몰아주기다.
이 방법의 합리성은 역사적으로도 진작에 증명된 바가 있다.
무엇보다 하나만 일하고 나머지는 쉰다는게 가장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겠는가.
가위바위보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허공에서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진짜, 이기기만 하면 되는거지?”
“그래. 지는 사람이 전부 정리하게 될거다.”
“짐만 정리하는거야?”
“식사도 어느정도는 준비하는 편이 좋겠지.”
“알겠어. 그런거라면 얼마든지. 나, 예전부터 이런 게임은 잘했거든.”
결론을 내린 나는 들고 있던 시넬과 검성을 내려놓았다.
검성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이며 손목을 풀었다.
검성이 얼마나 운에 자신이 있는지는 몰라도, 나는 가위바위보에 나름 조예가 있는 사람이었다.
시넬의 경우에는 바닥을 기어다니던 까망이를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까망이의 앞발을 손으로 붙잡으며 말했다.
“저는 까망이가 대신 내줄거에요.”
“……일도 까망이가 대신 하는거냐?”
“일은 제가 할게요.”
“그렇다면야 상관없겠지.”
까망이의 발바닥을 본 나는 피식 웃었다.
누가 보아도 구조상 보자기밖에 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가위만 내더라도 시넬이 걸리는 것은 확정이었다.
저마다의 준비를 마치며 돌아가던 시선이 이번에는 스피넬에게로 향했다.
모두가 일제히 그녀를 바라보자, 스피넬은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도 끼는거야?”
원래라면 짐을 운반해준 스피넬에게 정리까지 시킬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경기는 가위만 내더라도 이기는 승부가 아니던가.
어렵지 않은 승부라면 참가해도 크게 미안한 기분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없나?”
“그렇게까지 나오면 어쩔 수 없네.”
스피넬을 바라보며 간단한 도발을 건네자, 스피넬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승부를 받아들였다.
스피넬까지 참가를 선언하며 모두가 가위바위보 내기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승부를 가를 가위바위보 한 판 뿐이었다.
허공에서 각자의 시선이 교차했다.
서로가 서로의 주먹을 바라보고, 이내 시넬이 쥐고 있는 까망이의 앞발로 향했다.
“……그거 제대로 낼 수 있는거 맞아?”
“까망이는 가위바위보도 잘해요.”
“네가 그렇다면야 뭐… 빨리 시작하자.”
시넬의 대답을 들은 스피넬은 더 이상 이견을 꺼내지 않았다.
서로가 주먹을 쥐고 자신의 앞을 바라보았다.
승부의 운을 띄우는 것은 내 몫이었다.
나는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은 채, 가위바위보를 외치며 앞으로 가위를 내밀었다.
“가위, 바위… 보!”
허공에서 서로의 손이 교차했다.
내가 내민 가위가 하나.
스피넬이 내민 주먹이 하나.
검성이 쥐고 있던 주먹이 또 하나.
마지막으로 시넬이 잡고 있던 까망이의 앞발이 엉성하게 주먹을 쥐었다.
“…….”
나는 허탈한 기분이 되어 까망이를 바라보았다.
저런 발로 어떻게 주먹이 나온단 말인가.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이것이 현실이었다.
가위바위보에서 패배한 것은 자신의 가위였다.
“냐아.”
“사장님이 졌네요.”
시넬은 까망이를 쓰다듬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미소를 지으며 재빠르게 현장을 이탈하는 것은 검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검성은 근처에 놓여있던 가방 하나를 집어들고서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나는 수영복을 갈아입으러 가야겠네.”
“그런가요. 저도 준비해야겠네요.”
모두가 떠나버린 텅 빈 거실.
나는 멍하니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설마하니 고양이에게 가위바위보를 지게 될 줄이야.
역시 사람은 방심하면 안되는 모양이었다.
* * * * * *
별장에 들어온지 한시간.
늘어져있던 가방은 대부분 정리가 되었고, 오후에 사용할 식재료들 역시 따로 분류해두었다.
바닥에 쌓여있던 먼지들 역시 청소를 한차례 마친 채였다.
밖에 바베큐를 위한 불판까지 세워두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준비라고 할만한 것은 어지간하면 전부 끝마친 상태였다.
물론 내가 정리를 한다고 해서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그걸 위한 가위바위보였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허탈한 기분이 가득했으나, 시간이 지나자 사고방식 역시 상황에 맞추어졌다.
하루쯤이야 쉬는 부하들을 위해 노력하는 사장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양파를 잘깔줄이야.”
더군다나 뜻밖의 재능까지 발견한 모습이었다.
평소에는 죄다 시켜먹었기 때문에 요리를 할만한 상황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에서야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양파까기의 천재였다.
어디에 써먹을까는 걱정스럽긴 하지만, 재능이라는게 있어서 나쁠게 없지 않은가.
껍질을 벗겨낸 양파를 큼직하게 잘라내어 꼬치에 끼고 있으면, 계단을 지나가던 시넬이 나를 보고서 멈춰섰다.
“바베큐 준비인가요.”
하늘거리는 레이스가 달린 푸른색의 비키니.
머리에 착용하고 있는 깔맞춤의 스노클.
거기에 허벅지에 매고 있는 언밸런스한 단검까지.
수영복 차림의 시넬이 멀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나는 수영복을 입은 시넬의 모습을 잠시 훑어보다가, 허벅지에 매달린 단검을 보면서 말했다.
“……단검은 왜 들고 있지?”
“세상은 위험해요.”
“위험한건 네 머릿속이다. 단검은 내려놓고 나가.”
“그런가요.”
철컥. 시넬은 아쉬움을 토로하며 홀스터의 버클을 완전히 풀었다.
지지대를 잃어버린 묵직한 끈이 축 늘어졌다.
시넬은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홀스터를 낚아채고서, 근처에 있던 문 손잡이에 그것을 걸어놓았다.
시넬의 홀스터는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며 문 손잡이에 매달렸다.
보면 볼수록 기가막힌 위치선정이었다.
그렇게 단검을 빼어놓은 시넬은 다시 나에게로 되돌아왔다.
“다시 벗었어요.”
“……그래.”
“꼬치를 만들고 계신건가요.”
“뭐, 처음부터 바베큐를 계획하고 왔으니.”
나는 시넬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비어있는 꼬치에 파와 양파, 고기 덩어리를 번갈아서 꽂아놓았다.
각양각색의 재료가 어우러지자 제법 색감이 예쁜 꼬치가 완성되었다.
사실 다양한 색을 원한다면 파프리카 같은 것들을 꽂아놔도 괜찮았겠지만, 그런 부류의 채소들은 내가 사양이었다.
편식과는 별개로 음식에는 기호가 있지 않던가.
뼈가 있는 치킨보다 순살 치킨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바빠보이네요.”
“도와줄 생각이냐?”
“응원할게요.”
“그렇군.”
그럼 그렇지.
사실 별 기대는 안하고 있었다.
다시 분주하게 손을 움직여 꼬치를 하나씩 끼워넣었다.
만드는 사람은 하나지만 먹는 사람은 넷이다.
인원수에 맞게 양을 맞추려면 제법 속도를 내서 완성할 필요가 있었다.
시넬은 꼬치를 만드는 내 모습을 구경하다가, 이내 창문을 바라보며 스피넬과 검성의 모습을 확인했다.
“안보고있나요.”
“눈치 볼만한 이유가 있나? 꼬치는 아직 안익었을텐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요.”
“무슨 이유지?”
검성과 스피넬은 각자 자신의 일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이곳을 바라보는 시선이 없는 것을 확인한 시넬이 나를 바라보았다.
톡. 시넬의 양손이 내 얼굴을 살짝 잡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했다.
짧은 순간. 부드러운 감촉이 뺨에 맞닿았다.
낯설지 않은 익숙한 체온이 산뜻하게 뺨을 맴돌았다.
그 직후, 시넬의 얼굴이 금방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비밀이에요.”
그렇게 말한 시넬은 곧장 별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시넬이 빠져나간 문을 지켜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다시 꼬치를 꽂아넣었다.
비밀스러운 이유라.
둘만의 비밀이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