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 천변만화 (5)
* * *
불어오는 바람과 동체의 움직임 때문인지, 어셔는 균형을 잡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명확했다.
어셔는 한쪽 손으로 몸을 고정하고서, 다른 한쪽의 손을 드래곤의 날개죽지에 뻗었다.
매끈한 파충류의 피막을 어셔의 손바닥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래를 향해 미끄러지던 어셔의 손은 날개의 어느 부근에서 완전히 멈춰섰다.
어셔는 그 부분을 단단히 붙잡은 채, 눈을 부릅뜨고 입을 열었다.
“[블링크]!”
지이이이잉——.
공간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어셔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어셔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를 대신해 커다란 구멍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비행중이던 드래곤의 날개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날개에 구멍이 뚫려버린 드래곤이 어떻게 될지는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상공에 있던 드래곤이 커다랗게 울부짖었다.
크르르르르르르!!
고통에 젖은 포효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피막에 구멍이 뚫린 드래곤의 몸이 공중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전과 같이 균형감있는 비행은 할 수 없다.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이제 바닥으로 추락할 일뿐이었다.
방향을 잃어버린 채로 빙글빙글 돌던 드래곤의 동체가 지상을 향해 낙하했다.
쿠우웅!
묵직한 충돌음과 함께 거대한 진동이 지면에 울려퍼졌다.
크아아아아악!
날개를 잃은 드래곤이 완전히 추락했다.
더 이상 기다리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나는 곧장 건물에서 벗어나 드래곤을 향해 달려나갔다.
물론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넘버 세븐을 향해 지시를 내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돌입한다.”
“알겠습니다, 전령.”
타다다다다닥.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나란히 울려퍼졌다.
나는 오늘을 위해 가져온 첨단 무기를 어깨에서 풀어 아래로 내렸다.
내가 꺼낸 무기는 다름아닌 코끼리를 상대로도 통한다는 마취총이었다.
어차피 저 드래곤 몸체를 상대로는 무슨 공격을 하든 유효한 효과는 없다.
그나마 이게 효과가 있길 바라며 가져온 물건이었다.
“이 버러지같은 놈들이……!”
우리를 발견한 드래곤이 분노를 터뜨리며 숨을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전면에 브레스를 쏴 우리를 구워버릴 모양이었다.
나는 곧장 녀석의 콧구멍을 조준해, 들고 있던 마취총을 쏘아버렸다.
피슉.
경쾌한 파공음과 함께 날아간 마취총이 녀석의 콧구멍 앞에 틀어박혔다.
“실패했군.”
드래곤의 비늘은 상당히 두꺼운 편이다.
저런식으로 박혀봤자 약효가 들 가능성은 없었다.
대신에 브레스를 견제하는데는 효과가 있던 모양인지, 녀석은 콧김으로 약한 불꽃을 쏘아내 주사를 날려버렸다.
짧은 콧김과 함께 날아간 주사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주사를 날려버린 드래곤이 몸체를 일으키며 꼬리를 거세게 휘둘렀다.
콰앙! 쾅!
막대한 질량을 가진 채찍의 움직임에, 주변의 건물들이 타격을 입으며 외벽이 갈라졌다.
크르르르르……!
아쉽게도 꼬리를 휘두르는 드래곤에게 다가갈 방법은 없었다.
단순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인 공격이다.
우리가 저기에 휘말렸다간 순식간에 곤죽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대신에 이번에는 넘버 세븐이 앞으로 나섰다.
정면을 향해 손바닥을 펼친 넘버 세븐이 마법을 사용했다.
“[버닝 핸즈]!”
화르륵.
불꽃의 손길이 앞으로 뻗어나가며 드래곤의 안면을 타격했다.
두터운 비늘 탓에 커다란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불꽃의 손바닥으로 뺨을 두드려맞은 녀석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 마지막을 장식하려는 듯이, 어셔가 드래곤의 머리 위로 전이했다.
“요란하게도 날뛰는군.”
“너무 멀리 떨어지진 말도록.”
어셔의 손바닥이 드래곤의 눈두덩이를 강하게 붙들었다.
두터운 비늘탓에 피해가 가진 않았지만, 드래곤은 불안한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어셔가 날개에 붙었을 때 날개에 구멍이 뚫렸다.
그렇다면 눈에 붙었을 때는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
제아무리 변신술사라고 하더라도 어느정도 예상은 하고 있을 것이었다.
“[블링크].”
크아아아아아아악!!
공간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차례 어셔가 모습을 감추었다.
흉측하게 패여나간 상처부위에서 피가 터져나온다.
콰앙! 쾅! 콰아앙!
드래곤은 눈에서 전해지는 통증을 털어내려는 듯이, 여러차례 거칠게 몸부림을 쳤다.
나와 넘버 세븐은 휘말리지 않도록 몇걸음 뒤로 물러서 드래곤을 지켜보았다.
“[버닝 핸즈]!”
크아악!
아니, 지켜본 것은 나뿐이었다.
넘버 세븐은 드래곤의 상처부위를 향해 계속해서 불꽃의 손길을 날리고 있었다.
아이의 상처를 쓰다듬는 어머니의 손길처럼, 드래곤의 상처를 따뜻하게 쓰다듬는 버닝 핸즈의 손길에 드래곤이 몸을 비틀었다.
드래곤이라고 해도 통각은 존재하는 법이다.
패여나간 상처에 대놓고 불꽃을 들이부었으니, 맨정신으로 버틸 수 있을리가 없었다.
“끄윽… 으으으으.”
몇분동안이나 몸서리치던 드래곤의 주변에서 마력의 폭풍이 한차례 몰아쳤다.
슬슬 마력이 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다른 수단을 선택하기 위함인지는 모른다.
다만 미친듯이 발악하던 드래곤의 몸체가 어느순간 그 크기를 잃고 사그라들었다.
드래곤이 사라진 자리에서 나타난 것은 피투성이의 한쪽 눈을 손으로 가리고 있는 남자였다.
특급 수배범, 변신술사.
그가 이제서야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봐주기 힘든 몰골이군.”
“이, 개같은 자식들……. 전부, 전부 죽여버리겠다.”
“그런 부실한 몸으로 괜찮겠나?”
내가 손에 들린 마취총을 흔들며 도발하자, 변신술사의 하나남은 눈이 일그러졌다.
그는 살의에 가득찬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익숙한 눈동자였다.
이 도시에 살기 시작한 이래로, 나는 저런 눈을 한 사람을 많이 만나보았다.
어떤 때는 나 혼자서 수많은 사람들의 살의를 받아내었던 적도 존재했다.
그러니 이제는 저런 눈빛따위, 나에게 있어서 우습지도 않은 것이었다.
“네놈 주둥이부터 찢어주지. [폴리모프]!”
변신술사가 나를 향해 달려들며 곧장 마법을 사용했다.
거대한 마력이 한차례 그의 몸을 감싸며, 이내 그 너머에서 트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근육질에 덮힌 트롤의 몸체는 전신에서 뜨거운 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트롤의 몸에 나있던 표면에서 기포가 솟아오르며, 이내 전신의 상처가 빠르게 아물기 시작했다.
녀석이 상처를 치료하게 둘 생각은 없었다.
나는 눈앞의 트롤을 향해 다시 마취총을 겨누었다.
“멍청한 짓을 하는군.”
쿵! 쿠웅! 쿵!
마취총을 겨누고 있는 나를 향해 트롤이 일직선으로 내달려온다.
하지만 트롤로 변신한 것은 녀석의 실착이었다.
트롤의 가죽은 드래곤의 비늘과 다르게, 마취총이 박히지 않을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나는 자신을 노리고 달려드는 트롤을 향해 마취총을 발사했다.
피슉.
손에서 전해져오는 반탄감과 함께 날카로운 바늘이 트롤의 몸을 꿰뚫었다.
“크, 크아아……?”
나를 향해 다가오던 트롤의 몸이 기울어졌다.
쿵! 묵직한 진동과 함께 트롤의 몸이 바닥에 쳐박혔다.
왼쪽으로 넘어진 트롤은 자리에서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마취약의 효과가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녀석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을 경계하면서, 마취총을 들고 녀석을 향해 다가갔다.
넘버 세븐은 나보다 한박자 더 빠르게 걸어갔으며, 어셔 역시 쓰러진 트롤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잠든 모양인데요?”
넘버 세븐이 잠들어있는 트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의 말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잠들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코끼리도 잠을 재운다는 마취총이다.
트롤이라고 해서 예외일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숨을 쉬는지도 확인해보겠습니다.”
앞장서있던 넘버 세븐이 손을 뻗어 트롤의 동체를 만져보았다.
무심한 손길이 트롤의 흉부를 툭툭 두드렸다.
뒤따라오던 어셔는 넘버 세븐의 행동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심해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미동도 하지 않는걸 보니, 완전히 잠든게 틀림없습니다.”
넘버 세븐은 확신에 가득차서 이야기했다.
그가 그렇게 말하고 나를 향해 뒤돌아보는 순간.
트롤의 몸에서 막대한 양의 증기가 뿜어져나왔다.
트롤의 신체가 회복하면서 보이는 증상이었다.
그와 동시에, 내 귓가에도 변신술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멍청한 녀석.”
변신술사는 아직 잠들지 않은 채였다.
트롤의 피가 수면상태마저 회복시키는 모양이었다.
그에 나는 넘버 세븐을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넘버 세븐! 뒤로 빠져라!”
“네……?”
“[스펠 오버로드 : 폴리모프].”
콰득.
순식간에 거대한 파충류의 주둥이가 허공에서 튀어나오며, 넘버 세븐의 몸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쿠구구구구궁——.
붉은 색의 드래곤이 그 거체를 일으키자, 근처에 있던 건물들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넘버 세븐을 집어삼킨 드래곤이 두 눈을 번뜩이며 자리에서 움직였다.
아까와는 다르게 모든 상처가 회복되어있는 모습이었다.
“넘버 세븐! 듣고 있나?”
“쯧. 그렇게 경고했건만, 결국에는 이런 짓을 벌여주는군.”
사라진 넘버 세븐의 모습에 어셔가 혀를 찼다.
상처가 아문 드래곤이 곧장 날개를 펄럭였다.
날갯짓 한번에 어마어마한 바람이 휘몰아치며, 드래곤의 거체가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쳐있던 눈에 이어 날개까지 완벽하게 회복한 것이다.
드래곤의 시선이 지상에 있는 우리를 훑어보았다.
상공으로 떠오른 드래곤의 몸은 아까처럼 마취총으로 공격하기에는 너무나도 멀리 있었다.
“멍청한 녀석들. 브레스로 전부 불태워주마.”
“어떻게 할거냐, 전령. 다시 블링크를 쓰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다.”
어셔의 말대로였다.
우리의 공격이 드래곤에게 닿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상에서 녀석을 상대해야만 했다.
저런식으로 고도가 높아지는 경우는 어셔조차도 쉽사리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미 한번 기습에 당한 녀석이 저공비행을 시도할리는 만무했다.
허공에 떠오른 변신술사를 바라본 내 입에서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렇게 기회를 놓쳐야만 하는건가.”
녀석이 이대로 도망갔다가는, 넘버 세븐을 되살리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변신술사와의 싸움에서 집행자를 잃어야만 한다니.
나로서는 상정조차도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하늘에 떠오른 드래곤은 브레스를 내뱉기 위해 숨을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아쉬움과 분노가 뒤섞여 넘버 세븐의 흔적을 바라보고 있으면, 하늘을 올려다보던 어셔가 입을 열었다.
“움직임이 이상하군.”
“……?”
드래곤을 지켜본 어셔가 꺼낸 것은 의외의 이야기였다.
그에 나는 고개를 들어 어셔를 바라보았다.
어셔가 하늘에 떠있는 드래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녀석이 비틀거리고 있다.”
“……정말이군.”
“조심해라. 이쪽으로 추락할거다.”
비행중이던 드래곤은 비틀거리며 고도를 낮추었다.
브레스를 쏘기 위해 삼키고있던 숨결도 다시 내뱉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날아오르던 녀석이 다시 추락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평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드래곤의 모습에, 나와 어셔는 몇걸음 뒤로 물러났다.
끊임없이 방향을 바꾸며 발악하던 드래곤의 몸이 지상에 추락하는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쿠우우우웅!
거대한 충격과 함께 몇채인가 건물이 파손되었다.
자욱하게 낀 먼지의 폭풍이 한차례 주변에 몰아치고, 그 직후 강한 바람과 함께 완전히 가라앉았다.
“녀석에게 이상이 생긴 것처럼 보인다.”
“방금 전처럼 함정일 가능성도 있지 않나?”
“녀석의 입장에선 굳이 내려올 필요가 없을텐데. 설마 두번이나 그런 짓을 벌이지는 않겠지.”
나와 어셔는 갑작스러운 움직임을 경계하면서 녀석의 머리를 향해 다가갔다.
멀찍이 떨어져있던 우리가 드래곤에게 가까이 다가간 순간.
우리는 예상치 못한 기괴한 광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초점이 풀린 눈동자와 함께, 드래곤이 입을 벌리고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드래곤의 입에서 사람 하나가 비틀거리며 밖으로 걸어나왔다.
“으으윽……. 죽는 줄로만 알았네.”
“넘버 세븐.”
“아, 전령! 바로 앞에 있었군요!”
“다행히 살아있었군.”
안에서 나온 것은 너덜너덜해진 넘버 세븐이었다.
특제 방어복이 가진 방열효과와 내구성이 장점으로 작용한 것일까.
넘버 세븐의 옷이 심하게 망가지기는 했지만, 당장 죽을만한 모습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혹시나 심하게 다친곳이 있지 않을까 싶어 나는 넘버 세븐을 훑어보았다.
그러자 넘버 세븐은 자신있게 주먹을 쥐며 나에게 말했다.
“전령! 제가 해치웠습니다.”
갑작스럽게 드래곤이 다시 추락했다.
그리고 그 계기는 아마 넘버 세븐에게 있었을 것이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드래곤이 다시 지상을 향해 추락한 것일까.
나는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넘버세븐을 보며 물었다.
“……뭘 한거냐.”
“네?”
“안에서 무슨 짓을 벌인거냐고 물었다.”
“아, 이걸 썼습니다!”
환하게 웃은 넘버 세븐이 주머니에서 비닐봉지 하나를 들어올렸다.
넘버 세븐의 손에 들려있는 비닐 봉지에는 가느다란 바늘들이 여럿 모여있었다.
그리고 그 바늘들의 끝에는 푸른 액체가 모여있었다.
바늘의 출처를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난번의 싸움에서 보호복에 틀어박혀있던 것을, 넘버 세븐이 뽑아내었던 물건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어떤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
알프레드가 가지고 있던 신경독.
넘버 세븐은 그걸 이용해 변신술사를 쓰러뜨렸다.
그것도 가장 내구성이 약한 드래곤의 입안에 하나씩 꽂아넣어서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