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3년 전 출가시킨 동생이 돌아왔다.
흑발 적안의 미남자, 체이트 폴린.
피가 섞인 친동생은 아니다.
그러나 길바닥에 널브러진 걸 주워다 5년을 거둬 먹였으니 실상 가족보다 끈끈한 사이긴 했다.
“누님,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눈 두 짝을 맞추자고 고개를 드니 목이 다 뻐근하다. 밖에서 나 몰래 무슨 맛있는 걸 그리 처먹었는지 조그맣던 녀석이 거인처럼 훌쩍 컸다.
“너…… 왜 왔니?”
“3년 만의 재회인데 첫 인사가 고작 그런 겁니까? 섭섭합니다, 누님.”
“그게 아니라, 너 내가 분명히…….”
‘너도 이제 좋은 짝 만나서 가정 꾸릴 나이가 되었지. 자식 보기 전까진 돌아오지 말렴. 자, 보따리는 내가 다 싸 놨으니 넌 몸만 움직이면 돼. 우선은 내 방에서 썩 꺼지는 일부터 실행해 볼까?’
“……그렇게 얘기했잖아.”
“하하, 그거 다 농 아니셨습니까?”
농은 무슨. 순도 100% 진심이었는데.
“결혼은?”
“제가 미쳤다고 누님을 두고.”
“맞네. 미치긴 미쳤네.”
나는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실은 저 화려한 면상―줄여서 화상―에 당장 죽빵을 갈기고 싶은 충동을 눌러 참는 것만으로 이미 한계다.
“왜 안 했어? ……아니, 결혼은 안 해도 애는 만들어 왔어야지.”
침통하게 말하자 녀석이 기가 막힌단 얼굴을 했다.
‘그래, 너는 이 일로 내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가는지 모르겠지.’
저놈은 올해 안으로 자식을 봐야 했다.
하필이면 저 되바라진 녀석이 내가 빙의한 로맨스 판타지 소설 〈성녀님은 흑막을 찢어〉의 여주이자 훗날 세상을 구원할 성녀, 코렐리아의 친아버지였으므로.
“올해…… 얼마나 남았지?”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았다.
2월 20일.
……열 달?
자식 하나 보는 데 드는 시간이며 노력이 못 해도 아홉 달이다.
즉, 한 달 안으로는 거사를 치러야 그나마 가망이 있다는 건데.
전 연령 로판 사회에서는 기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러고 있을 여유가 없어…….”
“누님? 뭘 그리 중얼거리십니까.”
“야, 너 당장 나가.”
입씨름이나 하며 시간 낭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난 결론을 내자마자 손으로 문밖을 가리켰다.
체이트가 실없이 웃었다.
“또 쫓아내는 겁니까? 정말 너무하시네.”
“너무하고 자시고, 빨리 나가서 첫사랑의 열병을 씨게 앓고 눈에 콩깍지를 매단 채 속전속결로 결혼하렴.”
“누님.”
물론 쌍방의 결과에 모든 책임을 다한다는 전제하에 성인인 두 남녀가 호감을 느끼며 어쩌고저쩌고…….
티끌 같은 양심을 단전에서부터 끌어모아 일장 연설을 내뱉자 녀석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이거 징그럽게 왜 이래?
“케이크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포크 사용법부터 이르시는 그 무의미한 잔소리, 정말 그리웠습니다.”
“내가 모르는 새에 주둥이가 한층 유연해졌구나.”
체이트가 다부진 상체를 펴고 앞으로 다가왔다.
“저 안 나갈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식 올릴래? 내가 좋은 여성분으로 잘 물색해 볼게.”
“제 결혼에 왜 그리 관심이 많으십니까?”
그야 18년 후에 세상이 가볍게 망할 예정이고, 네 딸이 미래의 대재앙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니까.
……라고 말한들 네가 알아먹겠냐.
기대도 안 한다, 이 불효막심한 놈.
“넌 내가 지금 무슨 심정인지 꿈에도 모를걸.”
“그건 누님도 마찬가지죠. 꿈에도 모르실 겁니다. 제가 누님께 그런 이야길 들을 때마다 얼마나 기가 막히고…….”
주홍빛에 가깝던 맑은 눈이 일순 어둡게 가라앉았다.
“화가 나는지.”
“…….”
지척으로 다가온 놈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두 손을 모았다.
“내 소원이야.”
“…….”
“제발, 부탁이다.”
나는 간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세상이 망하면 애써 일궈 놓은 내 카페도 끝장이었다.
하필이면 명줄 짧은 엑스트라의 몸에 빙의해서 그간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던가.
돌이켜 보면 눈물이 앞을 가리다 못해 울화가 치민다.
‘인생사 빡세기도 하지.’
그 옛날의 고생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히자 체이트의 시선이 흔들렸다.
짜식, 차가운 척은 다 하는 주제에 의외로 눈물에는 약하단 말이야.
좋아, 이대로만 가자.
‘누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혼인을 재고해 보겠습니다’라고 얘기할 때까지 엉엉 울어 젖히는 거다.
붕어가 될 준비를 마치고 콧물 모터에 훌쩍 시동을 걸 즈음.
체이트가 말했다.
“싫습니다.”
“으응?”
“싫어요, 누님.”
그리 말하며 해죽 웃는 낯짝이 너무 얄밉게 예뻐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빈틈을 놓치지 않은 체이트가 손을 뻗어 내 뒷머리를 감싸 올렸다. 귓가로 뜨거운 숨이 훅 끼쳤다.
“저는 이대로 결혼하지 않고 누님과 평생 함께 살 겁니다.”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 말미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정히 제 아이가 보고 싶으시면, 누님께서 낳아 주시든지.”
* * *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휴먼?
상상도 못 한 체이트의 발언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정히 제 아이가 보고 싶으시면, 누님께서 낳아 주시든지.’
내가 로판 세상에 빙의해서까지 이 엄청난 대사를 듣다니.
그것도 수프 떠먹는 법부터 하나하나 일러 가며 키운 녀석의 입으로!
‘내 아를 나아도.’
실로 구시대적이지 않은가.
물론 앞뒤 정황이 다소 다르긴 하다. 그건 구닥다리 프러포즈고, 이건 그만큼 결혼하기 싫다는 체이트의 강력한 입장 표명일 테니.
‘하긴 내가 그간 체이트에게 지겹게 결혼을 강조하기는 했지.’
말이 강조지, 어린 녀석의 귀에는 강요 내지는 강박으로 들렸을지도 모른다.
새삼 지난날의 교육 방식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고 회의감이 들었다.
“그래, 그동안 내가 너무 심했지. 너도 네 나름의 인생관이 있을 텐데.”
나 홀로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말을 이었다.
“쫓아낸 것도 미안했다. 많이 당황스러웠을 거야.”
3년 전, 갓 스물이 된 녀석을 문밖으로 쫓아냈다.
짧지 않은 시간을 동고동락하며 정이 단단히 든 터라 속이 많이 상하긴 했지만, 더는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이도 적잖이 먹은 애가 무슨 캥거루 새끼처럼 내 주위만 빙빙 도는데 어쩌나.
나가서 여러 사람을 만나야 임을 보든 뽕을 따든, 애를 낳든 할 것이 아닌가.
나는 얼른 변명을 덧붙였다.
“근데 솔직히 갑자기 그런 건 아니잖아. 3년만 있겠다고 했는데 2년을 더 있었으니 장성한 너를 보는 내 마음은 얼마나 초조했겠니?”
내가 이 몸으로 열아홉이 되던 해, 열다섯의 체이트를 주웠다.
관습상 남자는 18살부터 성혼이 가능하니 그때까지만 잘 키워 보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해가 지나도 애가 안 나가는 거다.
자기가 무슨 카페의 고양이라도 되는 양 철퍼덕 눌러앉아서 하는 말이라곤 죄 헛소리뿐이었다.
‘누님께서 결혼을 안 하시는데 제가 어찌 식을 올립니까?’
‘혼인은 혼자 하는 게 아니지요. 전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뭘 기다리냐고요? 그야…… 누님께서 사내를 필요로 하실 날을 기다리지요.’
쫓아내야 했다.
쫓아낼 수밖에 없었다.
내 카페, 아니, 이 세상을 망하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너 내가 독신주의인 건 이미 알지?”
“예, 물론이죠. 제게는 그토록 가정의 중요성을 설파하시면서 정작 누님께선 사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으니까요.”
“그래. 그게 부조리하게 느껴졌을 수는 있어. 하지만 내가 결혼하지 않는 건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고, 보통 사람들은 다 결혼하고 행복하게 잘 산단다.”
머릿속에서 전생의 내가 구라 치지 말라고 속삭였지만 애써 외면했다.
“그렇다면 저는 그 보통 사람의 대열에 합류하고 싶지 않습니다.”
체이트는 참 단호했다.
“누님께서 독신을 희망하시니 저도 일평생 독신으로 살아야지요. 달리 방법이 있겠습니까?”
“…….”
누구 동생인지 고집이 쇠심줄보다 더 질기다.
문득 두통이 밀려와서 이마를 짚었다. 체이트가 얼른 내 팔을 잡아당겨 제 품에 기대게 했다.
“괜찮으십니까, 누님?”
괜찮을 리가 있겠냐.
내 한결같은 독신주의가 체이트의 인생관에 영향을 준 걸까.
그렇다면 이 세상이 망할 때 그 책임의 1할 정도는 내 몫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음, 약간 억울하네. 나도 남자 좋아한다고. 애도 좋아하고, 나름 스드메에 로망도 있었단 말이야.’
평범하게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몸이라면 진작 결혼했겠지만 말이다.
나는 독신으로 살아가야 할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소설의 필연성에 운수 더럽게 딱 걸려 버렸는데 어떻게 하라고.’
이 몸의 진짜 주인인 ‘레티시아 브링스턴’은 아이를 낳다가 죽을 운명이었다.
그것도 여주의 손에 스러질 미래의 흑막, 카히텐 대공의 첫 번째 부인으로서 말이지.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