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2화 (2/140)

2화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나는 지하철 한 귀퉁이에서 웹 소설을 읽는 게 인생의 낙인, 지극히 평범한 20대 직장인이었다.

선호 장르는 달달하고 진한 로맨스.

원래 삭막하고 피곤한 평일 아침엔 당 충전이 필수인 법이다.

그날도 평범하게 노란 앱을 켜고 하루의 시작을 도와줄 소설을 골랐다.

<성녀님은 흑막을 찢어>

로코 향기가 솔솔 피어오르는 제목에 홀린 나는 버릇처럼 전 화 결제를 마치고 정주행을 시작했다.

간만에 풋풋한 전 연령 로맨스로 속세에 더럽혀진 마음을 살뜰히 씻어 내려고 했는데 웬걸, 까 보니 남주는 없고 여주만 있었다.

세끼 밥 먹고 하는 일이라곤 여주 찬양밖에 없는 무능력한 황자를 남주라고 주장은 하는데, 내 눈에 걘 그냥 마실 나왔다가 우연찮게 중요 장면에 낀 엑스트라였다.

이럴 거면 차라리 흑막 이안 카히텐이 남주인 게 나았겠다. 그쪽은 적어도 세상을 말아먹을 만큼 대단한 성력을 지닌 능력자긴 하니까.

애석하게도 이안은 작중 나이가 너무 많았다.

‘두 번째 부인에게서 본 아들이 여주와 고작 한 살 차이였으니 말 다했지.’

결론적으로 나는 낚였고, 깨달았을 땐 이미 환불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젠장, 난 항상 이런 식이야.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꼭 한발 늦은 뒤더라.

결국 대각선 읽기 신공을 써 가며 소설을 완독했다. 다행히 키워드 낚시로 빡친 와중에도 내용은 볼만했다.

달의 신 아르키드네의 힘을 물려받은 신탁의 아이 ‘코렐리아 폴린’.

그녀는 아버지인 체이트 폴린과 함께 제국을 유랑하던 중, 사생아 황자 레오넬 헬리아스를 납치범으로부터 구해내고 그에게 청혼받는다.

하지만 코렐리아가 신탁의 해에 태어난 아이라는 걸 알게 된 아르키드네 대신전 측은 그녀를 억지로 끌고 가 자신들의 성녀로 추대한다.

“이걸 순순히 끌려가 주네. 나였으면 뒤집어엎었다.”

―라는 고구마 탄식 구간이 나오자마자 코렐리아는 진짜로 대신전을 뒤집어엎었다.

‘그래, 괜히 제목에서부터 흑막을 찢고 들어간 게 아니지.’

성깔 있는 여주 덕에 로맨스 없이도 스토리는 시원시원하게 전개되었다.

마지막에 악신과 계약을 맺고 대륙을 혼돈에 빠뜨리려는 이안의 사특한 계획을 막아낸 뒤 나온 ‘흑막 등짝 서른 대 난타 신’에서는 전철 안 사람들 몰래 주먹을 움켜쥐기도 했다.

나는 이안을 머리 까진 우리 부장으로 대체해서 상상했고, 쾌감은 배가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어라.”

지하철이 멈췄다.

순식간에 전기가 나가고 실내가 깜깜해졌다.

이내 다시 시야가 환해졌을 때.

“아가씨, 일어나세요!”

기대도 안 했던 로판 단골 대사가 고막을 때렸다.

아니, 잔 적도 없는데 어떻게 일어나요?

* * *

나름 로판 고인물이었던지라 빙의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유, 매번 늦잠이시지!’라고 잔소리를 해대는 하녀 1을 보며 나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자다 깼든 출근하다 왔든 ‘그 대사’만 치면 다라 이거지? 요즘 빙의 매너리즘 장난 아니네.

에라이, 그럼 나도 ‘다행히도 몸 주인의 기억이 남아 있는 어쩌구’다.

‘오늘…… 월급날이었는데.’

난 거울을 보며 자조했다.

‘인생 정말 한 치 앞을 모르겠네.’

왜 하필 빙의를 해도 이런 애한테 한 거야?

차라리 주인공이나 악녀 역이면 즐겨 볼 여지라도 있지.

아니면 구석에서 남모르게 잘 먹고 잘사는 조연 1이라거나.

난 소설에서 딱 한 번 언급되고 픽 죽어 버리는 단역에게 빙의했다.

‘레티시아 브링스턴.’

작중에서 서브 악역 집안 정도 되는 브링스턴 후작가의 장녀.

참고로 차녀인 셀레나 브링스턴은 훗날 제국의 황후가 된다.

셀레나는 머잖아 정부 소생 황자인 남주 레오넬의 앞길을 막는 흔한 악역 중 한 명이 될 예정이고.

이토록 소설 내 입지가 확고한 악당 집안에서 내가 맡은 역할이 과연 무엇인가 하니.

“시집을 가라고요?”

빙의하자마자 어딘가로 팔려 가기 직전이었다. 말로만 듣던 정략결혼의 희생양.

뿐인가?

“북부의 카히텐 대공에게 말이지요.”

이안 카히텐.

훅 들어오는 작중 최고 빌런의 이름에 등골이 다 시렸다.

“왜 그러느냐, 레티시아. 어제까지만 해도 좋아했잖느냐.”

브링스턴 후작이 의아한 듯 눈썹을 모았다.

좋기는 개뿔이가 좋아요. 상식적으로 정략혼이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부장님, 저는 야근도 괜찮습니다.

부장님, 저는 부장님 개그가 제일 재밌습니다.

아버지, 꼴랑 열일곱에 결혼이라니 정말 행복해요.

너무 행복한 나머지 그만 빙의당하겠는걸요?

‘……그런 거 다 누이 좋고 매부 좋자고 하는 헛소리 아닙니까.’

나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망했다.’

상황 파악도 덜 된 마당에 북부로 시집갈 팔자라니.

그것도 신체 나이 고작 열일곱에 식을 올리고, 한 살 연상의 흑막과 같은 침대를 써야 한다니!

뭐, 흑막에게 시집간다고 당장에 죽는 건 아니니 그건 그렇다 쳐.

문제는 따로 있었다.

소설 속에서 레티시아가 언급된 유일한 장면.

그 장면의 모든 묘사는 레티시아의 죽음을 필연처럼 내보이고 있었다.

이안은 죽어 가는 제 아내를 권태로운 낯으로 내려다보았다. 온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시선이었다.

그저 예상치 못한 초상을 미리 비관하며, 동시에 재혼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복중 아이마저 죽어 버리다니. 이러면 꼼짝없이 새장가를 들 수밖에 없잖은가.

의사는 본디 대공비의 자궁 자체가 자식을 잉태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그녀는 누구와 혼인하고 임신하든, 종내 이렇게 죽을 운명이었던 거다.

“시간 낭비를 했군.”

그가 무심하게 던진 한마디에 산파가 몸을 움찔거렸다. 와중에 죽어 가는 여인은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전하, 단 한 번만…….”

그토록 차갑고 정 없던 남편에게 여인은 마지막까지 사랑을 갈구했다.

“한 번만 제 이름을…….”

이름을 불러 주세요. 그 말에 이안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적선하듯 말했다.

“다음 생에서 보지, 레티시아 브링스턴.”

이윽고 여자의 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안은 마지막 한순간까지 그 깡마른 손을 맞잡아 주지 않았다. 또한 제 성씨를 나누어 주지도 않았다.

실로 비참한 죽음이었다.

‘비참한 죽음.’

이딴 수식어의 당사자가 나라니,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다.

비록 짧은 등장이었지만 흑막인 이안 카히텐이 너무 강렬한 개새끼라서 레티시아는 많은 독자의 동정을 받았다.

이안에 대한 장문의 저주 댓글은 덤이었다.

‘이안 카히텐, 후회남으로도 못 쓸 진성 악역 같으니라고.’

주연 캐릭터면 뭐 해! 대공이면 뭐 하냐고! 잘생기고 능력 있고 돈 많으면 아, 좋네.

……아니, 이게 아니지.

그럼 뭐 하나! 성격이 개차반인데.

자고로 인간 고쳐 쓰는 거 아니고 쓰레기 재활용하는 거 아니랬다.

나는 일찌감치 이 결혼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

그래서 북부로 가는 당일, 브링스턴 사람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밖으로 도망쳤다.

진짜 레티시아가 순종적인 편이었기에 사람들을 속이고 방심을 유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사히 도망에 성공한 나는 곧장 2차 행선지를 고심했다.

‘옛말에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라 했지.’

난 멀리 떠나는 대신 일부러 대공의 영역인 북부 한구석에 숨어들었다.

이제 막 빙의한 내가 행선지를 잘 숨길 수 있을 리가 없으니, 허를 찔러야지.

내 마지막 행선지가 북부가 되면 브링스턴 가문이 직접 사람을 풀기도 난처할 것이고, 자연히 나를 찾는 건 카히텐 대공의 몫이 되리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효율을 중시하는 대공이 아직 얼굴도 모르는 정략결혼 상대를 찾기 위해 적극적인 수색을 감행할 리 없다.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나는 이 척박한 북부의 외딴 마을에서 3년이 다 되도록 무사했다.

1년 정도 신중히 몸을 숨기고 지내다가 열여덟이 되던 해에는 작은 카페도 차렸다.

도주를 결심하면서 훔쳐 온 지참금이 남아 있었으나, 언제까지고 이 돈에 의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원체 작고 소박한 마을이라 손님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친절하고 따뜻했다.

이따금 카페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동물들이 친구 역할을 해주기도 했고.

혼자였지만, 그렇다고 외롭지는 않은 시간이 시나브로 흘렀다.

그리고 열아홉 살, 문제의 어느 겨울날.

“얘, 여긴 생선 가게가 아니야.”

“……미야옹.”

“흐음, 너 혹시 우유도 먹니?”

검은 고양이 한 마리를 주웠다.

* * *

작중의 주요 배경이자 명실상부한 패권국인 헬리아스의 제국민들은 고양이를 영물로 여기며 신성시했다.

대륙 내 최다 신자를 보유한 아르키드네 신전의 신수가 재규어와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을뿐더러, 헬리아스 황가의 상징 또한 고양잇과인 사자였으니 그들이 사랑받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본국 내에서나 통용될 법한 얘기지.’

여기는 카히텐 대공이 다스리는 북부 지역이다.

헬리아스 제국에 속해 있기는 하나, 자치령인 북부는 황가로부터 종교나 행정 제반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더불어 카히텐 대공, 이안 카히텐은 알아주는 무신론자였다.

그는 제 땅에 그 어떠한 신앙도 뿌리내리도록 용납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신의 존재 근거인 성력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니 당연히 북부에서 고양이는 영물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동물. 아니, 조금 귀찮은 동물이라고 해야 할까?

식량이 풍성하지 않은 북부의 작은 마을에서 고양이는 탐욕스러운 소매치기에 불과했다.

‘이 애, 다른 사람들 눈에 띄었다면 지금쯤 무지개다리 위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는데.’

난 채집 나온 어린애처럼 검은 고양이의 외관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새카맣고 윤기 나는 털에 빨간 눈동자가 인상적인 녀석이었다.

“예쁘네.”

동물에게 이런 수식어를 붙여도 될는지 모르겠는데, 몸을 옹송그리고 있는 녀석의 낯은 상당히 귀족적이었다.

브링스턴 같은 부유한 가문의 아가씨가 삼시 세끼 진수성찬을 먹이며 키울 것 같은 외양.

“근데 너 여자니, 남자니?”

복부 쪽을 보기 위해 슬쩍 몸을 들어 올렸다.

“캬앙!”

곧장 처맞았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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