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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3화 (3/140)

3화

“까칠하기는.”

하지만 이미 봐 버렸지롱!

애석하게도 네 주먹보다 내 눈이 더 빨랐단다. 오호호.

“수컷이구나?”

“……!”

충격으로 동그래진 눈. 고양이의 존엄을 잃기라도 한 양 허망한 표정이었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참 웃긴다. 고양이 거기 좀 봤기로서니 무슨 존엄까지.

“미야오오옹…….”

그러나 실제로 그런 태도였다. 녀석은 나라 잃은 병사처럼 휘청거리며 발길을 돌렸다.

‘그래. 가라, 가.’

안 그래도 이 동네는 고양이에게 적대적인 편이다. 나도 괜히 먹이 주는 걸 들켜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고.

그렇게 새침하게 마주 돌아서려던 찰나.

“어럽쇼.”

녀석의 다리가 눈에 밟혔다.

절뚝거리는 모양새가 영 심상치 않았다.

난 조그마한 발자국이 찍힌 흙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점점이 피가 떨어져 있었다.

“뭐야, 너 다쳤어?”

나는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바닥을 향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아픈 인간은 무시해도 아픈 동물은 무시할 수가 없단 말이야.

“너 거기 좀 서 봐.”

녀석은 멈추지 않았다. 못 알아들었나? 꼭 사람처럼 굴더니만.

“고양아? 기다려 보래도?”

“야옹.”

녀석이 고개를 슥 돌리더니, 날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 쌩까는 거였군.’

고작 이런 걸 신경 썼다면 ‘너, 눈치 더럽게 없어’라는 말과 함께 전 남친에게 이별 통보를 받는 불상사도 없었겠지.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대로변에서 그 새끼 정강이를 걷어차지도 않았을 테고.’

나는 한국에서 날 때부터 지금까지 내일이 없는 직진 인생을 살아왔다.

고양이의 거부 따윈 아무것도 아니란 뜻이다.

성큼성큼 걸어서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러고선 아까처럼 녀석의 몸체를 붙잡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녀석의 동그란 발에서 날카로운 발톱이 비죽 튀어나왔다.

* * *

잠시 후, 나는 라테용 우유를 홀짝이는 녀석을 묵묵히 노려보았다.

‘앙칼지게 굴 땐 언제고 아주 코를 박고 마시는구나. 그러다 그릇 속에 빨려 들어가시겠다.’

입술을 비죽대고는 거울을 보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감히 레티시아의 국보급 낯짝에 스크래치를 냈겠다?

‘쫓아낼까?’

……참자. 아픈 녀석이잖아.

다 나을 때까지만.

아니, 딱 하루만 데리고 있어 보자.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 * *

마을의 유일한 어부이자 생선 가게의 주인인 한스 아저씨는 이렇게 말했다.

‘레아, 다른 동물은 다 돼도 고양이는 안 된다.’

내가 툭하면 숲속 동물들을 데려다 빵 쪼가리를 던져 준단 걸 알고 하는 소리였다.

‘고양이가 안 되면 호랑이는 되나요?’

‘아저씨 말이 농담 같니?’

한스 아저씨의 커다란 얼굴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렀다.

대가리만 남은 생선들이 아저씨를 죽은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녀석들이 내 사랑하는 티티와 치치를 죽였어.’

‘걔넨 아저씨 낚싯바늘에 잡힌 순간부터 이미 죽을 운명이었어요.’

‘내게 금화 한 닢은 쥐여 주고 죽을 운명이었지!’

한스 아저씨가 잡아 온 빙어는 영주인 델린 남작의 만찬에 올라갈 예정이었다. 갓 튀긴 빙어는 남작이 제일 좋아하는 특식이었고.

야생 고양이 떼들이 아저씨의 생선 양동이를 급습한 날.

한스 아저씨와 델린 남작, 마을에서 제일 덩치 큰 남자와 마을에서 제일 돈 많은 남자 둘의 이해관계가 처음으로 일치했다.

그 뒤로 우리 마을엔 ‘고양이 금지령’이 내렸다.

1.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지 마라.

2. 고양이를 발견하면 즉시 쫓아내라.

3. 새끼를 밴 경우 델린가 문지기나 한스 포포니에게 신고하라.

대망의 마지막 문장.

4. 고양이를 키우는 마을 주민에게는 벌금 20만 실링.

키울 생각은 없었다.

다리에 상처도 있는 녀석이 배곯고 앉아 있는 게 불쌍해서 약간의 호의를 베푼 것뿐.

그런데.

“아, 왜 안 나가는데?”

말로만 듣던 간택을 받아 버렸다.

* * *

까칠한 녀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뻔뻔하기까지 한 녀석이었다.

뿐인가? 지나치게 영리한 녀석이기도 했다.

녀석은 마치 내 말을 전부 알아들은 것처럼 굴었다.

그저 감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머리를 내젓는 것도 여러 번 보았다.

‘이세계 소동물쯤 되면 사람 말은 눈 감고도 척인가 보지.’

땅딸보 드워프가 카페 손님으로 오고 엘프가 알바 면접을 보러 오는 세상이다. 어지간한 건 납득이 갔다.

그래서 이번에도 말귀를 잘 알아듣겠거니 생각했다.

“다 나았지? 이제 나가도 돼.”

시작은 권유였다. 동시에 녀석이 갑자기 다리를 절뚝거렸다.

얼씨구, 놀고 자빠졌네.

“야, 지금 네 다리 되게 멀쩡해.”

끄덕끄덕.

수긍하는가 싶더니 대뜸 팔팔 끓는 커피포트에 말랑말랑한 핑크 젤리 발바닥을 올리는 게 아닌가.

“미친 고양이 녀석…….”

끄덕끄덕.

“……괜찮냐?”

도리도리.

권투 장갑처럼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주제에 대답은 잘만 한다.

아무튼 한 달째 녀석과 나는 이런 식으로 대치 중이었다.

“너 진짜 안 나가?”

“야옹.”

“들키면 너나 나나 뒷감당하기 힘들어진다니까?”

“야아옹.”

“야 이.”

시간이 흐르면서 ‘얘’에서 ‘야’로 호칭이 변한 것도 당연지사.

쥐새끼를 물어 오지 않는 건 다행이었지만, 녀석의 뻔뻔함은 도를 넘었다.

나는 결국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우리 마을에는 네 가지 금지령이 있다.”

조그마한 녀석의 앞에서 고양이 금지령을 한 자 한 자 읊어 주었다.

녀석의 얼굴에 점차 그늘이 졌다.

‘벌금 20만 실링’에서는 방점을 찍듯 목에 힘을 주었다.

“너 20만 실링이면 얼마인 줄 알아? 이 카페를 무려 세 번 차리고도 남을 돈이야. 여차하면 밤에 다 내려놓고 야반도주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응?”

“……야, 야옹?”

저거 백 퍼센트 아는데 모르는 척하는 거다.

저럴 때만 찐 고양이로 돌변하는 녀석을 보자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결국 분노에 못 이겨 안 해도 될 말을 했다.

“네가 계속 여기 있으면 내가 쫓겨난단 말이다.”

“……?”

“난 여기 아니면 갈 데가 없어.”

“…….”

일순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미야오옹…….”

녀석이 짧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 엎드렸다.

‘이, 이거 혹시 알겠다는 뜻인가? 와, 고양이를 설득하다니, 나 혹시 천재 커뮤니케이터?’

그런데 시무룩하게 늘어진 고양이의 찰떡같은 볼따구를 만지작대고 있자니 속이 좀 불편해졌다.

하여간 사람 맘 아프게 귀엽게 생겨서는.

“……오늘까지만 같이 있을까?”

“야옹.”

딱 하룻밤만 더. 딱 하룻밤만큼의 추억만 더 쌓고 보내 주는 거다.

* * *

그날 밤, 새까만 물체가 내 머리맡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보나 마나 녀석이겠지. 전부터 툭하면 내 방문 앞에서 문을 열어 줄 때까지 울어 대곤 했으니까.

녀석이 울 때마다 나는 혹여 이웃에게 들킬까 봐 겁이 나서 쉽게 침대를 허락하곤 했다.

하여튼 여간 영악한 녀석이 아니라니까.

“또 같이 자자고?”

난 퉁명스럽게 말하며 이불을 걷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왜 이렇게 무겁지?’

의심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와중에 뺨에 끈적끈적한 액체가 뚝 떨어졌다. 순간 솜털이 쭈뼛 섰다.

‘뭐, 뭐야.’

눈꺼풀을 슬쩍 들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큼직한 호랑이 형체의 괴물이 내 가슴 위에서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었다.

‘마물?’

평화롭고 한적한 북부 시골 마을에 갑자기 마물이라니?

그것도 하필 내 침대 위에서!

꿈인가? 꿈인 거겠지?

‘꿈치고는 너무 생생한데.’

나는 물론이요, 과거의 레티시아도 직접 본 적 없는 마물이 이렇게 실감 나게 꿈에 나타날 수가 있나?

나는 으악 소리를 내지르며 엉덩이로 뒷걸음질을 치려고 했다.

그 순간, 무언가가 이불 속에서 세차게 튀어나왔다.

‘내 고양이!’

아니, 그저 고양이라기엔 너무 거대했다. 새까만 털에 붉은 눈이 인상적인 녀석은 날렵한 퓨마와 같았다.

그 검은 몸체가 날쌔게 도약하며 마물의 목을 물어뜯었다.

“으헉!”

갑작스러운 상황에 도망마저 포기한 난 본능적으로 이불을 움켜쥐었다.

‘저 큰 게 언제부터 내 이불 속에 있었지?’

의문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두 짐승 놈들이 서로 엎어 치고 메치며 치열한 공방을 벌였기 때문에.

막상막하였다. 둘 중 누구도 서로의 급소를 내주지 않고 빙글빙글 돌며 대치하다가 마침내 교착 상태에 이르렀다.

그때 마물이 숨죽인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는 게 소름 끼치게 불길했다.

졸렬한 웃음과 함께 마물이 나를 향해 도약했다.

미처 예상치 못한 나는 숨을 삼킨 채 눈을 홉떴고, 마물의 어금니가 어둠 속에서 예리하게 반짝이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이렇게 뒈지나.

그야말로 엑스트라다운 허무한 결말…….

퍼억!

나와 한 뼘 남짓한 거리에서 놈의 대가리가 이불보 아래로 고꾸라졌다. 그대로 침대 매트릭스를 뚫고 찌부러진다.

마물의 상체가 아래로 고꾸라짐에 따라, 머리를 내리누르고 있는 무언가가 시야에 잡혔다.

하얀 손이었다. 터럭 하나 없이 새하얗고 긴 손가락.

이어서 눈에 들어온 건 그의 복부 왼편에 자리한 열상이었다.

맹수에게 물어뜯긴 것처럼 너덜너덜한 상처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피가…….’

너무 심각한데.

상처에 눈이 팔린 사이, 예의 그 하얀 손이 날 향해 다가왔다.

부드러운 손바닥에 두 눈이 묻혔다. 삽시에 어둠이 찾아왔다.

그 어둠 속에서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괜찮아, 레아?”

그가 내 가명을 부르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속삭였다.

“나 때문에 당신이…….”

나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입술이 아교를 붙인 듯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나는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시야가 차단된 상태에서 예민해진 청각이 자잘한 웃음소리를 잡아냈다.

“걱정하지 마.”

귓가에 숨결이 와 닿았다.

“내가 다 처리할 테니까.”

그가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귀를 틀어막으려고 했지만, 사지에 힘이 풀려 무리였다. 예기치 못한 피로가 거대한 자루처럼 내 의식을 덮쳤다.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누군가 내 상체를 안아 드는 느낌이 들었다.

솜이불처럼 포근하고 여름의 태양처럼 뜨거운 품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드물게 개운한 느낌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실로 오랜만의 꿀잠이었다.

뭐지? 뭔데 이렇게 상쾌해.

커튼 새로 비치는 햇살이 눈부셨고 차갑고 맑은 겨울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뭔가 아주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개꿈이라도 꿨나?’

난 고개를 내저으며 혼자 실실 웃었다.

“하, 하하, 웃기는 꿈이네…….”

웃음은 서서히 멎었다. 허전한 침대 옆을 일별하고 텅 빈 실내를 응시했다.

새까만 털 뭉치가 없었다.

나의 검은 고양이.

녀석은 말도 없이 홀연히 사라졌다.

가라고 말은 했지만 이렇게 밤중에 인사도 없이 사라지길 바라진 않았는데.

‘괜찮아. 어차피 혼자였으니까.’

받아들이는 건 쉬웠다. 하지만 힘들 때마다 녀석의 얼굴이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델린 남작의 아들이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며 진상을 부릴 때, 한스 아저씨가 민트 초코칩을 올린 민트 초코 프라페를 주문하며 모두의 원성을 들을 때.

불쑥불쑥 녀석이 생각났다.

외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조금쯤은 외로웠던 걸까? 녀석의 빈자리가 생각보다 훨씬 컸다.

‘괜찮아.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그렇게 나 자신을 다독였다.

때마침 시기 좋게 이 지역의 유일한 시가지에 호텔이 들어섰다.

물론 그 호텔 투숙객들이 이렇게 외진 마을까지 들어오는 경우는 흔치 않았지만, 어쨌든 전보다 손님이 늘긴 했다.

일이 많아지면서 손이 바빠졌고, 어쩌다 보니 알바도 들였다. 새 알바와 아웅다웅하다 보니 한때의 외로움은 차츰 흐릿해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저기 죄송한데…… 살아는 계시는 거죠?”

이번엔 죽어 가는 소년을 주웠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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