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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5화 (5/140)

5화

로체는 끝끝내 100리스 지폐를 받아 들고 소년을 치료했다.

이후 나는 카페 문을 닫아걸고 소년의 옆을 지켰다.

양심 고백하자면 말이다. 선한 의도로만 소년의 곁에 있었던 건 아니다.

로체 저게 100리스나 받아 처먹고 사기 친 거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주요했다.

그러다 침대 아래 바닥에서 깜박 잠이 든 게 희붐한 새벽 무렵.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투명한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음, 상쾌한 날씨. 음, 시원한 바람.

……은 개뿔. 얼어 죽을 것 같다.

“로체 이게 또…….”

자기는 더위나 추위를 전혀 안 탄다고, 꼭 이런 식으로 아침마다 허락도 없이 창문을 열어젖힌다.

‘망할 엘프 자식.’

“환기는 10분만 하라니까 진짜.”

찌뿌듯한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푹신하게 가라앉는 베개의 감각이 낯설었다.

분명 바닥에서 소금 불에 타닥타닥 구워진 새우처럼 누워 잤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침대 위였다.

게다가 눈을 뜨자마자 웬 도자기 인형 같은 얼굴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환자분, 왜 바닥에 계세요?’

* * *

눈뜬 건 처음 봤는데 어쩐지 낯이.

‘존잘.’

아, 뇌가 멋대로 그만. 실수, 실수.

흑발 적안이라.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존잘.’

……음, 그러니까 어디선가 많이 본 조합인데.

흑발 적안, 흑발 적안…….

불현듯 어떤 엽렵한 고양이의 외양이 떠올랐다.

근데 걘 일단 인간이 아니잖아? 그보단 좀 더 종족적으로 비슷한 이미지의 누군가가 떠오를 것도 같은데…….

‘에라이, 모르면 물어보면 되지.’

“이봐요, 환자분.”

흑발의 미소년이 침대 모퉁이를 양손으로 부여잡고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유순한 태도와 달리 올려다보는 눈빛엔 어딘지 서늘한 구석이 있었다.

“환자분 이름이?”

“…….”

과묵하네. 사춘긴가?

“사는 곳은? 엄마랑 아빠는 통신구 번호는?”

미아 찾기 단골 질문을 줄줄이 읊었지만 여전히 상대는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마지막 인내심을 그러모아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몸은 괜찮아요?”

소년은 한참을 장고했다.

아니, 자기 몸 상태를 모르나? 아니면 말을 몰라? 나 진짜 돌겠네.

단전에서부터 복식 호흡으로 ‘야’ 소리가 나오기 직전, 소년이 첫 마디를 뱉었다.

“체이트 폴린.”

“네?”

“내 이름. ……체이트야.”

체이트 폴린이라. 미묘하게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소설 속 인물인가? 아니면 우리 카페 단골?

아니, 우리 카페 단골이었으면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게다가 우리 카페 단골이라면 99%의 확률로 엑스트라일 텐데, 이 낯짝이 고작 그 정도로 소모될 급은 아니었다.

섬세한 이목구비와 혈색 짙은 입술. 왼쪽 눈가의 눈물점과 살짝 올라간 눈초리.

속된 말로 ‘사람 홀리는’ 미모다.

이 세계 황족들이 숭배한다는 태양신 헬리아스 정도는 돼야 그나마 비벼 볼 수 있을 정도.

이런 미소년이 거리에서 객사할 운명의 엑스트라였다면 작가가 소설 설정을 잘못한 거지.

미남 미녀 집안으로 유명한 브링스턴가의 장녀 레티시아 브링스턴이 ‘예쁘긴 한데 어째 좀 우울하고 어째 좀 흐릿한 이미지’인 것도 다 작가의 안배가 아니겠는가.

이런 강렬한 인상의 미소년, 심지어 ‘흑발 적안’이 그저 그런 엑스트라일 수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흑발 적안과 은발 벽안은 남주 내지는 서브남―근데 이제 후회를 곁들인―인 게 로판계 국룰이잖아? 대체로 난폭한 황제 내지는 북부 대공이고?

……응? 북부 대공?

갑자기 등골이 싸해졌다.

“혹시 일가친척이나 혈연관계의 누군가가 북부에서 되게 유명한 사람이신가요?”

나름대로 최대한 부드럽게 돌려서 질문을 던졌다.

도리도리.

확신의 주연상을 가진 체이트 군이 고개를 내저었다.

‘좋아, 일단 흑막 남동생이나 조카는 아닌 거고.’

분홍 머리가 가문의 상징 수준인 브링스턴가의 사람일 리는 더더욱 없을 테지.

사실 그 둘만 아니면 난 거리낄 게 없다. 이쪽은 워낙에 비중 없는 역할인지라 엮이는 인물도 별로 없으니까.

‘주인공들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좋아. 문제없어.

“환자…… 아니, 체이트 군. 집이 어디예요?”

“…….”

체이트 군이 말없이 고개를 내렸다. 대답이 계속 두루뭉술한 게 어째 좀 수상한데.

“가출? ……은 아닌 것 같고.”

난 피투성이인 배를 보며 말했다. 상처는 여전히 심각했다.

“일단 있어 봐요. 의사를 불러올 테니까.”

별생각 없이 요안나 양에게 연락하려다가 멈칫했다.

자는 얼굴을 보고도 찬탄을 금치 못했는데 하물며 눈을 마주한다니.

아마 그 양반은 본업이고 뭐고 좋아서 뒤로 넘어갈지도 몰라.

차라리 로체를 부르자.

“잠깐 거기 있…… 왜요?”

일어서서 밖으로 나서려는 나를 아직 다 영글지 못한 손이 붙잡았다.

소맷귀가 죽 끌리며 자연스레 시선이 맞부딪쳤다.

맑고 투명한 시선.

간절하고도 순진무구한 낯으로 그가 말했다.

“안 갔으면 좋겠는데.”

“어, 네?”

“계속 여기 있으면 안 돼? 나 버리지 말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설마 그쪽 얘기하는 거? 그쪽을 제가 왜 버려요. 거둔 적도 없는데.”

“하지만 먼저 데려왔잖아.”

“허.”

이거 아주 웃기는 녀석이네. 물에 빠진 거 구해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격이잖아?

나는 한마디 하려고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그때였다.

“하긴, 이런 상태면 모를 수 있지. 잠깐만.”

말을 마친 체이트 군이 퐁, 하고 고양이로 변했다.

“…….”

농담이 아니다. 정말로 퐁, 하고 변했다.

퐁!

앗, 귀여운 고양이!

……진짜 이랬다.

“너…….”

그냥 고양이도 아니다. 우리 카페에 얹혀살던 검은 고양이.

그 녀석이 바로 체이트 폴린 군이었다.

정체 모를 소년이 내가 키우던 고양이였다니!

놀랐다. 응, 무지막지하게 놀랐다.

조금 진지하게 말하자면 ‘일순 눈이 번쩍 뜨이다가, 이내 천천히 가라앉았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놀랐다.

동시에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아챈 나는, 매우 몹시 침착하게 머릿속으로 현 상황을 정리했다.

1. 저놈이 내가 주운 고양이였다.

2. 내가 주운 고양이는 수인이다.

3. 그 수인이, 그러니까 그 수인이…….

“체이트 폴린?”

고양이 체이트가 까만 머리를 끄덕끄덕했다.

“……폴린?”

다시 한번 끄덕끄덕.

“허어.”

처음부터 미묘하게 낯이 익다 싶었지.

그를 마주 보면서 나는 마침내 오랜 세월 묻어 두었던 소설의 한 페이지를 들춰냈다.

여주 코렐리아 폴린의 아버지, 체이트 폴린.

그의 외양 묘사가 이 소년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아르키드네의 축복을 받은 성녀 코렐리아.

그녀의 아버지 체이트 또한 성력을 가진 존재로 묘사되었다. 그러니 마물에게 쫓겨 이런 상처도 입었겠지.

이 세계에서 검은 머리는 흔해도 붉은 눈은 흔치 않다. 시기상으로 비교해 볼 때 나이도 이쯤 될 법해.

‘조금만 주의했다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어.’

그럼 나는 왜 일이 다 터지고 난 뒤에야 알아차린 걸까?

‘넌 진짜 눈치로 밥 말아 먹은 것 같아’라고 씨부렁거리던 전 남친의 개소리가 떠올랐다. 물론 그때도 고자 킥으로 응징해 줬다.

음, 역시 지나친 무관심이 문제였는가.

“레아?”

“잠시만. 지금 되게 현타 왔거든. 1분만 가만히 놔둬 줄래?”

그가 이 세계의 중요 인물이라는 걸 알았지만, 말투는 오히려 편해졌다. 고양이 시절 내적 친밀감을 한가득 쌓아 놓은 탓이다.

난 어느새 사람으로 돌아와 초조한 눈빛을 쏘아 대는 내 고양이…… 아니, 체이트를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저게 그 체이트 폴린이라니.

‘나 어떡하지?’

엑스트라답게 조용히 목숨만 부지하고 살다 가려고 했는데 말이야.

나는 단지 고양이를 주운 것도 아니었고, 죽어 가는 소년을 주운 것도 아니었다.

눈이 소복하게 내리던 어느 겨울.

나는 여주의 아버지를 주웠다.

* * *

키우던 고양이가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근데 그놈이 뜻밖에 존잘이고, 뜻밖에 여주의 아버지였다?!

오, 아주 그럴듯한 로판식 전개야.

수인인 남자 주인공이 빙의한 여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알콩달콩한 전개. 되게 흔한 클리셰잖아?

이 녀석이 고작 열다섯 꼬맹이만 아니라면 말이지.

“열다섯…….”

외관으로 대충 가늠은 했다만 직접 물어서 대답을 듣고 나자 역시나, 라는 생각뿐이었다.

‘레티시아가 올해 열아홉이었지?’

빙의 전 내 실제 나이가 이십 대 중반이었다는 것까지 가늠해 봤을 때 그 차이가 살짝 아득하게 느껴졌다.

K―유교 걸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나이 차다.

왜 그런 거 있잖은가.

스물세 살과 스물일곱 살이 연애하는 건 예쁜 사랑 하시라고 박수 세 번 쳐 줄 수 있지만 열다섯 살과 열아홉 살이 연애하면 정신 차리고 공부나 하라고 등짝을 후려갈기고 싶은 거.

여기서 서로 1년씩만 더 먹어 봐라. 열여섯 살과 스무 살. 이건 거의 범죄다.

잠깐의 고민 끝에 K―유교 걸은 K―로판의 엑스트라로서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로 했다.

“일단 치료부터 하자.”

기왕 이렇게 된 거, 주인공 무리의 조력자 1 정도 해보지 뭐.

언젠가 여주가 태어나거든 ‘내가 왕년에 느그 아부지 배때지에 붕대 감아 준 사람이란다.’ 하면서 생색도 좀 내보고.

난 곧장 로체를 불러와 다시금 신성으로 상처를 정화한 후, 붕대를 갈고 약을 발랐다.

그동안 체이트는 술 달린 방석 위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기왕이면 소파에 앉는 게 어때?”

“……아, 응.”

아무래도 본인이 지금 어떤 모습인지 아직 인지가 덜 된 모양이네.

찢긴 부분에 소독약을 붓는데도 소리 한번 지르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있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통증을 못 느끼나 싶은 정도였다.

“당분간 유동식만 섭취하는 게 좋대.”

요안나 양의 처방에 따라 따뜻한 수프를 건네주었다.

“여기.”

“고마워.”

체이트가 꾸벅 인사하며 내가 준 그릇을 받았다.

잠깐.

그런데 왜 혀를 내미는 거냐……?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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