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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6화 (6/140)

6화

“……기, 기다려!”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여 수프를 날름 핥아먹으려는 녀석을 손으로 잽싸게 막아 냈다.

“수프 처음 먹어 봐?”

“……이런 건 먹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럼 뭘 먹었는데.”

“그냥…… 짐승이나 풀?”

“어?”

“먹을 게 없으면 고양이로 변해서 생선을 훔쳐 먹기도 했고. 위장이 작아져서 오래 버틸 수 있거든.”

“아, 그럼 한스 아저씨의 티티와 치치를 해치운 게 설마.”

“한스가 누구야. ……혹시 남자애야?”

“아저씨라니까.”

“그러니까 아저씨가…… 남자라는 거 아닌가?”

“설마 아저씨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

“…….”

“…….”

뭐야 얘.

“…….”

개무식해.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거 보면 늑대랑 절친 먹고 산 건 아닌 것 같은데.’

아아, 여주 아버님. 대체 무슨 삶을 살아오신 겁니까.

“됐어. 모르면 지금부터 배우면 되는 거니까.”

기가 찬 표정을 애써 감추고 체이트의 손 위에 내 손을 포개어 스푼으로 가져갔다.

“자, 이렇게.”

내 손동작에 맞춰 체이트의 손가락이 스푼에 하나씩 얽혔다.

그는 스푼을 쥔 제 손과 그 위에 겹친 내 손을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사춘기 애들은 호기심이 많다더니, 고작 이런 것조차 신기한 건가?

“이렇게 들고, 입에 천천히 가져다 대면 돼.”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체이트 군이 스푼을 들고 수프를 조금씩 퍼 올렸다.

“잘했어.”

그의 입가에 묻은 수프를 엄지로 닦아 주며 칭찬해 주었다.

‘아, 웃는다.’

동네 소녀 여럿 울릴 법한 미소였다.

역시 여주 아버지다. 주연 유전자 어디 안 가지.

“집은 어디야?”

“음……, 여기?”

“월세 대신 내줄 거 아니면 그런 헛소리 함부로 하지 마.”

“월세가 뭐야? ……남자애?”

“…….”

지금 얘 지적 수준이 짐작이 안 가니까 되도록 동화책용 단어로 얘기하자.

“가족은? 가족은 있을 거 아냐.”

잠깐의 침묵 후에 그가 시선을 사선으로 내리고 대꾸했다.

“없어, 가족.”

“없다고? 하나도?”

“응.”

“…….”

아니, 나 미치겠네. 여주 아버지나 되는 양반이 어떻게 집도 절도 없어요? 귀하신 분 배경 설정이 이렇게 박해도 됩니까, 작가님?

나는 까마득한 기억을 쥐어짜며 〈성.흑.찢〉에서 체이트가 언급되는 부분을 추가로 떠올리려 애썼다.

‘와, 기억 안 나.’

3년 전에 만원 전철에서 서서 읽은 웹 소설 구절 하나하나 다 생각나는 사람 손?

그나마 레티시아와 주·조연 몇 명의 정보는 아직 남아 있었다.

그 안에서 체이트와 가장 밀접하게 엮인 여주인공 코렐리아의 배경을 반추해 보았다.

다행히 몇 가지 쓸모 있는 정보가 떠올랐다.

코렐리아가 8년 후로 예정된 신탁의 해에 태어났다는 이야기라든가, 탄생지가 목에 땀띠 나게 더운 남부의 어느 섬이라는 이야기.

‘남부…….’

아버님, 이럴 때가 아닙니다. 대체 왜 따님 출생지 정반대편에 있는 산골짜기 마을에서 미적거리고 계시는 겁니까…….

이렇게 된 이상 체이트가 낫거든 최대한 빨리 남부 어드메로 보내 버려야지.

괜히 또 옆에 끼고 살다가 애한테 없던 향수가 생겨선 북부에 뼈를 묻겠다고 하면 어쩌나.

“확실하게 하자. 여긴 네 집이 아냐.”

내 집도 아니지만.

“그러니까 상처가 다 나으면 여길 떠나.”

결심이 선 나는 ‘버리지 말라’는 체이트의 앞선 부탁에 단호한 대답을 전해 주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정 모르겠으면 내가 같이 알아봐 줄 테니까.”

“……내가 고양이가 아니라서 싫은 거야? 다시 변할까?”

“네가 진짜 고양이라면 더 안 돼. 사람이라서 봐주는 거야.”

그가 침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예상 못 했어.”

“그런 게 인생이지.”

“배신감 들어.”

“그것도 인생이네.”

“…….”

체이트는 삐진 고양이처럼 등을 둥글게 말고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나가라고…….”

풀 죽은 혼잣말이 들렸다.

“상처가 다 나으면 말이지…….”

“그래. 다 나으면.”

“…….”

더 이상의 반대는 없었다.

조용한 모습을 보니 어떻게든 납득은 한 것 같다.

좋아, 이걸로 된 거야.

‘나는 어차피 네 이야기에 동참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지날 때쯤.

뭔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이트의 상처가 전혀 낫지 않고 있었다.

* * *

식객이 늘었다.

그것도 아주 불편하고 어려운 식객이 하나.

“야, 너 진짜 제대로 치료한 거 맞아?”

나는 체이트의 낫지 않는 상처를 걱정하며 로체에게 투덜거렸다.

로체 저건 100리스 꿀꺽하고 토낄 수도 있는 위인이니 사기 치료를 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저를 너무 개새끼로 보는 거 아닙니까?”

로체가 불쾌한 기색을 한껏 담아 툴툴거렸다.

“개새끼라니, 말이 심하네.”

“그걸 아시는 분이 이렇게 엘프를 매도하시면…….”

“어서 이 세상 강아지들한테 사과해.”

“너무하네요.”

로체가 흉부를 크게 부풀렸다 꺼뜨리며 말을 이었다.

“이래 봬도 마력이 약하진 않습니다. 치료는 제대로 했어요.”

“그럼 왜 저렇게 상처가 안 낫는데?”

“글쎄요. 체질상의 문제일 수도 있고, 아니면…….”

로체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무언가가 제 마력을 고의로 가로막고 있는 걸지도 모르죠.”

“……누가?”

로체는 빙그레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레아 양은 말해도 안 믿으실 거예요. 머릿속이 꽃밭이시잖아요.”

내가 대가리 꽃밭이라고? 삭막할 만큼 현실적이란 말은 들었어도 그런 얘긴 처음 듣는데.

“사람을 너무 잘 믿는 것도 장점은 아닙니다.”

“그거 충고해 주는 거야?”

“아뇨, 그냥 경험담인데요.”

로체는 카페 일이나 신경 쓰시라며 대화를 중단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카페 문을 오래 닫아 놓기는 했지.

내가 어깨를 으쓱하고 오픈 준비를 시작하자 체이트가 비척비척 다가왔다.

“나도 돕고 싶은데.”

‘환자는 구석에 처박혀서 휴식이나 하세요.’

……라고 할 뻔.

여주 아버지에게 함부로 말하면 안 되지. 앞일이 어찌 될지도 모르는데.

“저기 앉아서 나 구경해.”

“레아, 모르는구나. 구경은 일이 아니야.”

“체이트, 모르는구나. 애는 노는 게 일이야.”

“내가 애라고?”

“아니라고 하지 마. 그럼 진짜 애인 거야.”

“……흠.”

체이트는 미간을 찡그리더니 간이 소파 구석에 앉아서 얌전히 나를 구경했다.

그런데 세상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날부로 매출이 배로 뛴 것이다.

개중 절반은 요안나 양과 그녀의 친구들이었다.

‘개이득인데.’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얼른 마음을 바로잡았다.

‘언젠가 남부로 떠날 사람이야. 너무 이용해 먹진 말자.’

* * *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응? 어째서 기시감이?

* * *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체이트의 상처는 회복이 더뎠다.

‘로체의 마력만으로는 하루아침에 나을 만한 상처가 아니었던 걸까…….’

어느 시점부터 나는 통상적인 치료에도 열을 올렸다. 시도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는 편이 좋으니까.

그래도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미야옹.”

“너 내가 내 허락 없이 고양이로 변하지 말랬지.”

카페 문을 닫은 오후 9시 30분.

네 발로 걸어와서 내 종아리에 머리를 비비는 검은 고양이를 째려보며 말했다.

저러다 상처가 덧나면 자기만 손해일 텐데, 철없는 청소년 같으니라고.

“한스 아저씨한테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그 아저씬 워낙 경우가 없어서 카페 불 다 꺼져도 일단 문부터 두드리고 본단 말이야.”

내 불퉁한 잔소리에 녀석이 재빨리 사람으로 돌아왔다. 애교가 통하지 않아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지금은 아무도 안 보고 있어.”

“그걸 네가 어떻게 확신해?”

“기척이 없으니까.”

그런가. 여주의 아버지 정도 되면 외부인의 기척도 척척 읽을 수 있는 건가.

“아무튼, 네가 이럴 때마다 붕대를 매번 다시 갈아 끼우는 것도 일이란 말이다.”

체이트의 변신 과정은 독특했다.

입고 있던 옷가지나 신발 등은 고양이로 변하면 아예 뿅! 하고 사라졌다가 이내 사람으로 돌아오면 다시 그대로 나타나곤 했다.

그런데 붕대만은 예외였다.

“옷은 자유자재로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대체 왜 붕대는 조절이 안 되는 거야?”

내가 툴툴거리며 찬장의 구급상자를 챙기자 체이트가 얼른 두 손으로 셔츠를 잡아 올리고 대기 자세를 취했다.

봐라, 얼마나 이런 일이 빈번했으면 말도 안 했는데 자동으로 옷을 까뒤집겠나.

정말 저 녀석은 나를 한시도 가만두지 않았다. 애 키우는 심정이 이런 것일까?

난 구급상자에서 붕대와 소독약을 꺼낸 뒤, 도통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체이트의 환부를 능숙하게 치료했다.

“……있잖아.”

얌전히 셔츠를 잡고서 붕대질 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던 체이트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나 어제 월세가 무슨 뜻인지 알았어. 매달 집주인에게 내는 돈인 거지?”

“…….”

못 들은 척 치료에 집중하자 그새를 못 참고 조잘거린다.

“응? 레아, 레아.”

“누나.”

난 단호하게 정정했다.

체이트가 외부에 노출됨에 따라 신분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당황한 나는 그만 ‘우리 아버지 내연녀의 아들내미’라는 헛소리를 지껄였고, 우리는 삽시에 마을 사람들의 주요 관심 대상이 되었다.

‘하여간 이 마을 사람들 막장 드라마 참 좋아해.’

조용한 산골이라 그런가. 어째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죄다 신규 에피소드에 목말라 있다.

결국 현재는 주변의 의심을 피하고자 안팎으로 남매 시늉을 하는 중이었다.

체이트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누나는 좀 그런데.”

은근히 고집이 있다.

“뒷방의 엘프 노인은 레아를 이름으로 부르잖아.”

“누가 뒷방 노인이야?!”

뒷방 휴게실에서 로체가 벼락같이 튀어나왔다.

“들어가, 로체.”

“하지만 레아 양, 저 새파란 살쾡이 놈이 절……!”

“3초 내로 안 들어가면 마감 도와주고 싶다는 말로 알아들을게.”

로체는 조용히 휴게실로 돌아갔다.

난 다시 체이트를 바라보았다.

“로체는 내 알바생이잖아.”

“알바. 그거 내가 할게.”

“환자는 우리 카페에서 알바 못 해.”

“…….”

* * *

사람이 본능이란 게 있다.

아무리 새파랗게 어린 고양이라도 밥 챙겨 주는 집사는 기가 막히게 구분하듯이, 평균치의 눈치코치를 가진 사람이라면 마음속에 경고등을 하나씩 품고 있기 마련이다.

지금, 체이트의 경고등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뭐라 형언할 수는 없지만, 단전에서부터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누나.’

그 단어는 어감이 상당히 미묘했다.

정확히 이거라고 콕 집을 수는 없지만, 체이트는 그 단어가 왠지 마음에 걸렸다. 지금 그 단어를 함부로 남발했다간 먼 훗날의 자신이 엄청나게 애를 먹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전처럼 이름으로 부르는 건 레티시아가 허락하지 않을 테고.

경험 많은 윗사람의 조언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경험 많은…….

‘윗사람…….’

체이트가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그 녀석에게만큼은 도움받고 싶지 않은데.’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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