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레티시아의 곁에 머물면서 그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녀석.
꼬장꼬장한 뒷방 엘프 노인.
“이봐.”
체이트가 휴게실 소파에 드러누운 남자에게 다가갔다.
“상담하고 싶은 게 있는데.”
“200리스. 선불이야.”
로체가 눈도 뜨지 않은 상태로 손을 내밀었다.
“하.”
체이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레티시아가 자신이 없는 사이에 이런 양아치를 곁에 두었다니.
“다시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
“다 들리게 혼잣말하지 마. 난 레아 양이랑 다르게 정상인 수준의 사고를 할 줄 알거든.”
“당신이?”
“그럼.”
로체는 읏차, 소리를 내며 상체를 바로 세워 앉았다.
“예를 들면, 내가 매일 마력을 쏟아붓는 네놈 뱃가죽이 왜 아직도 그 모양인지 하는 의문 같은 거.”
“…….”
“나는 충분히 생각하고 산단 말이지.”
로체가 엉큼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함부로 노인이니 뭐니 지껄이지 말고 입단속 잘해.”
“그래.”
체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이, 물어볼 게 있다.”
“……너 언어 능력이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는구나? 습득력이 좋은가 보다.”
뭐, 이쪽이야 돈만 받으면 되지.
로체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2000리스.”
“……왜 늘었지?”
“1800은 방금 네 되바라진 언행에 대한 정신적 피해 보상금.”
“당신은 양심도 없군.”
로체가 키들거렸다.
“뭐, 넌 나중에 돈 좀 만지게 생겼으니까 특별히 후불로 해주지.”
“후불……? 무료라는 건가?”
“……일부러 그러는 거지, 너.”
“공부하지 않은 단어일 뿐이야.”
“하? 뭐, 일단 말이나 해봐. 사회 부적응자에게 하는 봉사라고 치지.”
체이트는 로체에게 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제 얘기를 털어놓았다.
그가 고개를 과장되게 주억이더니,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요컨대, 레아 양이 너를 진짜 동생으로만 여기게 될 게 문제라는 거지?”
“그래. 실제로 나는 그녀의 친동생도, 이복동생도 아니니까. 없는 관계를 임의로 만드는 게 조금…… 찜찜해.”
체이트는 대수롭지 않은 척 얘기했지만, 로체의 표정은 아주 의미심장했다.
“그렇군. 역시 그랬어.”
체이트의 눈썹이 비죽 올라갔다.
“헛소리할 거면 관둬.”
“아냐. 이런 건 내가 전문이지.”
로체는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결국 레아 양이 눈치가 더럽게 없어서 생긴 게 문제니까, 쓸데없이 부딪치지 말고 단순하게 해결해. 어차피 레아 양은 네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도 모를 테니까.”
“……무슨 뜻이지?”
“거리를 두라고.”
체이트의 안색이 나빠졌다.
로체가 덧붙였다.
“멀리 떨어지라는 말이 아니야. 심리적 거리감을 두란 뜻이지.”
“……?”
“방법이야 셀 수 없이 많지만…… 역시 어린애가 쓸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애가 아닌 척하는 걸까?”
“난 어린애가 아니야.”
“영락없는 어린애네.”
로체가 피식거렸다.
“너무 지나치게 폼 잡으면 티 나니까 적당히 경칭을 쓰거나 존대를 해보는 건 어때?”
“……경칭이라. 예를 들자면?”
“어머님이라든가.”
“노친네 노망났군.”
“아, 역시 애들은 이상한 말까지 다 흡수해 버려서 문제라니까. 기본적인 단어는 모르는 주제에 말이야.”
“멋대로 짐작하지 마. 나는 일부 단어에 익숙하지 않을 뿐, 필경 당신보다 훨씬 많은 책을 읽었을 거야.”
“아, 그래? 일상적인 용어조차 모르는 걸 보면 책 편식이 꽤 심했나 보지?”
“…….”
“언어를 책으로만 배워서 쓰나. 신문으로 배운 투자, 글로 배운 연애. 다 부질없다고.”
로체가 소파에 도로 누우며 말을 덧붙였다.
“아무튼 잘 생각해 봐. 존칭 쓰기, 고전적이긴 해도 나쁘지 않은 시도니까.”
“…….”
“아, 그리고.”
로체는 돌아가려는 체이트를 붙잡았다.
“너무 오래 끌지 마라. 꼬맹이 장단에 맞춰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내 마력은 아주 비싸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억울하면 일 관둬.”
“나이도 어린 게 벌써 싹수가 노래서는.”
레아 양 진짜 사람 볼 줄 몰라. 로체가 툴툴거렸다.
* * *
며칠 후, 체이트는 ‘누나’ 대신에 ‘누님’이라고 부르며 극존칭을 쓰기 시작했다.
* * *
해 저문 시각.
“누님, 누님.”
체이트가 내 뒤를 졸래졸래 쫓아다니며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누님은 제 머리 만지는 거 좋아하시지요?”
“……뭐 그거야.”
고양이일 땐 그랬지. 반쯤 사실이니 부정하진 않았다.
두루뭉술한 대답에 잠시 궁싯거리던 체이트가 입술을 꾹 눌렀다 떼며 말했다.
“저도 만져 봐도 됩니까?”
“응?”
별걸 다 묻네.
“그러든지.”
선선히 오케이했다.
저거 저거, 표정 환해지는 거 봐라. 머리 좀 만지작거리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자.”
난 얼른 체이트의 손을 들어 그의 새카만 정수리에 턱 올려놓았다.
“느낌이 어때?”
“……별로 좋지는 않네요.”
비단 같은 머릿결을 가진 주제에 그 사실을 체감조차 못 한다니, 아주 복에 겨운 놈이다.
“난 좋은데.”
그의 검은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자 떨떠름했던 녀석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음, 고양이일 때도 느꼈지만 애가 참 귀엽긴 해.
로체랑 싸우지만 않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체이트와 로체. 둘은 상극이었다.
허구한 날 서로를 째려보며 무언의 대화를 하는 것 같은데, 독심술엔 소질이 없는지라 뜻까진 파악하지 못했다.
기왕지사 같이 있는 동안 좀 사이좋게 지내면 좋을 텐데.
‘……무리겠지.’
한 번은 로체가 날 따로 불렀다.
내가 지금처럼 체이트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을 때였다.
* * *
“레아 양, 잠시 저 좀 보죠.”
그리 말하는 로체의 얼굴은 드물게 심각했다.
내도록 뭐 씹은 얼굴로 소파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놈이 갑자기 무슨 볼일이람?
난 체이트에게 거기서 기다리라 말하고 로체를 데리고 휴게실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야?”
내 물음에 로체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저거, 언제까지 데리고 있을 겁니까?”
“저거라니, 내 동생한테 무슨 소리야.”
“동생이요?”
로체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렸다. 그가 밝은 눈썹을 모로 치켜올려 가며 불만스러운 감정을 직접적으로 내비쳤다.
“설마 ‘우연히 주운 소년이 알고 보니 10년 전 잃어버린 내 동생이었는데, 아니 글쎄 알고 보니 고양이 수인이었지 뭐냐’……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 것 같습니까?”
“오.”
제법이다. 지 상판 말고는 생전 남한테 관심 없는 앤 줄 알았는데.
“물론 저와 무관한 일이니 알 바 없다고 생각했죠.”
아, 역시.
“근데 저건 좀 심하잖아요.”
난 그의 말에 손으로 턱을 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죠?”
“그래. 어떻게 저렇게 상처가 안 나을까?
아무래도 애가 비실비실해서 그런 것 같다.
명색이 여주 아버지에 성력이 있는 인물이라고 해서 내심 남다른 능력이라도 있는 건가 하고 기대했는데, 딱히 엄청 비범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월세 뜻도 몰랐지.’
내 눈에 체이트는 고양이로 변하는 것 말고는 혼자 할 줄 아는 게 개미 눈곱만큼도 없는 병약 미소년에 불과했다.
‘고기라도 사다 먹여야 하나?’
로체가 끌끌 혀를 찼다.
“설마 그게 전부입니까?”
“그게 아니면?”
“하아.”
진짜 몰라서 물었는데 바닥이 무너질 듯 한숨을 내쉬는 걸 보니 기분이 유쾌하지만은 않다.
“레아 양, 우선은 제가 저보다 못난 얼굴엔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 지극히 평범한 엘프 남성이라는 사실을 알아주세요.”
“갑자기 왜?”
“제가 레아 양을 이성적으로 좋아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어, 알아. 그니까 그게 왜.”
“……쟤가 저 질투합니다.”
“뭐?”
얼씨구. 나르시시즘도 정도가 있지.
열다섯 살이 백오십 살을 질투해? 이거 참, 허허.
“너 그거 자의식 과잉이야.”
“아니, 진짜라니까요?”
로체가 부루퉁한 말투로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레아 양이 없을 때 저게 절 무슨 눈빛으로 쳐다보는지 아십니까?”
“무슨 눈빛?”
“안 타는 쓰레기 보는 눈빛이요.”
“와아, 걔 되게 예리하다.”
로체의 매끈한 미간에 실금이 갔다.
“저 지금 진지해요, 레아 양. 저게 절 당장에라도 갖다 버리고 싶은데 그러질 못해서 안타까워 죽겠단 눈으로 본단 말입니다.”
“……!”
난 감동에 겨워 입을 틀어막았다.
남매는 닮는다더니, 어쩜.
“네가 그런 눈빛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 줄은 미처 몰랐어.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널 좀 더 자주 쳐다봐 주는 건데.”
“……됐습니다.”
로체가 뒤돌아 나가며 구시렁거렸다.
“전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런 모난 녀석은 애당초 안에 들이는 게 아니라고요.”
어럽쇼? 누가 나 몰래 쟤한테 카페 지분이라도 줬나? 아주 발언이 날이 갈수록 선을 넘는다.
처음부터 맘에 안 들긴 개뿔.
창문 열러 나왔을 때 체이트가 한번 노려봤다는 걸로 지금까지 우려먹는 게 분명하다.
체이트가 비록 고집이 좀 있고, 환자라서 영 쓸 데가 없긴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애는 예쁘고 착해.
‘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는데.’
혹시…….
‘쟤 체이트 질투하나?’
그럴 수도 있지.
요즘 체이트를 보러오는 손님들이 제법 늘었다. 로체에게 관심을 두던 여자애들도 뉴 페이스에게 시선이 쏠린 상태고.
일하고 싶다기에 카운터의 병풍처럼 세워 놨더니 마스코트 역할을 제법 톡톡히 해낸 것이다.
로체를 열렬히 짝사랑하던 옆 마을 귀부인이 체이트의 나이를 물어보고 실망해서 돌아간 날, 로체는 처음으로 설거지를 했다.
‘어쩌면 이대로 둬도 괜찮을지도.’
충격요법이 효과가 쏠쏠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체이트 폴린은 로체처럼 낯짝 좀 반반한 엑스트라가 아니다.
다름 아닌 여주의 아버지가 될 사람.
먼 훗날의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도 때가 되면 저 멀리 방생해야 했다.
‘결혼하고 짬 날 때 가끔 돌아오면 안 되나?’
겨울에만 놀러 오는 철새들처럼 말이야.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하다가 퍼뜩 깨달았다.
와, 나 그 애 되게 좋아하나 봐.
〈4컷 외전. 아무래도 사춘기인 듯〉
언제부턴가 내 이복동생으로 위장한 생판 남이 나를 누님이라고 부른다.
“누님, 진지 드셨습니까?”
어디서 봤는지 완벽한 경어를 구사하면서.
아저씨는 모르면서 경어는 능숙하다니. 그의 언어 수준이 당최 감이 잡히지 않는다. 혹시 쟤네 엄마는 맘마를 진지라고 가르친 걸까.
아무튼…….
“누님.”
“…….”
“밤새 강녕하셨습니까?”
묘하게…… 기분이 나쁘다.
“로체.”
“왜 그러십니까, 누님.”
“뒤진다.”
“왜요, 레아 양.”
카운터가 한가한 사이, 로체와 한담을 하면서 이 일을 하소연했다.
“나 아무래도 너랑 비슷한 취급을 받는 것 같다.”
“그게 무슨 뜻인지 저는 개미 눈곱만큼도 모르겠는데요?”
“현실 부정 중이구나. 반 삼백을 앞두고 149세에서 셈이 멈춘 거야. 그렇지?”
“엘프가 그 나이면 청춘이거든요?”
“아, 그래?”
난 시큰둥하게 턱을 괬다.
“로체.”
“아, 왜요.”
“체이트가 왜 저러는 걸까.”
“…….”
“왜 갑자기 날 멀리하느냐는 말이야.”
“…….”
로체가 조용히 행주를 들었다.
“글쎄요. 저는 초파리 눈곱만큼도 모르겠네요.”
그날, 로체는 처음으로 테이블을 닦았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