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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8화 (8/140)

8화

잘생긴 식객과의 생활에 점차 익숙해져 가던 어느 날.

그날따라 식자재가 빨리 동이 났다. 아마 로체에 체이트까지, 잘생김이 두 배라서 손님도 두 배로 늘어났기 때문이겠지.

덕분에 신이 난 나는 로체에게 시장에 좀 다녀오라고 했다.

“레아 양이 가세요.”

“어쭈?”

“전 오늘 대청소의 날입니다.”

“……청소를 한다고? 네가?”

“네. 하지 말까요?”

“아니, 해. 꼭 해. 번개처럼 다녀올게.”

난 로체를 두고 혼자서 식빵과 잼, 우유를 사러 나갔다.

‘체이트 몸도 아직 성치 않은데 보양식이라도 따로 만들어 줄까?’

로체는 내가 요리를 하는 게 인류의 종말을 앞당기는 행위라고 했다. 물론 악의적인 루머에 불과하다.

나도 기본적인 카페 음료나 샌드위치는 곧잘 만든다고! 발품만 잘 팔면 보양식도 꿈은 아니지.

‘한스 아저씨에게 들러서 닭을 사 가자.’

생선 가게 주인 한스 포포니 씨는 언젠가 어육이 물린다며 병아리 한 마리를 데려다 키우기 시작했다.

그게 벌써 몇 달 전 일이니까 이제는 어엿한 꼬꼬닭이 돼 있을 거다.

그 아저씨가 제 손으로 키운 가축을 직접 도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덩치에 안 맞게 심약한 사람이니, 이도 저도 못 하고 입맛만 다시다가 오늘도 모이 값만 탕진했겠지.

‘그럴 바엔 내가 데려다가 좋은 곳에 쓰는 게 낫지.’

머릿속으로 삼계탕 끓이는 법을 떠올리려다, 문득 내 하드웨어엔 삼계탕 잘 먹는 법밖에 없단 사실을 깨달았다.

‘괜찮아, 괜찮아. 닭 가져다 찹쌀 넣고 삶으면 그게 삼계탕이지.’

부디 체이트가 잘 먹어 줬으면 좋겠는데.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숲길을 걸어가던 차였다.

‘어라. 쟤 왜 저기 있대?’

카페에서 멀리 떨어진 인적 드문 길목에 체이트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반갑게 알은체를 하려고 손을 흔들기 직전, 그의 손끝에서 반짝 빛이 났다.

처음에는 스스로 신성을 써서 치유해 보려는 건가 생각했다.

그러나 반대였다. 아물어 가던 상처가 서서히 벌어지며 피가 배어 나왔다.

나는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쟤 지금 뭐 하는 거야? 미, 미친 거 아냐?’

와르르-.

봉지 속 식재료들이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야, 너…….”

순간 체이트와 시선이 마주쳤다.

“너 거기서 뭐 하냐.”

“……!”

내 싸늘한 부름에 체이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래. 너무 안 낫는다 했지.”

난 한 걸음 한 걸음 녀석에게 다가갔다. 체이트는 훤히 드러난 제 뱃가죽을 채 가리지도 못하고 뻣뻣이 굳어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어.”

“…….”

“왜 그랬어?”

“……”

“그래.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마. 중요한 건 네가 날 속였다는 거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상처 입혔다는 거니까.”

체이트는 주인공의 아버지였다. 신의 이능을 타고난 자. 단역으로 소모될 예정이었던 나와 달리, 세상을 위해 꼭 필요한 역할을 맡은 사내.

그리고, 그리고…….

‘내 고양이였던 소년.’

상처가 나으면 나가라고 했던 말이 죄책감처럼 가슴에 박혔다. 사실 내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는 일인데도.

“마음이 불안했으면 이런 짓을 벌이기 전에 한마디 말 정도는 해줄 수 있었잖아. 네 눈엔 내가 그렇게 매정한 인간으로 보였니?”

“……아뇨! 절대 아니에요.”

“그래. 그랬으면 고양이였던 널 데려올 게 아니라 한스 아저씨한테 밀고하고 동전이라도 한 닢 챙겼겠지.”

“맞아요. 누님 말이 다 맞아요. 그냥 제가, 제가 너무 불안해서…….”

제 찢어진 복부는 신경조차 못 쓰고 있는 녀석을 가라앉은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동시에 볼을 스치며 흘러내리는 분홍색 머리카락들이 가없이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아,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머리를 위로 쓸어 넘기고 땅에 굴러떨어진 식자재를 주워 담은 뒤, 손가락을 까닥이며 체이트에게 따라오라 손짓했다.

체이트는 피 흐르는 배를 움켜쥐고 고분고분히 내 뒤를 따랐다.

카페로 돌아가는 길은 긴 침묵뿐이었다.

* * *

나는 그날 체이트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내일 얘기하자.’

하지만 우리에게 내일은 없었다.

다음 날, 녀석은 말도 없이 사라졌다. 전처럼 불쑥 찾아와선 불쑥 떠나 버린 것이다.

“하.”

허탈한 웃음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지금 누가 누굴 버리고 있단 거야?”

* * *

체이트가 사라지고 사흘이 지났다. 속은 심란했지만 일상은 한결같았다.

“야,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줘 봐.”

우리 카페 진상 1호, 델린 남작의 아들 루퍼트 델린 역시 변함없는 진상이었다.

‘아메리카노는 몰라도 아이스가 뭔진 알아야죠, 손님? 자꾸 그렇게 불가능한 주문을 하시면 제가 손님께 뜨거운 주먹을 날려서 차갑게 만들어드리고 싶어지지 않겠습니까?’

서비스직을 오래 하기 위해선 진상을 사람으로 여기면 안 된다.

저건 사람이 아니다. 배를 누르면 개소리가 나오는 인형이다.

잘 짖고 자주 짖는 멍멍이 인형…….

난 마침내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어머, 그 메뉴가 마침 딱! 품절이지 뭐예요?”

“대체 왜 그건 내가 주문할 때마다 없는 거야?”

“귀한 분께서 좋아하시는 메뉴라고 소문이 나서 그런가 봐요, 호호. 다른 걸로 주문하시겠어요?”

“……그럼 뜨거운 그냥 아메리카노랑 당신 통신구 번호 하나.”

음, 이 패턴도 익숙하지.

로체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외쳤다.

“여기 뜨거운 그냥 아메리카노 한 잔이랑 한스 아저씨 통신구 번호 하나!”

“자, 잠깐! 누가 그 털북숭이 늙다리 번호를 알고 싶대? 네 통신구 번호를 달란 말이야!”

“죄송한데 제가 통신구가 없어서요.”

“카페를 하는데 통신구가 없다고? 그게 말이 돼?”

루퍼트가 실소를 지었다.

“거짓말하는 거지?”

“아뇨.”

이건 진짜다. 일곱 살 애기들도 있다는 통신 마법구가 난 단 한 개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통신구 코드 번호를 등록하려면 신분증으로 북부 행정 관리처에서 신분 확인을 받아야 한단 말이다.

잡는 사람은 이제 없는 것 같지만 일단은 도망자 신세. 섀도복싱을 하는 것이든 아니든, 북부에서 신분을 함부로 노출할 수는 없었다.

“쳇, 그럼 오늘 저녁 끝나고 시간이라도 내.”

“바쁜데요.”

“그럼 내일은?”

“바빠요.”

“……모레?”

“노.”

“젠장, 그럼 다음 주는 어때? 네가 되는 날에 아무 때나.”

“사람 인생 한 치 앞을 모르는 법인데 일주일 뒤는 약속 잡기에 좀 멀죠. 제가 사흘 뒤 죽을 예정일지 그 누가 알겠어요?”

“…….”

델린 남작의 아들 루퍼트 델린 씨는 오늘도 그렇게 빈손으로 돌아갔다.

아, 뜨거운 그냥 아메리카노 한 잔을 얻었으니 아주 빈손은 아니네.

“요즘 들어 성격이 한층 더 더러우시네요, 레아 양.”

이런 광경을 가만히 두고 보기 되게 좋아하는 로체가 뒤늦게 뒷북을 쳤다.

“성격 더러운 사장님한테 잘리고 싶니?”

“하하, 그렇게 말하면서도 절대 안 자르실 거 다 압니다.”

“네가 뭔데 그걸 확신해?”

“레아 양은 정이 많잖아요.”

로체가 그리 말하며 캐모마일 차 한 잔을 건넸다.

“커피를 내릴까 하다가 요즘 통 못 주무시는 것 같아서.”

“……고마워.”

약간 감동했다.

로체는 내 퉁명스러운 감사 인사에 미소로 화답하며 손을 내밀었다.

“2리스요.”

“…….”

진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카페 지분이라도 샀나? 하도 뻔뻔해서 자꾸 헷갈리네.

가뜩이나 체이트가 사라진 날에 대놓고 콧노래를 부르는 탓에 심기가 아주 불편해졌는데 말이지.

진지하게 로체의 퇴사 권고를 고민하던 중, 거구의 남자가 딸랑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한스 아저씨.”

“오랜만이다, 레아. 늘 먹던 민트 초…….”

일시에 주변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아, 미리 말은 안 했는데, 여기 사람들 허브에 좀 진심이다. 아마 음료가 현대만큼 다양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맛있는 허브 차 우리는 법 또한 확고하게 정립된 사회에서 상쾌한 민트와 달다구리 초코의 조합은 이단 그 자체였다.

“……그걸로 줘.”

“네, ‘그거’ 말이죠.”

주눅 든 한스 아저씨를 눈으로 위로하며 조용히 민트 초코 프라페를 만들었다.

아저씨,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민초단의 충성스러운 일원입니다. 염려 마시죠.

“그건 뭔가요?”

음료를 건네기 위해 일어서서 손을 뻗는 순간, 아저씨의 보따리가 눈에 띄었다.

매번 비린내 나는 양동이를 들고 들어와서 눈총을 받던 양반이 이번엔 웬일로 보따리람.

“아, 이거 말이냐? 글쎄 델린 남작님 성내에 하나 남은 놈이 있었지 뭐냐. 내게 대신 잡아다 죽이라고 하셔서 말이야.”

“하나 남은 놈…….”

‘설마.’

난 얼른 카운터 밖으로 나가 한스 아저씨의 보따리를 풀어헤쳤다.

“어어, 건드리지 마라. 그놈 제법 사나워!”

“……저한테는 안 사나워요.”

보따리 속에서 전의를 상실한 채 몸을 옹송그리고 있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아, 눈이 마주쳤다.

붉은 홍채.

이내 체념한 건지 스르르 눈꺼풀이 감긴다.

난 다시 허리를 곧게 펴고 아저씨에게 말했다.

“이 애, 제가 처분할게요.”

뒤에서 로체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 * *

한스 아저씨 왈.

“그런 잔인한 짓은 숙녀가 할 게 못 된단다.”

그 말을 듣자마자 곧장 카페를 나선 나는, 아저씨가 두 달째 못 잡고 있던 닭장의 꼬꼬를 친히 세상 하직시킨 후 맛있게 튀겨서 저녁 밥상에 올려 주었다.

“이제 믿을 만하시죠?”

아저씨가 쾅 하고 테이블을 내려쳤다.

“꼬꼬는 내 동생이었어. 병아리 시절부터 함께한 가족이라고!”

“병아리 시절부터 훌륭한 프라이드치킨으로 크라고 노래를 부르셨으면서 새삼 정들었다고 진 목적을 잊으시는 건 좀…….”

“그래! 물론 이렇게 되길 바라긴 했지!”

한스 아저씨는 울면서 꼬꼬-였던 것-의 다리를 붙잡고 물어뜯었다. 입맛에 맞았는지 연달아 두 개나.

털 뽑고 튀겨 준 사람 성의는 생각도 않고 연속으로 다리 두 개라니, 와 진짜 양심 없어.

평소라면 날개는 내 거라고 주장했겠지만 지금은 더 급한 사안이 있었다.

“그럼 그 고양이는 제가 데려가서 처분해도 되죠?”

“움움, 어뜨카지?”

한스 아저씨가 닭 다리 살을 한가득 베어 물며 웅얼거렸다.

“레아, 너 또 갠히 살려 두믄…….”

“안 그래요. 나중에 얘가 또 보이거든 저한테 20만 리스를 청구하셔도 좋아요.”

“……그래. 아라따.”

한스 아저씨에게 맛있는 만찬을 제공해 준 대가로 체이트를 데리고 왔다.

결국 제 발로 집 나갔던 녀석을 내 손으로 다시 집에 들인 것이다.

“어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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