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체이트는 큰 잘못을 했다. 애가 좀 불쌍해 보인다고 그 사실이 새삼 없던 게 되는 건 아니다.
빙의 전 내 친부의 모친 되시는 분께서 말씀하시길, 애가 잘못을 저지르면 용서는 해주되 죽도록 후회하게 만들어주라 하셨다.
다시는 그딴 볍씨 같은 짓을 벌이지 못하도록 말이다.
하여 나는 체이트가 깨어날 때까지 홀로 고심했다. 어떻게 해야 이 아이에게 적합한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을지.
자고로 훈육에 매는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 부모가 돼서 애를 때리는 건 좀 아니지.
그런데 나는 패고 싶다. 진짜 개빡쳐서 개패고 싶다.
“생각해 보니까…… 난 얘 엄마가 아니잖아?”
체이트는 나를 ‘누님’이라고 불렀다. 말인즉슨, 나는 얘 누나뻘이라는 거지.
‘남매는 원래 싸우면서 크는 거야.’
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빗자루를 찾았다.
카페 비품 창고 구석에 자리 잡은 누렇고 긴 빗자루를 골라 든 순간.
체이트가 눈을 떴다.
* * *
“야옹……?”
“안녕. 우리 일단 대화 좀 할까?”
빗자루를 등 뒤로 숨기고 친절하게 말하자, 체이트가 얼른 사람으로 돌아왔다.
검은 털에 가려져 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초췌한 표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래, 너도 마음고생이 심했겠지. 원래 또라이들이 지 꼴리는 대로 안 되면 속이 더 상하는 법이다.
“누님…….”
“자, 일단 물 한 잔 마시고.”
턱짓으로 탁자 앞에 준비해 둔 물 컵을 권했다. 체이트가 순순하게 컵을 들어 올렸다.
“마시면서 들어.”
난 숨겨 왔던 나의 수줍은 빗자루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옛말에 모든 잘못에는 다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라고 했단다.”
나와는 달리 체이트는 제법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녀석이 큰 결심을 한 듯 비장한 얼굴을 하고 내 앞에 무릎 꿇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무슨 벌이든 다 받을 테니 제발 버리지만 말아 주세요. 네? 누님…….”
“…….”
이렇게 처량 맞게 나오면 내가 불쌍해서 어떻게 너를…….
“오케이. 합의 본 거다?”
난 망설임 없이 빗자루를 들어 올렸다.
* * *
잠깐의 소란이 있었고, 체이트는 조금 더러워졌다.
비록 레티시아의 가느다란 팔뚝으로 난타한 자리엔 상처 하나 남지 않았지만…….
아무튼 저 검은 머리에 빗자루 먼지를 옴팡 뒤집어쓰게 만들고 나니 속이 좀 후련해졌다.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할 것이지, 쪼잔하게 가출이 뭔가, 가출이.
“하아……,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가쁜 숨을 고르다 나는 손가락 세 개를 들어 올렸다.
“3년. 딱 3년만 같이 살자.”
“……!”
체이트가 고개를 번쩍 들고 눈을 슴벅였다.
“정말요, 누님?”
“그래, 이 화상아.”
3년 후면 체이트는 열여덟 살이 된다. 헬리아스 제국법 기준으로 성혼이 가능한 나이.
어차피 그 전에 누굴 만나 풋사랑을 한들 자식을 볼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앞으로 3년간 이 애정 결핍에 정서 불안인 소년을 사랑으로 보듬어서 모범적인 청년으로 키워 보면 어떨까?
그 뒤에 멀쩡해진 녀석을 여주 어머니 되실 분에게 기껍게 넘겨주는 거지.
결혼식에서 손수건으로 눈물 콕콕 찍으며 부디 행복하게 지내라고 말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아, 이거 좀 뿌듯한데.
“3년이 지나면 짤 없이 내보낼 거야.”
“예.”
“도중에 몸뚱이 어디를 찢어발기거나 허락 없이 고양이로 변하거나 로체랑 시답잖은 일로 싸워도 즉시 강제 퇴장이다.”
“명심할게요.”
체이트가 비척비척 일어서서 내게 다가왔다. 오랫동안 꿇어앉은 탓에 다리를 절뚝이며 걸어오는 것이 쬐끔 불쌍해 보이긴 했다.
약간 누그러진 마음으로 손을 내어주자 녀석이 내 손가락 끝을 꼭 잡고 손등에 제 이마를 비비적거렸다.
“잘못했어요, 누님. 누님께 버려지는 게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요…….”
체이트의 불쌍한 제스처에 울컥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럴 때 평범한 사람은 가출을 하는 게 아니라 대화부터 시도하고 봐.”
“……몰랐어요. 저는 그런 건, 단 한 번도.”
체이트가 우물쭈물하며 옛날이야기를 해주었다.
“저한테는 그런 걸 알려줄 만한 사람이 없었거든요. 어릴 때부터 갇혀 살아서…….”
그의 과거사는 기억나는 바가 거의 없었기에 나는 이때다 싶어 귀를 쫑긋거렸다.
“갇혀 살았다고?”
“네, 지하예요.”
“지하……?”
맙소사. 사람이랑 대화도 제대로 나눠 본 적이 없단 말인가. 얜 대체 뭘 하고 살았던 거야? 이젠 화도 안 나고 그저 기가 막히기만 했다.
“어디 지하?”
“…….”
아직 여기까지 알려줄 마음은 없는 건가.
난 한숨을 푹 쉬며 그의 복부를 내려다봤다.
“상처는?”
“괜찮아요.”
체이트가 얼른 환부를 보여주었다.
따로 치료도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처음보다 멀쩡해 보인다.
신성을 전혀 못 쓰는 것처럼 굴더니, 자가 치유도 가능한 수준이었던 모양이지?
“진작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을.”
나는 혀를 끌끌 차며 아물어 가는 환부를 눈에 담았다.
“체이트.”
“네, 누님.”
“내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뭐든 물어보세요.”
“너 왜 매번 그렇게 몸이 걸레짝이 돼서 오는 거야?”
전에도 말했지만 딱히 여주의 아버지에 대해 알고 싶은 건 아니다.
난 그저 내가 만난 이 소년, 체이트 폴린의 인생이 궁금했다.
아니, 궁금해졌다.
“…….”
내 말에 어린 참새처럼 짹짹거리던 체이트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한참 후에 그가 자신 없이 중얼거렸다.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또 쫓아내실 건가요.”
“……아니야, 그런 거.”
나는 더 캐묻지 못하고 체이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러다 또다시 울컥하는 마음에 그만 동그란 뒤통수를 한 대 휘갈겼다.
이 자식은 뭐만 물어보면 사람을 자꾸 쓰레기로 만들어.
* * *
몇 분 후, 밖에 나갔던 로체가 돌아왔다.
한스 아저씨의 꼬꼬를 잡아 주기 위해 카페 문을 닫은 직후, 갑작스러운 휴가를 받은 로체는 시내로 외출을 나갔었다.
그새 어디 물 좋은 곳에서 관리라도 받고 왔는지 안 그래도 하얗고 매끈한 낯짝에 한층 더 광택이 흘렀다.
하지만 그의 맑은 얼굴은 체이트를 발견하자마자 순식간에 검게 변색돼 버렸다.
“……뭡니까?”
나는 일단 로체를 휴게실로 끌고 들어갔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딱 성년 될 때까지만 데리고 있으려고.”
“하하,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지만 레아 양은 정말.”
로체가 헛헛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정말…… 눈치가 없네요.”
“뭐?”
새삼 다 아는 걸로 왜 시비질인가.
“레아 양, 상식적으로 말이지요. 한 번 제 발로 나간 녀석이 이런 식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건…….”
돌아왔다는 건?
난 경청하기 위해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때, 휴게실 문이 벌컥 열렸다.
“체이트?”
“누님. 너무 오래 안에만 계시기에…….”
체이트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하다 고개를 푹 수그렸다.
“방해가 된다면 당장 나갈게요. 죄송해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나가는 모습이 어째 좀 애잔했다.
“따라가야 하나?”
“왜 저한테 묻습니까?”
로체가 뭐 씹은 표정으로 반문했다.
“안 따라가면 삐지겠지?”
“제가 삐질 거란 생각은 안 합니까?”
“너 삐지게? 나보다 백삼십 살은 더 먹은 게 나잇값 되게 못 하네.”
“…….”
아니, 왜 쭈그려 앉는데? 손가락으로 바닥 왜 긁는데?
“저를 이렇게 막 대한 여자는 레아 양이 처음입니다.”
“반했니?”
“아뇨. 저보다 안 예쁘시잖아요.”
열받게 하네.
로체는 콩 벌레처럼 허리를 둥글게 말고 나무 바닥의 나이테를 손으로 덧그렸다. 더는 두고 볼 가치도 없는 모습이었다.
난 로체를 무시하고 휴게실 문고리를 돌렸다.
“따라가게요?”
“어.”
“저 아직 얘기 안 끝났는데.”
“됐어. 나도 삐졌어.”
로체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거렸다.
* * *
밖으로 나가자 카페 창가 구석 자리에 앉은 체이트가 보였다. 하필 앉아도 구석이다. 불쌍해 보이게시리.
멍하니 테이블보만 쳐다보던 체이트가 내 인기척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오후의 석양처럼 강렬한 눈동자였다.
“저 나가야 하나요?”
훅 들어오는 질문에 나는 기가 막혀서 실소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앉아 머리를 마구잡이로 쓰다듬었다.
“아니야.”
“그 할아버지께서 절 싫어하시잖아요.”
미친, 할아버지래.
로체가 들으면 또 칠색 팔색을 하겠다. 하지만 로체의 불행은 곧 내 행복이지.
나는 그저 유쾌하게 웃었다.
“걔가 또 너 가지고 뭐라 하면 내가 혼내줄게. 됐어?”
“네에…….”
체이트의 볼이 수줍게 붉어졌다. 얘한테 빡쳐 있던 게 불과 삼십 분 전인데 그새 또 귀엽게 보이니 나도 참 문제다.
난 입가에 미소를 걸고 체이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 내 동생 같았다.
‘좋아, 잘 키워 봐야지.’
이 마을에서 장기간 살려면 일단 ‘폴린’이라는 성씨부터 숨겨야 했다.
진짜 레티시아의 기억에 따르면, 폴린은 ‘성스러운 존재’라는 뜻의 고대어였다.
그냥 흔해 빠진 고대어도 아니다. 저 아르키드네 신전의 신관들이 신탁을 서면으로 남길 때 쓰는 신성한 언어다.
‘체이트의 행색을 보아하니 돈 많은 신전에서 지낸 것 같지는 않고, 아마 까마득한 윗대가 파계 신관이거나 그랬겠지.’
북부에서는 보기 힘들지만 이따금 있는 경우였다.
물론 아르키드네식 고대어로 작명한 이름을 대놓고 속세에서 사용하는 용감한 파계 신관은 없을 테지만.
하여튼 폴린은 아르키드네를 숭배하지 않는 북부에서 어그로 끌리기 딱 좋은 성씨였다.
마침 내가 가명과 더불어 사용하는 성씨가 제법 흔해 빠진 편이다. 그걸 체이트에게 나눠 주면 적당하겠지.
“체이트.”
“네.”
“오늘부터 너는 체이트 핀볼트야.”
“네.”
체이트는 이유도 묻지 않고 곧장 새로운 이름을 받아들였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녀석이 이렇게 나올 거라 예상한 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레아 핀볼트고.”
“…….”
“우린 이제 진짜 가족인 거야.”
가짜 성씨에 가짜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나는 ‘레티시아 브링스턴’으로 산 세월보다 ‘레아 핀볼트’로 산 세월이 훨씬 더 길었다.
그러므로 레아 핀볼트라는 이름이야말로 내 존재를 설명하기에 더 적합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족…….”
얼떨떨하게 그 단어를 곱씹던 체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누님.”
어린 소년의 입가엔 약간의 씁쓸함과 그보다 더 커다란 안도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