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소년은 유년의 전반을 남부의 신전에서 보냈다.
매일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자가 선생이라고 찾아와 소년에게 신성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 마물을 소탕하는 기초적인 작업부터 살생에 관한 비기까지.
왜 배워야 하는지도 모르고 배웠다. 하지 않으면 성력을 억제하는 구속구를 차고 차가운 바닥에서 억겁의 시간을 홀로 견뎌내야 했으니까.
고립은 소년에게 있어 고통보다 두렵고 끔찍한 일이었다.
소년은 그렇게 기나긴 시간을 신전에서 갇혀 지냈다.
그곳에서 자신을 교육했던 선생이 말버릇처럼 하던 소리가 있었다.
‘사제님, 방만한 자는 처단해야 합니다.’
소년이 보기엔 그자가 제일 방만했다. 배움을 마친 소년은 가장 먼저 그의 숨통을 끊었다.
‘죽었어.’
첫 살인을 마친 소년은 망연하게 문가를 바라보았다.
‘이제 나는 이단으로 처분되는 건가?’
대주교는 그의 능력을 필요로 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했다.
신전 앞에 버려진 천애 고아가 자신보다 월등한 신성력을 지녔다는 걸 깨달은 순간, 그는 어린 소년을 신전의 가장 깊숙한 지하에 가뒀다.
하루하루가 세뇌와 훈육의 나날이었다. 신전은 그를 개로 기르고자 했고, 그는 순종하는 듯 보였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하지만 다 끝났다. 그는 자신을 세뇌하던 선생을 제 손으로 죽였다. 주인을 물 가능성이 있는 개를 신전이 번견으로 거둘 리가 없다.
‘또 팔에 이상한 걸 채우겠지.’
그 전에 탈출할 수 있을까. 이 문밖의 길은 가물가물하다. 길도 모르는 상태로는 버거운 작업이었다.
소년이 앞날을 고심하던 순간.
“기어코 피 냄새를 맡게 하네.”
한 여인이 고요한 지하로 내려왔다. 로브를 쓴 사제도, 밥을 배식하는 여종도 아니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잘 맞춰 온 것 같아. 그렇지?”
“누구……?”
순진무구한 물음에 여인이 답했다.
“널 여기서 꺼내줄 수 있는 사람.”
“여, 여기서?”
여인에게서 악의는 보이지 않았다. 저의도 불분명했지만.
“…….”
소년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여인은 그를 외부로 나가는 비밀 통로로 안내했다. 여인은 신전의 개구멍을 제 집처럼 익숙하게 돌아다녔다.
정신 차려보니 금세 밖이었다. 허무할 정도로 쉬웠다.
“후…….”
몇 년 만에 상쾌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신 소년이 숨결을 흩트리며 속삭였다.
“고마워. 은혜는 꼭 갚을게.”
“아니, 감사 인사는 필요 없어.”
여인이 소년의 손을 붙잡았다.
“난 지금부터 너에게 몹쓸 짓을 할 예정이거든.”
맞잡은 손바닥에서 신성의 빛이 어렸다.
“허억……!”
타인의 신성에 노출된 소년이 무릎을 휘청거렸다.
소년은 그제야 여인의 손바닥에 그려진 아르키드네의 문양을 확인했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금계를 걸었어.”
“금계? 혹시, 성력이 반 토막 나는 저주 같은 거야?”
성력의 양이 전보다 한참 미미해진 걸 체감할 수 있었다.
여인은 부정하지 않았다.
“네 힘은 파괴적인 수준이니까 외부에서는 절제할 필요가 있어. 5년 정도면 알아서 풀릴 거야. 그러니 일단은 나대지 말고…….”
여인이 멀리서 들리는 군홧발 소리에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도망쳐, 체이트 폴린.”
“……!”
어떻게 그 이름을…….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자, 잠깐만!”
그녀는 소란스러운 뒤쪽을 향해 고갯짓을 한번 하곤 북쪽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제게 이상한 저주를 걸어 놓고 도망치라니? 병 주고 약 주고 혼자 다 하는구나. 어이가 없어서 고마움도 잊힐 지경이었다.
소년, 체이트는 우선 맞서려고 했다. 성력이 반 토막 났다고 해도 여전히 그는 일반인보다 월등히 강했으므로.
정면 돌파로 밀고 나가면 버틸 수 있으리라.
그러나 오산이었다.
‘왜…… 신성을 쓸 수 없는 거지?’
기사들을 공격하려고 할 때마다 성력의 통로가 콱 막혀 버렸다.
몇 번의 무의미한 시도 후에 소년은 비로소 제게 걸린 금계가 무엇인지 알았다.
‘불살.’
앞으로 5년. 그는 신성으로 살아 있는 존재를 해할 수 없게 되었다.
깨달았으니 이제 그녀의 말대로 도망쳐야 했다.
체이트는 얼른 성력을 이용하여 본신으로 돌아갔다.
내재된 힘 자체가 반 토막 난 터라 야수화 된 외양도 본래 크기보다 훨씬 작았다. 덜 자란 고양이 수준이었다.
체이트는 그 상태로 도주했다.
바깥은 신전 내부와는 다른 의미로 야생이었다.
그는 성력을 노리고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마물들과 대치해야 했다.
이미 죽은 존재들에게는 여인의 금계가 통하지 않는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문제는 저를 추적해 온 대신전의 무리였다.
소년은 단박에 그들의 심장을 틀어쥘 힘을 갖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방어하다 도주하길 반복해야 했다.
상처 입는 건 예삿일이 되었다. 그래도 갇혀 지내던 예전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소년이 남부의 반대편까지 흘러 들어갔을 때에야 지난한 추격전이 끝났다.
장장 2년에 걸친 고독한 전쟁이었다.
그사이 소년은 성장했다.
이제 잠깐 정도는 본신을 온전히 개방할 수 있을 정도로 성력을 회복했다.
그러나 이전과 비교하면 턱도 없는 수준이었다. 불살의 저주는 몇 년째 사라지지 않고 있었으므로.
체이트는 대신전의 추적을 피하면서 제게 저주를 건 여인의 흔적을 쫓았으나, 그나마도 북부 넴페르 산맥 너머 작은 마을에서 완전히 끊겨 버렸다.
결국 금계가 자연히 풀리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3년 남았나.’
이 금계가 끝나는 3년 후, 그는 대신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복수하기 위해서.
자신을 신전 지하에 가둔 것은 아르키드네 대주교다. 그를 처단하고 완전한 자유를 얻을 작정이었다.
‘그 자만 없었다면 신전도 이렇게 끈질기게 나를 쫓지 않았겠지.’
하지만 생은 때로 의지만으로는 견디기 힘든 법.
5년을 무력하게 숨어 살라는 건 어린 소년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체이트는 점차 지쳐 갔다. 쉬이 죽지도 않고 끊임없이 재생을 반복하는 스스로에게.
자신에게 자유라는 축복과 불살이라는 저주를 한데 건네준 여인이 원망스러워질 지경이었다.
‘3년. 3년만 더 참으면 되는데…….’
몸과 마음이 모두 넝마가 된 상황.
그는 또 마물과 맞닥뜨렸다.
이번 마물은 조금 질긴 녀석이었다.
소년은 마물과 대치 중에 다리를 다친 채 벼랑 아래로 낙하했다.
마음만 먹으면 성력을 소모해서 다시 올라가 싸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공격도 방어도 취하지 않았다.
사지가 족쇄를 단 듯 무거웠다.
‘너무 지쳤어.’
그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벼랑의 잔가지가 볼을 스치고 새로운 상처를 만들어 냈다.
이어서 ‘쿵!’ 요란한 소리가 났다.
큰 충격에 뼈마디가 비명을 내질러도 소년은 신음 한번 허투루 흘리지 않았다.
‘어차피 부러져도 도로 붙고 찢겨도 아물 텐데, 무슨 상관이겠어.’
흘러넘치는 성력을 억제하지 않는 이상 자연히 치유될 상처였다.
살갗의 상처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그는 곧장 움직였다.
목적도 방향도 없는 발걸음이었다.
얼마나 긴 시간을 정처 없이 헤맸을까.
외진 마을에서도 유독 외진 숲속.
요정의 집 같은 이층집이 있었다.
체이트는 그 앞에서 이상한 여자와 맞닥뜨렸다.
“얘, 여기는 생선 가게가 아니야.”
구불구불한 분홍 머리와 발그레한 볼. 나뭇가지처럼 가늘어서 가엽게까지 보이는 몸체. 그에 비해 너무 커서 초식 동물을 연상케 하는 무해한 녹안.
그 풀잎 같은 시선이 야수화한 체이트의 작은 몸을 비췄다.
그녀는 그가 신전을 탈출한 이래 처음으로 마주한 ‘보통의 인간’이었다.
* * *
“캬앙!”
저 여자가 제 급소를 보았다. 감히……! 예의 없는 인간. 주제도 모르는 인간. 죽여 버릴 테다!
발톱을 드러내고 털을 곤두세우다, 문득 제게 걸린 금계가 떠올랐다.
“…….”
그녀는 마물이 아니라 인간이다. 저주가 남아 있는 한, 체이트는 결코 눈앞의 여자를 죽일 수 없다.
“냐아아아옹…….”
그는 터덜터덜 발길을 돌렸다. 스스로 듣기에 거북할 정도로 힘없는 짐승 울음소리가 잇새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여자의 만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뭐야, 너 다쳤어?”
“얘, 너 거기 좀 서 봐.”
귓등으로도 듣지 않자 여자는 체이트의 몸을 허락 없이 번쩍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피부를 타고 전해지는 온기가 어색했다. 그는 낯선 촉감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발톱을 드러냈다.
그런데도 여자는 소년을 품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발악하던 소년은 점차 잠잠해졌다.
그렇게, 또 다른 일상이 시작되었다.
* * *
여자는 체이트의 발목에 희고 팔랑팔랑한 것을 둘둘 감았다. 왜 그러는지 알 수도 없고 의미도 없는 것을.
나중엔 눈처럼 새하얀 음료까지 내주었다. 그건 제법 맛있었다.
‘책에서 달콤한 건 종종 칼을 숨기고 있으니 항시 유의하라 했어. 속세의 하얀 것들이 혹여 독약은 아닐까?’
앞서 크나큰 배신을 겪은 머리가 바짝 긴장했다가, 이내 천천히 풀어졌다.
만에 하나 독약이라도 별일은 없을 것이다. 어차피 고작 그런 걸로 이 몸이 죽어 나갈 일은 없을 테니.
체이트는 흰 천을 감은 발로 그릇을 고정하고 우유를 홀짝이며 때를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픔은 찾아오지 않았다. 고통이 일상이다 보니 멀쩡한 육신이 오히려 낯설 지경이었다.
“얘, 추운 데 있지 말고 내 옆으로 와.”
따뜻한 품. 부드러운 살결이 눌리며 체온이 맞닿았다.
모든 게 몹시도 낯설었다.
그리고 눈물 나게 따뜻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편안함이었다.
* * *
한 달째 되던 날, 체이트는 생각했다. 이 여인의 곁에 머물고 싶다고.
가능하면 오래.
가능하면 평생토록.
가능하면, 오직 자신만이.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