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마물이 레티시아의 침실을 덮친 그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체이트는 레티시아를 떠날 의지가 없었다. 적어도 3년 동안은.
하지만 레티시아가 마물의 습격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모른 척 감고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레티시아가 죽을 뻔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 때문에!
이 일은 체이트에게 있어 엄청난 충격이었다.
자신의 성력은 마물을 끌어당긴다. 자신이 사적인 욕심으로 곁에 있는 이상 레티시아는 안전하지 않다.
체이트는 레티시아를 위해 신체의 모든 성력을 그러모아 본신에 가깝게 수인화했다. 그만큼 다급했고, 절박했다.
침착하지 못한 행동은 때로 화를 부르곤 한다. 결국 마물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그는 복부에 상처를 입었다.
성력이 돌아오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상처는 한동안 아물지 않겠지.
하지만 그런 것은 체이트에게 중요치 않았다. 문제는 레티시아가 자신 탓으로 위협받았다는 것이다.
잠시 떠나야 할 때였다.
영원히 사라질 마음은 없었다.
신전에서 평생을 살아온 체이트에게 레티시아는 처음으로 찾아온 양지의 볕이었으므로.
제 냄새를 맡고 따라온 마물들을 모조리 처리하고 나면, 다시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물론 당신은 나를 원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가까스로 힘을 끌어모아 레티시아의 기억 일부를 봉인하고 주변을 정리했다.
그녀가 이 일로 너무 겁먹지 않도록.
“잘 있어, 레아.”
체이트는 잠든 레티시아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맞추고, 천천히 일어섰다.
고독한 어둠 속으로 복귀할 시간이었다.
레티시아의 검은 고양이는 그렇게 떠났다.
주변에 산재한 위험 요소를 모조리 처리하기 위하여.
제 상처를 살필 틈도 없이 마물을 이 잡듯이 찾아 없애고, 연어처럼 집을 찾아 귀환할 때까지.
* * *
소임을 마친 체이트가 그녀의 집 근처에서 기력을 다하고 쓰러진 날, 레티시아는 처음으로 동물이 아닌 사람을 주웠다.
* * *
체이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제 아래에서 웅크리고 잠든 레티시아의 뒷모습이었다.
‘내가 꿈을 꾸나.’
체이트는 말랑말랑한 볼 한쪽을 쭉 늘려 보았다.
‘꿈은 아니네.’
레티시아는 이번에도 새까만 짐승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자신은 또 그녀에게 구원받은 것이다.
‘또…….’
가슴께가 뜨거운 게 열상으로 인한 발열 탓인지, 널뛰는 심장 탓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체이트는 제 밑에서 불편한 자세로 잠든 레티시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리, 되게 작고 동글동글하다.’
제 위에 겹겹이 있던 담요를 끌어다 덮어 주자, 그녀는 “끄응.” 소리를 내며 담요 끝을 붙잡고 몸을 웅크렸다.
자칫 잘못하면 부서질 것처럼 작고 마른 몸이었다.
‘먹을 건 그렇게 좋아하면서 대체 왜 살이 안 찌지?’
염려스러운 시선이 레티시아를 꼼꼼히 살폈다.
앙상한 팔다리, 동그란 어깨, 머리카락과 똑 닮은 분홍색 속눈썹, 그 아래의 오뚝한 코와 깨물기 좋아 보이는 입술까지.
아래로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 윤곽을 따라가 보았다. 솜털이 겨우 스칠 만큼 아슬아슬한 공백을 남겨 둔 채로.
“레아.”
아니다. 이건 그녀의 진짜 이름이 아니다.
체이트는 자신이 고양이로 분해 있던 시절에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진짜 이름을 기억했다.
“레티시아.”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올라왔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내려 제 몸을 바라보았다.
상처 입은 육신이 욱신거렸다. 성력이 바닥난 상태로 치료할 틈도 없이 마물을 소탕했기에 상태는 점점 나빠져만 갔다.
“윽…….”
짧은 침음을 흘린 그는 레티시아의 꼭 감은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언제 아팠냐는 듯, 순식간에 해사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화끈거리는 열상도 잊을 만큼 강렬한 감정.
너무 순수해서 오히려 숨 막히는, 지독하게 붉은 감정이 그를 억세게 끌어안고 있었다.
* * *
체이트는 레티시아가 저를 내보내려던 이유가 자신이 ‘고양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고양이만 아니면 계속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솔직하게 제 이름을 말하고,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그녀가 원래 저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 문제만 해결되면 함께할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상처가 다 나으면 여길 떠나.’
돌아오는 대답은 매몰찬 거절이었다.
‘떠나라고?’
체이트는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는데. 내가 돌아올 수 있는 곳도 여기뿐인데.
‘떠난다면…… 어디로?’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절대 안 되지.’
후회할 게 뻔한 결심을 했다.
‘주웠으면 책임을 져, 레티시아.’
그녀를 속이기로.
* * *
속내를 감추고 레티시아의 곁에 머문 지 몇 주가 지났다.
최근, 꼬장꼬장한 엘프 노인이 자신을 수상쩍게 여기는 게 느껴진다.
그야 당연하겠지.
직접 마력을 소모해서 치료를 해 주는데도 상처에 차도가 없으니.
엘프 노인은 돈독 오른 사기꾼처럼 보이지만 사실 받은 값에 대해서는 제대로 일을 했다.
제 마력으로 상처가 아무는 걸 확인했는데 다음 날이면 도루묵이 되어 있으니, 의심하지 않을 리가 없다.
다행히 레티시아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직접 보지 않는 이상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직접…… 보지 않는 이상.
* * *
들켰다.
레티시아에게 그간의 비밀을 목격당했다.
‘엘프 노인이 뭔가 수를 쓴 게 분명해.’
갑자기 안 하던 청소를 하겠다며 자신을 집에서 내쫓은 것부터 수상하긴 했다. 레티시아와 일부러 마주치게 할 속셈이었겠지.
‘끝장이야.’
체이트는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그런 무용한 짓을 했을까?’
그는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상처 입혔다. 빠른 속도로 치유되려는 열상을 억지로 뜯어내고 회복을 늦췄다.
물질적으로 이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행위였지만, 그의 충동적인 선택은 이후에도 여러 번 되풀이되었다.
‘아니, 충동은 아니지.’
그는 레티시아가 상처가 다 나으면 나가라고 한 순간부터 한편으로 이런 상황을 가정했다.
본래의 그는 레티시아가 아는 것처럼 무력하고 순진한 소년이 아니니까.
물정을 모르는 건 사실이지만, 범인의 삶보다 훨씬 각박한 현실 속에서 그는 생존을 위해 투쟁해왔다.
어리숙해 보일 수는 있어도 그 내면까지 새하얀 도화지는 아니다.
본래의 자신이라면 이런 후회나 죄책감 또한 느끼지 못했을 테지.
하지만 지금은…….
‘내가 그녀를 상처 입혔어.’
심장이 아릿하게 쑤셨다.
마물이 침입했던 그날 밤처럼.
“이번엔 내가…….”
내가 직접 그녀를 상처 입힌 거야.
그저 생애 처음으로 찾아온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는데.
체이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어느새 억제가 풀린 신성이 빠르게 제 몸을 치유하고 있었다.
어서 빨리 여기를 떠나라는 듯이.
* * *
비밀을 들킨 그날, 레티시아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체이트를 바라보았다. 그녀 스스로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정말 당장에라도 눈물이 후두두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보자 체이트의 심장 또한 철렁 내려앉았다.
타인이 자신을 위해 흘리는 눈물.
그건 가뭄 속 단비처럼 기꺼운 온정이었으나, 동시에 쇠고랑처럼 묵직하고 갑갑한 마음의 짐이기도 했다.
어느 쪽도 생전 느껴 본바 없는 감정이었다.
양극단으로 치미는 두 가지 감정.
낯설었다.
체이트는 한편으로는 그녀의 슬픈 시선을 평생 사로잡아 두고 싶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으로 인해 비로소 안심하고 웃는 얼굴을 보고 싶기도 했다.
어느 쪽이 더 우세하냐고 하면…….
‘그래도 웃는 게 제일 예쁘지.’
체이트는 헛헛하게 실소했다. 이곳에 오고부터는 자신이 점점 머저리가 되는 기분이었다. 복수니 뭐니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레티시아가 그의 새로운 중심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사랑을 받는 법도, 주는 법도 모르는 서투른 자신은 레티시아에게 폐만 될 것이므로.
하지만 체이트는 좀처럼 그녀의 영역을 떠나지 못했다. 고양이 모습으로 마을 뒷산에 있는 숲을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카페 근처에서 커피 향을 맡으며 누워 있기도 했다.
이제 사람들에게 들키면 레티시아가 곤란해지는 걸 알기에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다.
레티시아가 내린 사약 같은 커피 냄새만 맡고, 얼굴은 보지 못하고 오는 날이 늘어갔다.
이상하게 아무것도 먹기 싫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배가 고파도 무기력하게 누워 있기만 했다.
한스에게 붙잡힌 날에도 체이트는 며칠을 굶어 기력이 쇠한 상태였다.
그는 이제 멀리 갈 생각도 없이 아무 풀밭에나 드러누웠다. 고양이의 자르르한 털이 따가운 풀에 닿아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자니 하얀 먼지들이 햇살에 반짝였다.
‘휘익!’
본능적으로 앙증맞은 손을 움직였다. 그렇게 발라당 누워서 허공의 먼지를 잡고 제 꼬리를 잡아당기는데, 문득 조각구름이 눈에 띄었다.
뭉게뭉게 구름 위로 레티시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보고 싶다…….’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레티시아가 그리웠다.
신이 그의 바람을 들어준 것일까.
대신전 사제를 따돌리고 도처의 마물들을 일소한 체이트는 어이없게도 웬 털북숭이 남자의 손에 붙잡혔다.
반항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한스.’
남자의 이름이 익숙했다.
레티시아가 한스 아저씨라고 불렀던 사람이 이 털북숭이였나. 카페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봐, 역시 남자였잖아.’
그는 레티시아와 면식이 있는 사람이니 괜한 소란을 벌여 이목을 끄는 건 좋지 않아 보였다. 체이트는 일단 가만히 있기로 했다.
적당히 기회 봐서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
이상한, 아니, 익숙한 냄새가 났다.
썩은 사약 냄새.
이런 비장한 냄새는 레티시아가 내린 커피에서밖에 나지 않는다.
‘설마.’
설마는 진짜였다.
꿈에서라도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머리 바로 위에서 조잘거리며 한스의 주문을 받고 있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리고 예기치도 않게 자신이 들어 있던 자루가 풀렸다.
레티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
그토록 보고 싶었던 레티시아였다.
고작 며칠 안 본 걸로 병이 날 정도로 힘들었던 얼굴.
순간 이기적인 감정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다시는 그녀를 속이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체이트는 본능처럼 눈을 감았다.
마치 주인을 찾아 헤매다 지쳐 잠든 새끼 고양이처럼.
* * *
레티시아는 체이트에게 가족이 되자고 했다.
‘가족…….’
그녀와 가족이라. 물론 꿈에 그리던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가족과 레티시아가 원하는 가족이 과연 같은 의미일까.
‘절대 아니겠지.’
레티시아는 자신을 어린 동생으로만 보고 있다.
성장이 덜 끝났으니 당연히 그러겠지만, 체이트로서는 초조한 일이었다.
자신이 성장할 때까지 그녀에게 소중한 누군가가 생긴다면.
“윽.”
상상조차 끔찍하다.
체이트는 그녀의 가족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동생으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빨리 성장해야 해.’
잘 먹고, 잘 배우고, 잘 커야 한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썩 괜찮은…… 아니, 아주 괜찮은 남자가 돼야 한다.
체이트는 몰래 주먹을 그러쥐었다.
앞으로가 무척 다사다난할 듯싶었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