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12화 (12/140)

12화

체이트와 만났던 겨울이 지났다.

나는 어느새 집사에서 보호자가 되었다.

본격적으로 체이트를 거둬 먹이기로 결심한 나는 곧장 〈고양이 사회화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제대로 된 식기 사용법부터 평범한 인간이 응당 지녀야 할 예의와 사교의 자세까지, 싹 다 새로 가르쳤다.

“자, 누가 네게 도움을 요청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먼저 손을 내밀고 도와줘야 해요.”

“그렇지. 그런데 상대가 반말로 나오면?”

“얼마까지 줄 수 있냐고 물어봅니다.”

“잘했어. 싸가지 없는 애들은 공짜로 도와주는 거 아니야.”

난 체이트에게 최대한 많은 관심과 애정을 주고 인간적인 교육을 하는 데 집중했다.

다행히도 체이트는 반항심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얌전한 아이인지라, 내 교육 방식에 군소리 없이 잘 따라 주었다.

게다가 원체 똑똑해서 시키면 뭐든지 다 잘했다. 이따금 시키지 않은 짓까지 잘하는 건 좀 의외였지만.

언제는 아침에 일어났더니 체이트가 카페 청소를 하고 있더라. 그게 기특해서 칭찬해 줬더니 녀석은 매일 아침 바닥을 쓸고 닦았다.

또 어느 날은 요리, 그리고 어느 날은 빨래였다. 놀랍게도 전부 나보다 잘했다.

누가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과탄산소다를 어디서 구해서 갖다 쓴 거지? 베이킹소다로 과일을 닦는 기특한 짓은 어떻게 생각해 냈고?

어쩌면 체이트의 천직이 가사 도우미는 아닐까.

하나 한 방면으로 재능을 따지기엔 얜 그냥 다 잘했다.

예상 밖의 쉬운 일상 용어를 모르는 게 흠이었지만, 그거야 처음 주워 올 때부터 줄곧 그랬으니 새삼스러운 것도 없었고.

원래 사람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 그 자체면 인간미가 없다. 우리 애는 그런 반전 매력까지 놓치지 않기 위해 맹하게 있는 거다.

……그랬는데 세상에 이게 뭐야.

체이트의 수인화 발톱에 유리컵이 무슨 종잇조각처럼 댕강 잘려 나가는 게 아닌가. 아주 그냥 한 큐에 반 토막이 나 버렸다.

‘맹한 게 아니라 힘을 숨긴 거였나…….’

그건 내가 내린 커피 맛에 감동한 옆 동네 손님이 남다른 풍미를 참지 못하고 냅다 집어던진 컵이었다.

그 컵이 내 마빡으로 날아오기 직전에 반으로 동강이 난 것이다.

“누님, 괜찮으십니까?”

체이트가 물었고,

“와, 개쩐다. 장미칼이 따로 없네.”

나는 감탄했다.

주위에서 사람들이 그 발톱은 뭐냐고 수군거리긴 했는데, 얘 사실 수인이라고 설명해 주니 ‘안 그래도 인간같이 안 생겼기에 그럴 줄 알았다’며 박수 세 번 치고 넘어갔다.

역시 엘프와 드워프가 살아 숨 쉬는 북부.

여기 사람들 진짜 납득 잘한다. 잘생기고 예쁜 것에 유독 관대하기도 하고.

와중에 고양이만 아니면 된다는 한스 아저씨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전설의 장미칼 사건이 일단락되고 나는 체이트를 향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질문을 던졌다.

“너 혹시 나무도 자를 수 있니?”

목공을 시켜 봤다.

예상대로 재능에 십분 어울리는 직업이었다. 한 달 만에 집 앞에 오두막을 지어 놓은 걸 보고 나는 다시 감탄했다.

본인 말로는 로체를 생각해서 특별히 지었다고 하는데, 누가 봐도 쫓아내려는 의도가 명백해서 그 오두막은 컨테이너 옮기듯 마법구로 압축해서 갖다 팔았다.

덕분에 부수입이 꽤 쏠쏠했다. 물론 그 돈은 체이트의 미래를 위한 자금으로 고스란히 묶어 놓았다.

이후엔 ‘혹시 이런 것도……?’의 연속이었다. 체스, 작문, 토론, 꽃꽂이, 제과 제빵까지. 진짜 시키면 다 했고, 심지어 다 잘했다.

‘얘 혹시 천재인가.’

이런 인재를 시골 변두리에서 썩힐 수는 없는 노릇.

체이트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 나는 녀석을 불러서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너 수도로 가지 않을래?”

헬리아스 제국의 수도 데본에는 유서 깊은 아카데미가 여럿 있다. 개중 가장 명성 있는 졸데르 시립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면 창창한 미래는 따 놓은 당상일 테지.

“너라면 왠지 대성할 것 같아.”

내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체이트가 불쑥 입을 열었다.

“싫습니다.”

이토록 단호한 거절은 오랜만이었다.

“왜? 좋은 기회인데.”

“거긴 누님이 안 계시잖습니까.”

체이트가 말했다.

“누님이 없는 곳에서 누리는 부귀영화는 한낱 허상에 불과합니다. 저는 이대로 누님과 평생토록 함께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너어…….”

난 감동에 겨워 체이트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등을 퍽퍽 두드리며 나도 너뿐이라고, 우리 평생 같이 살자고 외치며 엉엉 울었다.

그러다 콧물을 훌쩍 들이마신 순간.

‘어라?’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이게 아닌 것 같은데.’

이 세계에서 5년을 넘게 눌어붙어 있다 보니 너무 우리 집 같아서 잠시 까먹었다.

여기가 소설 속이고, 체이트가 여주 아빠가 될 몸이라는 걸.

‘일 났다.’

체이트 폴린은 내가 당초 우려한 대로 북부에 뼈를 묻기 일보 직전이었다.

* * *

체이트를 곁에 두기로 결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망상을 한 적이 있다.

체이트와 익명의 여주 어머니분이 해피 에버 애프터한 웨딩 마치를 올리고 나는 그걸 첫 줄에서 뿌듯하게 지켜보며 눈물을 닦는 거다.

그리고 체이트는 내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하겠지.

‘누님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존경합니다, 누님. 사랑합니다, 누님.’

잠시 후 그림자 형상의 여주 어머니 분이 이렇게 말씀하실 거다.

‘우리 그이를 잘 키워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괜찮다면 나중에 제 아이의 대모가 되어 주실 수 있으신가요?’

한 씬 나왔다 사라질 캐릭터에 빙의해서는 여주 아버지의 은인이자 여주의 대모까지 되다니!

그야말로 성공한 엑스트라의 표본이 아닌가.

그러나 어디까지나 망상에 불과했다. 복권을 긁기도 전에 당첨을 예상하며 설렘에 밤잠을 설친 머저리가 바로 나였다.

그나마 책임 의식이라고 해 봐야…….

‘얘도 때가 되면 소설이 정해 준 운명의 짝을 만나게 되겠지? 만에 하나라도 북부에서 결혼하게 되면 신혼집은 남부에 구해 주자.’

……이 정도?

체이트가 좋은 아버지가 되도록 잘 키울 생각만 했지, 여주의 탄생 자체를 고민하지는 않은 것이다.

내가 이미 있는 스토리를 뜯어고치는 수준의 일을 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어차피 이 마을 사람들 다 착해 빠졌으니, 굳이 내가 아니라도 얜 우리 옆집쯤에 얹혀 지내다가 남부 어드메로 내려가서 미래의 성녀님을 낳고 잘 살 팔자라고 생각했다.

다시 돌이켜 봐도 안일했다.

“있잖아, 혹시…….”

잠깐의 상념에서 겨우 빠져나온 난 가장 먼저 체이트의 품에서 얼굴을 떼어냈다.

체이트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내 얼굴을 보고는 휴지를 뽑아왔다.

그가 내 얼굴을 닦아 주며 말했다.

“네, 듣고 있습니다.”

“너 그 평생이라는 게, 그러니까…… 이 마을에서 계속 살겠다는 의미야?”

뜬금없는 질문에 체이트의 붉은 눈이 동그래졌다.

“예? 아뇨. 그럴 리가요.”

오? 아직 희망은 남아 있나?

“누님 곁에 평생 있겠다는 거죠.”

“……어?”

“누님만 계시면 굳이 여기가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희망이 있었는데요…….

“내, 내가 그럴 마음이 없다고 한다면?”

“아까까지만 해도 그럴 마음이 있으셨던 것 같은데.”

“아냐. 생각해 보니 너랑 평생을 같이 사는 건 안 되겠어.”

“왜요?”

“왜냐니…….”

돌직구로 밀고 들어오는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체이트가 때를 놓치지 않고 덧붙였다.

“아, 혹시 누님이 나 말고 같이 살 사람이라도 있나?”

장난스러운 질문이었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고 있었다.

음, 이건 아마도 ‘이 모지리 누님을 대체 누가 데려가겠어?’와 같은 남매 모멘트겠지.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던 나는 열심히 짱구를 굴려 보았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는 거의 수절하다시피 살아온지라 마땅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그나마 허우대 멀쩡한 지인이라고 해 봐야.

“……로체?”

“그건 동거가 아니라 봉양이고.”

저런, 그새 할아버지 취급이 아주 극에 달했구나.

“여성 혼자 사는 집엔 믿음직한 사내 하나쯤 있는 게 좋다고 들었습니다. 누님께서도 절 곁에 두시면 나쁠 건 없을 텐데요.”

“아니, 그건 그런데.”

어째 대화를 이어 갈수록 점점 말리는 기분이라 나는 재빨리 비장의 패를 꺼냈다.

“너 벌써 그런 말 하면 후회할걸? 나중에 여자라도 생겼을 때 내가 장가가지 말고 평생 같이 살자고 징징거리면 어떡하려고?”

결혼 의사도 슬쩍 떠볼 겸 이렇게 말하자 체이트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어깨가 엇박자로 떨리는 것이 안 봐도 웃참 중이다.

“야, 결혼이 우스워?”

누군 하고 싶어도 못 하는데!

내가 한마디 쏘아붙이자 체이트가 마지못해 얼굴을 들었다. 반반한 낯짝엔 미처 지우지 못한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누님, 혼인은 혼자 하는 게 아니지요.”

“그러니까 내 말은 나중에 짝이 생기면…….”

“나중에?”

눈을 가늘게 뜬 채 내려다보는 녀석의 태도에 난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얜 평소엔 온순한데 가끔 이렇게 단문으로 사람 쫄리게 할 때가 있다.

어릴 땐 그나마 순진한 구석이 있어서 괜찮았는데 사회를 배우면서 급속도로 닳아 버렸다. 내 탓인가…….

눈치 빠른 녀석은 내가 긴장했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불어 동생에게 쫄았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는 것도.

“아, 이런.”

난처하게 미간을 문지르던 녀석이 내 뒤에 서서 뭉친 근육들을 살살 밀어냈다.

“너 내가 이런다고…….”

“전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누님.”

“…….”

얜 어쩜 안마도 기가 막히지. 금세 긴장이 풀리고 노곤해졌다.

……아니! 방심하면 안 된다. 체이트 얘는 꼭 자기 곤란할 때만 내가 좋아할 법한 짓으로 시선을 돌리는 버릇이 있다. 이를테면 안마라거나, 고양이 꾹꾹이 같은 거.

“너 내가 아무렇지 않은 척하니까 짝없이 사는 게 좋은 줄 아나 본데, 이거 진짜 외로워.”

“외로운 건…… 예, 저도 그건 싫습니다.”

“그렇지?”

내가 반색하며 묻자 체이트가 순순히 그렇다고 긍정했다.

“전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 어, 뭘……?”

반사적으로 나오려는 리액션을 집어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인지 어깨를 누르던 손이 살짝 멈칫거렸다. 이어서 목덜미에 허탈한 한숨이 내려앉았다.

“뭘 기다리냐고요?”

체이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야…… 누님께서 사내가 필요한 날을 기다리지요.”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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