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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13화 (13/140)

13화

……사내?

사내가 필요한 날이라.

“딱히 필요 없는데?”

외롭긴 한데, 남자가 필수냐 하면 그건 또 아니라서.

“하하…….”

체이트는 그저 웃었다.

한동안 조용해졌던 녀석은 내 어깨를 아주 말랑말랑하게 풀어 놓고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전 정말 누님 말고는 누구와도 같이 살 생각 없습니다.”

“…….”

오, 아르키드네 신이시여.

아무래도 당신의 어린 양이 태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 * *

“큰일 났다, 로체.”

“또 뭡니까?”

로체가 휴게실로 쳐들어온 나를 보며 읽던 책을 내려놓았다.

“노크는 좀 하고 들어와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여기 공용 휴게실인데.”

이 녀석, 3년 사이에 휴게실을 자기 침실처럼 꾸며놓았다.

지금도 로체는 내 취향과는 거리가 먼 벨벳 소파에 누워 여가를 즐기던 참이었다. 뭐, 지 돈으로 새 걸 사서 바꾼다니 딱히 말리진 않았다.

“그래서 뭔데요?”

“내가 애를 잘못 키운 것 같아.”

“저런……. 그런 거 아니니 상심하지 말아요, 레아 양.”

로체가 다가와 내 어깨를 꼭 붙잡고 말했다.

“걘 원래 좀 이상했어요.”

“…….”

체이트와 로체는 3년째 못 잡아먹어 안달 난 사이였다. 처음엔 둘이서 눈만 마주치면 웃길래 쟤네 사실은 서로 좋아하나 했는데 아니었다.

‘할아버지, 허리 아프실 텐데 들어가서 쉬세요. 여긴 제가 맡을게요.’

‘고양이 머리로 무슨 주문을 받는다고. 여긴 내가 맡을 테니 너야말로 들어가지 그래?’

이러고 일주일도 안 돼서 나한테 순서대로 하소연을 늘어놓더라.

‘누님, 저 정말 그 할아버지와는 함께 살 수가…… 나가라고요? 아뇨. 노인분이니 제가 참겠습니다.’

‘레아 양, 저 정말 그 살쾡이랑은 못 있겠…… 꺼지라고요? 아뇨. 괜찮습니다. 착하고 예쁜 제가 참아야죠.’

대충 이런 일련의 적응 기간을 거치고 나서야 둘은 서로를 가구 내지는 탐탁잖은 동거인 정도로 취급하는 데 합의했다.

지금도 그렇다. 로체는 내 심각한 고민을 듣고도 시큰둥했다.

“그 녀석이 레아 양이라면 껌뻑 죽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잖아요. 그놈의 누님 소리, 누가 가르쳤는지 아주 귀에 딱지가 앉겠습니다.”

“물론 날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 하지만 평생은 좀 그렇지 않니? 걔도 이제 성년이 코앞인데 슬슬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야지.”

“레아 양, 그건…….”

로체가 개구쟁이처럼 코를 찡긋거렸다.

“레아 양도 못 하셨으면서.”

“난 안 한 거야.”

“네, 네.”

“아니, 정말로 안 한 거래도?”

제아무리 K-로판 패치를 받았다고 해도 이 세계의 생활방식이나 사고관은 21세기 한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남녀의 결혼 적령기는 창창한 스물 전후. 시부모 봉양과 대가족 사회는 기본. 심지어 결혼에 출산이 디폴트가 되는 시대란 말이다.

작년에 델린 남작의 아들 루퍼트 델린이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문을 그만두고 내게 청혼의 꽃다발을 보내온 적이 있었다.

거기 동봉한 편지의 내용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일단 첩으로 들어와라. 남자애를 낳으면 우리 아빠한테 부탁해서 내 본처로 들여 주마.

이 세계 사내놈들이 죄 이딴 헛소리를 낭만적이라고 지껄이는데 임신과 동시에 죽음 확정인 이 몸으로 결혼 생각이 들겠나?

참고로 루퍼트의 편지는 체이트가 발견 즉시 화형식을 치르려는 것을 겨우 뺏어서 델린 남작에게 다이렉트로 송부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달에 루퍼트는 모 가문의 겁나 세 보이는 아가씨와 결혼했다.

그 아가씨 손에 귀가 잡혀 식장으로 끌려들어 갔다는 소문이 있는데 관심이 없어서 사실 여부는 확인 안 해 봤다.

“그래요, 안 한 거라고 칩시다! 레아 양이 결혼을 안 했는데 그 살쾡이만 콕 집어 결혼해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둘이 잘 맞던데 이참에 쭉 같이 사시죠.”

“안 돼.”

절대 안 되지, 아무렴. 걘 무조건 결혼해서 남부에 신혼집 만들고 애 낳고 행복해야 해. 아니, 결혼은 안 해도 애는 만들어야 한단 말이다.

내 단호한 거절에 로체가 흥미를 보였다.

“의외네요. 그놈을 엄청 예뻐하신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예뻐해. 그러니까 결혼해야지.”

“레아 양 보기보다 꼰대네요.”

나보다 백삼십 살은 더 먹은 게 남 사정도 모르면서 뭐라는 거야.

체이트가 자식을 제때 못 보면 세상이 가볍게 망한다니까? 흑막 대공이 금지된 사술로 이 대륙을 날려먹을 예정이라고.

그런데 그걸 막을 수 있는 인물이 성녀 코렐리아 한 명뿐이란 말이다.

이럴 때 여주 어머니에 대한 키워드라도 있다면 찾아내서 체이트랑 둘이 붙여 놓기라도 했을 텐데.

애석하게도 여주 어머니는 코렐리아를 낳다 죽었다는 것 외엔 어떠한 상세 언급도 없었다.

뭐 내가 기억 못 하는 게 있을 수도 있긴 한데, 대뇌에 체이트만큼의 정보조차 남아 있지 않은 걸 보면 무명의 단역이 확실했다.

‘그쪽도 애 낳다 죽을 엑스트라 운명이구먼. 이 소설은 엑스트라 인권들이 하나같이 팍팍하단 말이야. 피켓이라도 들고 시위를 해야 나아질는지 원.’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가려고 하자 로체가 옷소매를 붙잡았다.

“잠시만요.”

“왜? 안 도와줄 거면 가서 책이나 마저 읽어.”

“누가 안 돕는답니까? 그 녀석이 결혼해서 집 나가면 저야 좋죠.”

넌 안 나가니.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꾹 눌러 참고 물었다.

“방법이 뭔데?”

“뭐냐고 물어보시는 것도 우스운데요. 올해로 딱 3년째 아닌가요?”

“……아. 그러네.”

시간 참 빠르다.

* * *

이튿날 카페 오픈 30분 전.

나는 체이트를 카페 중앙 스툴에 앉히고 따뜻한 우유를 건네며 대화를 시도했다.

“체이트.”

“예, 누님.”

“네가 벌써 열여덟이지.”

땅콩만 했던 너를 주워온 게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정말 유수 같구나.

그런 쓰잘머리 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밑밥을 깔다가 슬쩍 본론으로 넘어갔다.

“어느새 약속한 3년이 다 됐어.”

“그러네요. 시간이 참 빠릅니다.”

“……그래서, 이제 네가 여길 나가 줘야 할 것 같은데.”

“음, 그렇군요.”

얘가 전처럼 배라도 찢어발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일이 순순하게 돌아갔다.

난 신나서 얘기했다.

“그럼 어디로 갈래? 내가 모아 놓은 네 결혼 자금…… 아니, 이사 비용이 좀 있는데 그걸로 어디 남부 따뜻한 지역에 아담한 전셋집이라도…….”

“집은 괜찮습니다, 누님.”

“응?”

“마침 저번에 만들어 둔 오두막이 하나 남았거든요. 마법구 안에 압축해 둔 상태니까 이 앞에 풀어 놓고 거기서 살면 됩니다.”

“…….”

그러니까 지금.

“내 카페 앞에서 계속 살겠다고?”

“예.”

“여기 내 땅이야.”

“월세잖아요.”

얘가 갑자기 아픈 곳을 찌르네.

“집주인분께 허락은 다 받아 놨습니다. 가계약서도 받아서 확인했고 마당만 따로 임차할 시 보증금도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건 우리 카페 집주인이 요안나 양과 같이 놀 정도로 미남에 진심인 여자고, 네가 지나치게 잘생겼기 때문에 가능한 조건이 아니었을까?

지난날 보증금 문제로 집주인과 대판 싸워 본 전력이 있는 나는 그저 빙긋 웃을 뿐이었다.

“아예 타지로 나가 살 생각은 없는 거고?”

“누님, 멀리 떠나고 싶으십니까?”

“아니. 난 여기에 계속 있어야지.”

“그럼 저도 여기 있어야죠.”

그게 왜 그렇게 되냐.

“난 더 이상 너를 옆에 두고 키워 줄 용의가 없는데.”

“그런가요? 공교롭게도 저 역시 더 이상 누군가에게 양육될 나이는 아니라서.”

체이트가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벌써 성혼도 할 수 있는 나이 아닙니까.”

아니 그걸 아는 놈이 이래?

* * *

난 그 후로 〈고양이 사회화 프로젝트〉를 종료하고 〈여주인공 탄생 프로젝트〉로 노선을 변경했다.

체이트에게 결혼에 대한 오만 미담을 다 풀어 놓고 라테 좋아하는 할머니처럼 혼인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그러나 죄다 무소용이었다.

잔소리라도 할까 치면, 녀석은 고양이로 변해서 보란 듯 하품을 쩍 하고 세수를 해댔다.

그럴 때면 진짜 열이 머리끝까지 뻗쳐서 한스 아저씨한테 갖다 바치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그렇게 무의미한 교육의 시간이 흐르고 흘러 체이트가 스무 살이 되던 해, 마침내 내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 * *

난 낑낑거리며 끌고 온 여행 가방을 체이트 앞에 철퍼덕 내려놓았다.

“너도 이제 좋은 짝 만나서 가정 꾸릴 나이가 되었지. 자식 보기 전까진 돌아오지 말렴. 자, 보따리는 내가 다 싸 놨으니 넌 몸만 움직이면 돼. 우선은 내 방에서 썩 꺼지는 일부터 실행해 볼까?”

체이트는 그저 씩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녁은 제가 할까요, 누님?”

……제발 듣는 척이라도 해 줘라.

아, 저녁으로 나온 바게트와 감바스 알 아히요는 아주 맛있었다.

체이트가 뭐든 다 잘하긴 하는데, 얜 역시 요리를 제일 잘해.

* * *

〈여주인공 탄생 프로젝트〉가 난관에 봉착했다.

우리 애가 연애를 안 한다.

3년 안으로 자식을 봐야 할 우리 애가 연애를 안 한다.

아니 얘가 애당초 여자를 좋아하긴 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고백은 숱하게 받았어도 누군가를 따로 만나는 건 본 적이 없다.

얜 피크닉도 나랑 갔고, 축제도 나랑 갔고, 밤 산책도 나랑 갔…….

가만.

……내가 문제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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