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난 섬광 같은 깨달음 이후로 줄곧 체이트를 멀리했다. 그랬더니 녀석이.
“저처럼 못나고 부족한 동생과는 창피해서 함께하기 힘들겠지요. 누님께서는 아름답고 총명하고 완벽한 분이시니까요.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주제넘었습니다. 그동안 누님께서 참고 배려해 주신 것도 모르고…….”
……라며 일반인 뺨 때리는 막말을 허락도 없이 지껄이는 게 아닌가.
“그런 거 아냐!”
“그럼 오늘 식사 같이할까요?”
“좋아!”
……어?
아니, 취소!
안 좋아!
정신을 차려보니 난 체이트와 시내 레스토랑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주문한 스테이크가 나오자마자 나이프를 들고 한입 크기로 썰어 주는 녀석을 보며 생각했다.
‘음, 역시 내가 문제네.’
나는 체이트가 썰어 준 고기를 냠냠 씹어서 꿀떡 삼킨 뒤 입을 열었다.
“너도 벌써 스물인데 혹시 좋아하는 여자애…….”
“없습니다.”
“그럼 혹시 이상형은…….”
“없어요.”
단호하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내가 아니다.
“대충이라도 이런 여자면 좋겠다, 하고 생각해 둔 사람도 없어?”
“음, 굳이 말씀드리자면…….”
체이트가 물컵을 내려놓고 턱을 괴었다.
“키는 160 중반 정도에 저보다 나이가 네 살 정도 많고 머리와 눈 색이 밝으며, 귀여우면서도 청순한 느낌의 여성이 좋습니다.”
뭔데 이렇게 구체적이야.
없다고 할 땐 언제고 묘사가 아주 술술 나온다. 이러면 제아무리 눈치가 바닥인 나도 눈치챌 수밖에 없지.
‘체이트에게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구나!’
호재였다.
나는 신나서 더 물어보았다.
“그럼 만약에 그런 여자가 있으면 결혼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니?”
“예. 그쪽만 좋다면 당장에 혼인 신고부터 할 겁니다.”
“……!”
나는 그만 감격에 겨워 입을 틀어막았다.
네 녀석, 아주 남자로구나!
“내가 소개해 줄 테니 시간만 내렴! 어떻게든 찾아서 데리고 올 테니까!”
테이블 위로 상체를 숙이고 체이트의 손을 꼭 잡았다. 체이트가 맞닿은 손을 보며 웃었다.
“불가능합니다, 누님.”
“어째서?”
“누님께서 결혼을 안 하시는데 제가 어찌 식을 올립니까?”
“…….”
결국 또 내가 문제였다.
* * *
충격이다.
내가 결혼을 안 해서 체이트가 결혼을 안 한다니.
‘무슨 장유유서 따지는 조선 시대도 아니고.’
답답함에 한숨을 푹 내쉬자 카페 손님으로 있던 델린 남작 부인이 특유의 새치름한 말투로 물었다.
“어머, 레아 양 무슨 일 있어?”
“그게 말이죠오.”
나는 옆집 아줌마에게 하소연을 하듯 줄줄이 체이트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음, 그럼 레아 양이 결혼을 하면 되지 않나?”
“아니, 남 일이라고 그렇게 쉽게 말씀하시면.”
“그렇지만 레아 양 벌써 스물네 살이잖아. 딱 결혼하기 좋은 나인데. 음,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레아 양은 왜 결혼 안 해?”
“…….”
괜히 얘기했다.
“우리 애가 그렇게 졸졸 따라다닌 걸 보면 꽤 괜찮은 여자인 건데.”
“……하하, 칭찬으로 들을게요.”
때는 3년 전.
루퍼트 델린의 꽃다발과 편지를 델린 남작가에 반송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델린 남작 부인이 카페를 찾아왔다.
‘당신이 우리 아이가 첩으로 삼겠다던 그 레아 양?’
평소라면 귀찮아서라도 아니라도 잡아뗐겠지만, 왠지 돈 봉투 하나 쥐여 주면서 우리 애랑 헤어지라는 개이득인 말씀을 하실 것 같아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돈줄이 돼 주실 분께 친절히 커피도 한 잔 내려 드렸다.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난 두둑한 돈 봉투를 하나 받아 들었다. 아싸, 이걸로 체이트 옷 사 줘야지.
난 공돈 생겨서 너무 좋은데 부인께선 이런 일이 익숙지 않은 듯 난처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있잖아요, 그거 약소하지만 받아 줘요. 그리고 우리 애랑은 연락하지 말아 줬으면…… 어머, 이 커피 상했나 봐.’
부인께선 그 뒤로 화장실을 한 댓 번 들락날락하시더니 다음 날부터 우리 카페 단골이 되셨다.
“이 집 커피를 마신 날엔 화장실을 잘 가.”
“커피가 원래 변비에 즉효입죠.”
“응, 근데 유독 잘 가.”
델린 남작 부인이 내가 내린 커피를 홀짝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레아 양, 정말 결혼 안 해?”
어르신들은 당최 1절만 하는 경우가 없다. 난 영업용 미소를 만면에 걸고 답했다.
“제가 결혼은 생각이 없어서요.”
“그렇구나. 그럼 동생은 어쩌게?”
“그게 문제죠.”
내가 다시 한숨을 푹 내쉬자 커피 잔 위를 톡톡 두드리던 남작 부인이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레아 양, 배우 소개해 줄까?”
* * *
델린 남작 부인은 연기력 좋은 라이징 연극 배우를 여럿 후원하고 있었다.
본인 말로는 아름다운 것들을 위한 투자라는데, 그런 가슴 따뜻한 선행이 왜 남작님껜 비밀인 걸까.
“이 친구 연기 잘해. 근데 좀 바람둥이야. 여자한테 마음을 못 주거든. 레아 양 상처받을지도 모르겠다.”
“오, 아주 딱 좋은데요.”
그렇게 내 결혼 상대가 될 배우가 정해졌다. 약간 느끼한 외모긴 해도 꽤 잘생겼고, 무엇보다 바람둥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스킨십이 자연스러운 남자였다.
“허그하고 들어갈까요?”
“……그냥 팔짱이나 끼죠.”
남자에게 선을 확실히 긋고 체이트와 미리 약속한 식사 장소로 갔다. 예전의 그 레스토랑이었다.
“누……!”
체이트가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하려다 손을 내렸다.
“옆에 있는 남자분은 누구십니까?”
경계심이 잔뜩 어린 말투였다.
나는 보란 듯 팔짱을 깊숙이 끼고 대답했다.
“내 애인이야. 우리 곧 결혼할까 해.”
체이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결혼이요?”
“응.”
“……이상하네.”
체이트가 눈썹을 움찔거리다 불현듯 실소를 터뜨렸다.
“난 누님께 남자 있다는 소릴 들은 기억이 없는데.”
“그야 내가 비밀로 했으니까.”
“아아.”
얘가 오늘따라 왜 이럴까.
평소와 달리 묘하게 불량한 태도. 중간중간 짓는 미소 또한 어딘지 뒤틀린 느낌이다.
‘왜 이렇게 화났어?’
내가 결혼하는 날만 손꼽아 기다린 거 아닌가? 상대가 마음에 안 들어서 저러는 거야?
내 옆에 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음, 체이트만큼은 아니어도 엑스트라 기준으론 꽤 생겼는데.’
우리 배우 친구는 분위기를 풀어 보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체이트는 내내 무표정을 고수했다. 어찌나 냉랭한지 시선에서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 손 풀지?”
한참 동안 묵언 수행을 하던 체이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거의 협박에 가까운 말이었다.
“하하, 처남이 너무 야박하네.”
“……처남?”
체이트의 입술이 일순 크게 비틀리더니.
“아, 그렇죠. 제가 처남이겠네요.”
예상외의 긍정과 함께 느슨하게 풀어졌다.
“죄송합니다, 형님. 제가 낯을 가려서 적응이 좀 느립니다.”
“그, 그래? 낯을 굉장히…… 오래 가리네. 하, 하하, 하하하…….”
배우 친구의 이마에 비지땀이 흘렀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그 모습을 조용히 외면했다.
세상에 쉽게 버는 직업이 하나 없더라. 모쪼록 돈값을 하렴.
이어지는 대화는 다행히도 순조로웠다.
체이트는 처음의 어색함이 장난이었다는 듯이 능숙하게 분위기를 풀어 나갔다.
배우 친구도 한결 편해진 얼굴로 자연스럽게 허풍을 늘어놓았다.
“아, 글쎄 내가 레아를 보는 순간 이 여자가 내 여자다 싶었다니까? 청순가련한 얼굴에 가녀린 몸매, 그야말로 남자들이 딱 좋아하는 스타일이잖아? 내가 정말 어디 정착하기 쉬운 남자가 아닌데 말이야…….”
‘음, 차라리 닥쳐 줬으면.’
나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체이트도 이따금 미소를 짓고 호응하는 것 외엔 조용한 편이었다. 배우 친구의 목소리만 점점 드높아졌다.
“하하, 언제 한 번은 레아가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는……!”
“그만 일어나죠.”
술기운이 살짝 올라오려던 때, 체이트가 배우 친구의 말을 끊고 파장을 알렸다.
“엉? 이제 막 재밌는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왜.”
술이 얼큰하게 취한 배우 친구가 딸꾹거리며 아쉬움을 표했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요. 누님께서 주무실 시간이에요.”
슬슬 피곤하다 싶더니 잘 때가 다 돼서였나. 난 또 배우 친구의 헛소리가 너무 지겨워서 그런가 했지.
체이트가 미련 뚝뚝 떨어지는 배우 친구에게 말했다.
“그리 아쉬우시면 저희끼리라도 계속 마실까요?”
“어? 어어, 그럴까?”
“제가 남자 형제가 없어서 좋은 형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줄곧 생각했거든요. 2차는 제가 살 테니 가시죠.”
난 오늘 할 일 다 했으니 이만 사라져 달라는 의미로 배우 친구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이미 취기가 오른 놈은 내 소극적인 제스처를 눈치채지 못하고 호탕하게 외쳤다.
“그거 좋지!”
체이트가 빙긋 웃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그럼 누님을 바래다드리고 가죠.”
“체이트.”
“괜찮아요, 누님. 많이 안 마실 겁니다.”
체이트의 시선은 전과 다름없이 유순했다.
음, 뭐. 괜찮겠지.
나는 너무 졸려서 더 말릴 여력이 없었다.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이고 체이트에게 반쯤 기댄 상태로 집까지 갔다.
뒤에서 뻘쭘하게 따라오는 배우 친구의 혼잣말이 들릴락 말락 했다.
“저거 진짜 남매 맞아?”
* * *
‘괜찮겠지’는 무슨. 안 괜찮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다음날 배우 친구에게 이별 통보를 받았다.
사귄 적도 없는데 말이다.
‘미, 미미, 미안한데요. 저는 아, 안 되겠어요.’
훗날 들은 이야기지만 그는 말더듬이가 되어 연극계를 은퇴한 후, 남부의 작은 사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다고 한다. 거참 멀쩡하던 남자가 하루아침에 뭘 봤기에 저러는지.
‘술 먹고 자빠졌다가 신이라도 영접했나.’
체이트에게 물어봤지만 얘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날이요? 둘이 맥주 한 잔씩 하고 헤어졌는데요.”
“……그래?”
“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체이트가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 어차피 진짜 애인도 아니었던지라 나는 금세 무심해졌다. 그저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게 아쉬울 뿐.
제 옆에 철퍼덕 앉은 나를 체이트가 맑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누님, 무슨 일 있으세요? 피곤해 보이시는데.”
“음, 별일은 아니고.”
진짜 연애는 아니지만 차였다는 말은 역시 좀 자존심 상해서 하기가 싫었다.
“나 헤어졌어.”
“그래요?”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내가 찼어.”
“그렇군요.”
저 자식 웃는다. 너 설마 못 믿냐?
“진짜야. 내가 찼어.”
“예, 누님.”
“……사실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어. 내가 꽤 눈이 높거든.”
괜히 구라 친 게 민망해서 말이 많아졌다.
“눈에 차지도 않는 남자랑 결혼할 수는 없잖아?”
“…….”
이번에도 ‘그렇군요.’ 하고 사람 열받게 하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체이트는 의외로 조용했다.
“그럼 누님은…….”
한참 만에 녀석이 입을 열었다.
“어떤 남자와 결혼하고 싶으십니까?”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