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15화 (15/140)

15화

“어?”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에 나는 당황했다.

아니 일단 상황적 여건이 받쳐 줘야 그런 상상을 할 수 있지 않겠어? 난 이 세계에서 결혼의 결 자도 꺼낼 수 없는 몸이란 말이다.

그래서 그냥 되는 대로 떠들었다.

“글쎄. 키는 한 180센티미터 후반에 듬직하고 돈 많은 남자?”

“키가 크고…… 돈이 많은 남자요?”

“응. 아, 그리고 권력도 있어야 해. 제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막상 지킬 힘이 없으면 언제 어디로 뺏길지 모르잖아.”

“권력…….”

턱 끝에 손마디를 갖다 댄 채 고심하던 체이트가 불쑥 물었다.

“얼굴은요?”

“응?”

“누님, 얼굴은 안 보십니까?”

얼굴이야 당연히 잘생기면 좋지만, 뭐 이 세계 남자들 얼굴은 대체로 좀 생겼으니까 딱히 기준을 잡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얼굴이 밥 먹여 주면 모를까, 그게 아니면 굳이?”

“…….”

아, 한숨 쉰다. 왜 저래?

난 영문 모르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거 잘하면 설득할 수 있는 기회인 것 같은데.

“자, 보다시피 나는 눈이 너무 높아서 결혼하려면 한참 먼 것 같거든? 그러니 네가 먼저 가는 건 어때?”

“확실히 충족하기 어려운 조건이네요.”

결혼 얘기만 나오면 매번 무시로 일관하던 애가 웬일로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서더니.

“누님의 눈에 차는 결혼 상대를 찾는 건 정말 힘든 일이겠습니다.”

이러고 훌쩍 숲길로 산책을 나가는 게 아닌가.

진짜 왜 저래? 스물에 사춘기가 왔나?

* * *

체이트는 한동안 조용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폭탄선언을 했다.

내가 버릇처럼 그에게 ‘나가 살든지 결혼을 하든지 해라’라는 말을 내뱉은 순간이었다.

“그러죠.”

“뭐?”

세상에, 내가 잘못 들었나?

귀를 후비고 다시금 물었다.

“나간다고?”

“예.”

“…….”

잠시 어안이 벙벙해서 눈을 슴벅이고 있자 체이트가 입꼬리를 죽 당기며 웃었다.

“나가라고 하셨잖아요.”

“물론 그랬지.”

그래. 물론 내가 툭하면 집 나가라, 독립해라, 하다못해 남쪽으로 여행이라도 가라고 노래를 부르긴 했지.

네가 알겠다고 대답해 준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말이야.

“체이트!”

“예.”

“당장 짐부터 싸라!”

멍하니 뺨을 꼬집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애 마음 변하기 전에 얼른 밖으로 보내 버려야지.

다행히 체이트는 짐을 다 싸고 기차표를 끊을 때까지 허튼소리로 앞선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난 남부로 가는 기차 앞에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체이트를 배웅했다.

“흑, 체이트…….”

눈물이 정말 많이 나왔다. 그간의 노력이 마침내 열매를 맺는구나 싶어서.

난 체이트의 손을 부여잡고 이렇게 말했다.

“좋은 여자가 있거든 꼭 끝까지 가렴. 아니, 굳이 좋지 않아도 괜찮아. 하룻밤 치기로 무슨 일이 생기고 한 2년쯤 뒤에 여자가 도망가 버린다고 해도 내가 다 알아서 키워 주마. 넌 아무 걱정하지 마.”

“레아 양, 그만 하세요. 변태 같습니다.”

짐꾼으로 데려온 로체가 초를 쳤다. 난 로체를 가볍게 무시하고 체이트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잘생긴 외모와 한층 색이 짙어진 적안이 날 반겼다.

녀석, 언제 이렇게 컸을까.

5년을 함께 동고동락한 아이를 타지로 보내자니 감개무량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시큰했다.

“누님께서도 제 걱정은 마십시오. 꼭 멋진 사내가 되어 돌아오겠습니다.”

안 돌아와도 된다. 거기서 운명의 여인을 만나서 졸속으로 결혼한 뒤 ‘죄송하지만 저는 여기에 뼈를 묻어야겠습니다. 부디 강녕하시길. 이만 총총’ 같은 편지를 보내도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어.

“부디 건강하렴, 체이트!”

손수건을 흔들며 마지막까지 배웅했다. 돌아오는 길이 조금도 쓸쓸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속은 후련했다.

내가 원작의 가장 중요한 스토리를 망가뜨리는 민폐 엑스트라로 남지 않았다는 게 어딘가. 이 세상이 망할 일 없이 해피엔딩으로 흘러가게 된 게 어디냐고.

그러니 괜찮았다. 나 하나의 외로움 정도는 세계 평화와 비할 바가 되지 못했으니까.

그랬는데…….

“누님.”

녀석이 돌아왔다.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코렐리아가 태어나야 할 바로 그 해에!

뿐인가?

“저는 이대로 결혼하지 않고 누님과 평생 함께 살 겁니다.”

나의 친애하는 동생이자 훗날 여주의 아버지가 되어야 할 체이트 폴린.

그가 독신을 선언했다.

* * *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3년 동안 여자도 안 만나고,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했으면.

‘그럼 얘는 대체 어디서 뭘 하다 온 거야?’

3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특히 체이트에겐 더더욱 그랬다.

키나 뼈대가 훌쩍 자랐음은 물론이요, 턱선조차 전처럼 갸름하다기보다는 어딘지 다부진 느낌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던 도련님이 산전수전 다 겪고 노련한 사내로 성장한 느낌.

체이트가 도련님 소릴 들을 법한 유년을 보낸 것 같진 않지만, 적어도 외양은 딱 고귀한 귀족가 자제 같았으니까.

지금의 체이트는, 뭐랄까.

‘왠지 조금 위험한 느낌…….’

“누님, 손끝에 상처가 있으시군요.”

뜻밖의 현실에 일순 아찔해진 나는 체이트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응? 뭐가?”

“여기, 두 번째 손가락이요.”

체이트가 대뜸 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제가 떠날 때까지만 해도 이런 건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리 말하며 상처 난 손등에 입을 맞춘다. 일련의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음, 통닭 굽다 데였지 아마.”

한 일 년 전인가, 이 년 전인가. 체이트도 없고, 손님도 없고, 연말은 다가오고. 로체랑 같이 우리 심심한데 요리나 할까 하고 오븐을 연 게 화근이었다.

“피부가 하얘서 눈에 띄네요.”

체이트가 손등에서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나는 간지러움에 그만 몸을 움츠렸다. 확 빠지려는 손을 녀석이 꽉 움켜쥐었다.

“이거 별거 아닌데.”

“아니기는.”

단호하게 부정하고는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운다. 그의 입술 닿은 자리가 환하게 빛나더니 이내 상흔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너 이거 어떻게 한 거야?”

눈이 휘둥그레져서 쳐다보자 체이트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뉘 집 동생인지 느슨하게 풀어진 얼굴도 참 잘생겼다.

“신성입니다.”

“신성?”

그러고 보니 체이트는 성력이 있는 인물이었지. 그간은 너무 쓸모가 없었기에 깜박 잊었다.

“이게 그 신성 치유구나. 신기하다…….”

“밖에서 따로 배웠습니다.”

‘밖에서 배웠다’라. 어디 산 좋고 물 좋은 변두리 사원에라도 짱박혀 있었나?

‘남부로 가서 연애를 하든지 결혼을 하든지 하라니까. 둘 다 안 하고 그야말로 탱자탱자 놀다 왔구나.’

보내온 편지들이 죄다 남부의 휴양지 주소로 찍혀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땐 그저 체이트가 남부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잘살고 있는 것 같다며 안심했었다.

‘얼굴이 멀끔한 걸로 보아 밥은 잘 먹고 산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이네.’

“아무튼.”

난 그가 잡고 있던 손을 슬쩍 빼내며 말했다.

“잘 왔어. 그리고 아까 한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할게.”

믿기 어려운 현실을 부정하며 빠르게 돌아섰다.

'내가, 아니 세상 사람이 죄다 독신주의여도 너는 그러면 안 되지.'

주인공 아버지가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니.

그건 내가 이 한목숨 바쳐 2세를 잉태하고 싶은 남자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곤란한 일이었다.

* * *

3년 만에 돌아온 동생이 껌딱지가 되었다.

3년을 용케 참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녀석은 내게 끈덕지게 들러붙었다. 밥을 먹을 때나, 카페 일을 할 때나, 청소를 할 때나.

심지어는…….

“야옹.”

“고양이인 척하지 말고 내 침대에서 꺼지시지.”

“야아옹?”

고개를 45도로 기울인 검은 고양이의 낯을 보니 기가 차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체이트 핀볼트. 당장 네 방으로 돌아가.”

그 말에 체이트가 뿅 하고 사람으로 돌아왔다.

“전엔 같이 잤잖아요.”

“너 어디 기억이 왜곡된 거 아니니? 첫날 딱 한 번, 그것도 네가 고양이인 줄 알았을 때뿐이었어. 그걸 이런 식으로 써먹어?”

“……흐음.”

너무 심각하게 잘생긴 얼굴로 입술 댓 발 내밀지 마라. 귀엽고 자시고를 떠나 얼굴 낭비하는 것 같아서 빡치니까.

내 마음을 어찌 알았는지 체이트는 금방 표정을 갈무리하고 제 얼굴에 딱 어울리는 왕자님 미소를 지었다.

“누님, 지금 밖에 비가 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가 사실은 지난 3년간 빗소리에 트라우마가 생겼습니다. 하여 밤엔 도저히 혼자 잠들지 못하는 슬픈 사정이…….”

쇼를 해라.

그런 걸 써먹을 거면 일찍 좀 써먹을 것이지, 성인이 다 돼서 이게 뭔가.

난 더 묻지도 않고 체이트를 밖으로 내쫓았다. 녀석의 널찍한 등을 밀어내고 문을 쾅 닫자 극심한 피로가 밀려왔다.

‘앞으로 어쩌지.’

남자랑 담쌓고 산 내 영향인지 체이트는 여자에게 관심이 쥐뿔도 없어 보인다. 이대로 내 껌딱지로 살다 죽을 생각인가.

시선을 틀어 벽에 걸린 달력을 보았다.

2월 말이었다.

촉박하다.

‘적어도 한 달 내에는 거사를 치러야 하는데.’

이대로 가다간 밤일은커녕 여자와 눈 마주칠 일도 없겠다.

넌지시 연애나 결혼 운만 띄워도 ‘누님이 결혼을 안 하셨는데 어쩌구’ 레퍼토리만 돌아오고.

결국 내가 시집을 가지 않는 이상, 체이트의 변명에 대거리할 군번이 못 된다는 건가.

그러나 내 입장에 어디 결혼이 가당한가. 나는 이 신분제 로판 사회에서 결혼하기엔 아주 극악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이제는 누가 날 찾는지 마는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도망자 신세고, 2세를 볼 수도 없는 데다가, 신분도 불투명했다.

이런 나를 루퍼트 델린 같은 대책 없는 머저리가 아니고서야 대체 누가 좋다고 데려가겠나?

‘이럴 줄 알았으면 루퍼트 델린이 멍청하게 굴 때 적당히 받아 주고 나중에 이혼하는 건데.’

〈여주 탄생 프로젝트〉가 실패로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그 말은 곧 〈세계 종말 프로젝트〉의 서막을 의미하기도 했다.

‘나 하나로는 안 되겠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해.’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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