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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16화 (16/140)

16화

로체, 요안나 양, 한스 아저씨, 그리고 델린 남작 부인까지. 나의 몇 안 되는 지인들이 한데 모였다.

다 모아 놓고 보니 하나같이 너무 하찮아서 나는 살짝 서글퍼졌다. 엑스트라의 인맥이란 고작 이런 것인가.

“네가 결혼을 안 해서 동생이 결혼을 안 한다고?”

한스 아저씨가 물었다.

“걔보단 레아 양 결혼이 더 시급하지 않나요? 하하.”

로체가 매를 버는 소리를 하며 웃었다.

“그럼 레아 양이 결혼하면 되겠다! 내가 이번에 사별한 친구 소개해 줄까? 돈 많고 성격도 좋아. 근데 머리숱이 좀 없어.”

델린 남작 부인이 손가락을 요리조리 돌리며 정신 사납게 조잘거렸다.

“잘생겼나요?”

요안나 양이 오동통한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델린 남작 부인에게 물었다.

“…….”

나는 그들 사이에서 가마솥에 볶아지는 참깨처럼 한참을 시달렸다.

“저는 글쎄 결혼 생각이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왜 생각이 없는데? 레아 양 나이면 결혼해서 애 낳고 오순도순 잘 사는 게 보통 아니야?”

아닙니다. 제발 21세기 처자에게 라테 감성 주입하지 말아 주시죠.

……물론 저도 체이트에게 그러고는 있습니다만! 이쪽은 정말 불가능하단 말입니다.

델린 남작 부인의 지극한 공세에 난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그럴듯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게 말이죠. 제가 사실은 육아에 소질이 없거든요.”

“어머, 나도 그런데.”

아니 그렇게 쉽게 긍정을 하시면 제가 말을 얹기가 몹시 난감한걸요?

델린 남작 부인은 호호 웃으며 커피 잔을 들었다.

“난 그래서 우리 루퍼트 낳았을 때 3년 동안 유모한테 맡겼잖아.”

“……그래도 괜찮던가요?”

“응. 가끔 보니 커 있긴 하던데?”

루퍼트 델린이 왜 그런 나사 빠진 인간이 됐는지 살짝 알 것도 같았다.

그 얘기를 듣던 한스 아저씨가 옆에서 말을 보탰다.

“레아, 걱정하지 마라. 육아가 어려우면 남편에게 맡겨! 우리 마누라도 내게 다 맡기고 8년째 외출 중이다.”

“그건 외출이 아닌 것 같…… 아무튼요.”

단순히 육아 불가능으로는 사유가 부족한 것 같아서 나는 얼른 솔직한 사정을 털어놓았다.

“사실 제가 아이를 못 낳습니다.”

“어머.”

“저런.”

“어이쿠.”

“그럴 수 있죠. 까딱하다 레아 양 같은 딸이라도 낳으면 앞날을 어찌 감당…… 읍.”

탄식 어린 감탄사 사이에서 유독 튀는 로체의 입을 틀어막으며 말을 이었다.

“결혼하기 싫은 건 다 그것 때문입니다. 제가 사실상 불임이거든요.”

내 말에 분위기가 급격하게 무거워졌다.

한스 아저씨가 위로의 말을 건넸고, 델린 남작 부인이 침울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레아 양은 아이만 없으면 결혼도 괜찮다는 거네?”

“예? 예, 뭐……. 그런데 아이 없는 결혼에 응할 상대가 과연 있을까요?”

이 고리타분한 로판 사회에서 말입니다.

내 말에 델린 남작 부인이 커피 잔을 리드미컬하게 두드리다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맞다! 레아 양, ‘우심결’에 가입하는 건 어때?”

“우심결……이요?”

“응. 우리 사돈의 팔촌의 이웃의 조카가 아는 옆집 친구가 만든 회사인데, 요즘 아주 인기야.”

뭔진 모르겠지만 남이 만들었다는 건 알겠다.

“그게 귀족은 아닌데 신분이 애매하고 연줄이나 돈이 좀 있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맞는 배필을 만날 때 이용하는 거거든? 조건이나 원하는 부분을 미리 명시해 두니까 애초에 그 점을 적어 놓으면 나중에 문제 될 것도 없어.”

뭐야. 흔한 결혼 정보 회사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기 신분 등록해야 하잖아요. 제가 외부에 개인 정보가 노출되는 걸 조금 꺼리는 편이라.”

“오호호, 별걱정을 다 한다.”

델린 남작 부인이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레아 양,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

나는 잠시간 침묵 후에 천천히 남작 부인의 손을 맞잡았다.

“사랑합니다, 귀족 마님. 존경합니다, 귀족 마님.”

그렇다. 남작이라도 귀족은 귀족. 이 세계 대빵. 까라면 까야 하는 권력의 지존.

엑스트라 인맥 하찮다는 거 다 취소한다.

이거면 충분하다.

아, 역시 신분제가 최고야.

* * *

어쩌다 보니 결혼을 하기로 했다.

이 세계 와서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건 진작 물 건너갔다고 생각했는데 이거 참 쑥스럽구먼, 허허.

아무튼 내가 익명의 상대에게 제시한 결혼 조건은 이러했다.

사지 멀쩡하고, 정신 건강하고, 아이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딩크족을 지향하며, 2주 안으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식을 올릴 수 있는 사람.

일부 기준들이 상당히 빡세긴 했지만 자본으로 세상천지를 다 뒤지면 하나쯤은 뭐가 있지 않을까?

‘있기는 개뿔.’

“매칭된 사람이 한 명도 없다네.”

델린 남작 부인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미안해. 내가 꼭 좋은 사람 구해 주고 싶었는데.”

“하하, 괘, 괜찮아요.”

안 괜찮았다.

이거 기다린다고 일주일을 꼬박 날렸다. 하루하루가 시급한 마당에 일주일이면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라고…….

“신분은 내가 보증했으니까 딱히 문제 되진 않았을 거구, 아마 다른 게 걸린 것 같은데.”

“역시 자녀 계획이나 결혼 시기가 문제였을까요?”

“흐응, 그것도 그렇구.”

델린 남작 부인이 ‘우심결’으로부터 반려된 내 신청 서류를 슬며시 건네주었다.

“금전 자산이 문제 아니었을까? 레아 양의 카페가 본인 소유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물 자산을 따로 보유한 것도 아니니까.”

“아.”

월세가 문제였습니까?

그래. 여기도 속세의 사고방식은 한결같구나.

솔직히 좀 억울했다. 내가 돈이 없어서 집을 못 사는 게 아니었으니까.

부동산 매매에 필요한 증빙 서류가 몇 개인 줄 아나. 임대차계약서와 신분증-위조-, 인감-가명-으로 끝날 수 있는 월세 계약과 달리 이쪽은 아주 절차가 복잡했다.

등본이나 영수증 따위를 적당히 위조한다고 해도 결국 북부 세무국에 들통날 가능성이 있을뿐더러, 이 모든 걸 현금 박치기로 승부 보자면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 부동산을 돈으로 사요, 빚으로 사지. 그런데 대출은 그 기준이 거의 보험 회사에 맞먹었다. 내가 가난해서 세를 든 게 아니란 말이다.

도망자는 쪽방 단기 투숙이 아니고서야 결국 월세 살게 돼 있다. 이건 국룰이다.

‘저 돈 많아요.’

라고 말해도 아무도 안 믿어 주겠지.

미신고 된 자산이라는 게 들통 나 탈세로 잡혀갔다가 졸지에 브링스턴가로 퀵 배송될지도 모른다.

애당초 과거에 집주인이랑 대판 싸운 것도, 상가 계약을 집주인 명의로 하고 보증금과 비율 조건을 협상하다가 그리된 거니까. 내가 이쪽으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어쩔 수 없죠.”

나는 결국 풀이 죽은 채 맞선 계획을 파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진짜 결혼 못 하는 거 맞네.’

내가 독신주의라고 할 때마다 비웃던 로체에게 더는 반박할 수가 없겠구나.

시간은 시간대로 흘렀고, 자존심은 상했고, 진척된 건 하나도 없고.

나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 * *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아침.

“누님.”

“응.”

“이게 뭡니까?”

허탈하게 묻는 체이트를 향해 환한 웃음을 돌려주었다.

“뭐긴 뭐야. 피크닉이지.”

체이트가 주위를 쓱 둘러보다가, 깊은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피크닉은 원래 저와 누님, 단둘이 보내는 시간 아니었습니까?”

돗자리를 빽빽하게 채운 여성 손님들이 일시에 체이트를 주목했다.

“무슨 소리예요, 체이트 군. 소풍은 여럿이 와야 제맛이죠.”

“맞아요. 오랜만에 돌아왔으니까 마을 사람들이랑 안부도 나눌 겸 함께 보내면 좋죠.”

“체이트, 우리 말 놓았던 거 기억나? 왜 3년 전에 카페에서 내가 휴지에 통신구 번호 써 놓고 간 날…….”

그들 사이에서 나는 빙그레한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내가 언제 피크닉을 가자고 했지, 우리 둘이 가자고 했니?”

“…….”

“난 그런 말은 추호도 안 했어.”

계획을 변경했다.

내가 결혼을 못 한다면 체이트의 인생관을 바꿀 만큼 좋은 짝을 찾아주면 될 게 아닌가.

생각이 미치자마자 나는 체이트에게 관심이 있다는 또래 여자애들을 싹 다 모아 야유회를 열었다.

……그랬는데 왜.

“왜 하필 낮 소풍입니까? 햇빛이 이렇게 강한데……. 엘프 피부는 민감하다고요.”

“……너한테 같이 가자곤 안 했는데.”

“레아! 가재도 구울까? 마침 갓 잡은 싱싱한 녀석들이 있는데.”

“……저한테 등딱지 뜯어 달라고 할 거면 굽지 마세요, 아저씨.”

“레아, 레아! 미니 수저 세트가 없어요! 이런 사소한 게 다 소수 종족 차별이라고요!”

“애당초 초대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준비를 해요…….”

어째서 댁들이 여기 계십니까.

“하, 하하…….”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주 시끌벅적한 것이 마을 축제가 따로 없구나.

야유회 모집 글에 로체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다 모이게 된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워낙 작은 마을이다 보니 뭐 하나 계획하면 다들 신나 가지고 지들도 끼겠다고 사족을 못 쓴다.

아니, 무슨 오일장 날짜 세면서 기다리는 우리 할머니도 아니고. 이벤트에 목이 말라 있는 치들이라 이건 어쩔 수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피크닉 장소로 고른 동산 주변엔 여기저기 깔개가 깔렸고, 왜인지 구석에서는 아저씨들이 바비큐를 굽고 아주머니들이 포커를 치고 있었다.

‘괘, 괜찮아! 어쨌든 체이트에게 관심 있는 애들은 다 여기로 모였으니까!’

이제 나만 제때 빠져 주면 된다.

나는 유독 인기 만점인 우리 자리 주변 상황을 열심히 지켜보았다. 벌써 미래의 올케 후보들 신경전이 장난이 아니었다.

“체이트 군, 나 너무 추운데 겉옷 좀 빌려줄래요?”

“어머, 얘. 체이트는 추위를 안 탄다니?”

“잘생긴 남자는 잘생김으로 피부 층을 보호하고 있어서 추위를 안 탄다는 것도 모르니? 너 정말 상식이 부족한 아이구나.”

“잘생긴 남자는 스스로 보호할 게 아니라 우리가 나서서 보호해야 할 존재야. 너야말로 상식이라는 단어에 대한 상식은 있는 건가 의심스럽구나.”

대체 저것들은 남자 꾀러 왔다면서 왜 저런 논제로 싸우고 있는 것인가. 요안나 양이 들으면 신나서 떠들 테니 주의해야지.

나는 한심스러운 상황을 외면하기 위해 반대편을 돌아보았다.

“체이트, 이거 내가 만든 도시락인데 먹어 볼래?”

“잠깐, 얘! 너 손은 씻었니?”

“아까 나오면서 씻었어. 왜?”

“여기까지 오면서 먼지 묻었을 거 아니야! 그런 더러운 손으로 체이트 군에게 음식을 주려고 들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뭐야, 너 괜히 내 도시락이 너무 예뻐서 시비 거는 거지?”

“하! 착각도 유분수다. 혹시 몰라서 알코올에 적신 손수건을 가져왔는데 쓰든지 말든지!

“착각? 미안하다! 너 정말 세심하구나!”

“흥, 고마우면 그 완벽한 도시락의 계란말이 하나 정도 나눠주든지!”

다른 건 몰라도 이 둘이 앞으로 십 년 정도 돈독한 우정을 다지며 ‘남자 따위 중요치 않아’를 주창하고 다닐 건 알겠다.

‘빠질 타이밍을…… 모르겠어.’

정상들이 없다.

나는 어질어질한 상황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한동안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체이트가 다가와 내 어깨를 위로하듯 쓰다듬었다.

……너는 왜 여기 있는 건데.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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