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17화 (17/140)

17화

“괜찮으십니까, 누님?”

“으응. 나 신경 쓰지 말고 놀아…….”

제발, 멀쩡한 애들이 많아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이 중에 네 타입이 하나쯤은 있길 바란다.

“몸도 약하신 분이 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이셔서는…….”

체이트는 조금 화가 나 보였다.

제 의견을 묻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판을 키웠기 때문일까.

하긴, 그건 확실히 기분이 나쁠 만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너도 나처럼 시커먼 앞날이 훤히 보이는 입장이 되면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니.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이야기가 엇나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사는 건데. 여주 탄생 정도는 소설의 고정 값이라고 생각해서 너무 안일했다.

‘수능도 벼락치기로 봤는데 설마하니 빙의해서까지 이런 어영부영한 인생을 살 줄이야.’

짧은 반성을 끝으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최대한 빨리 여기서 빠져 주는 게 상책이다.

“난 잠시 머리 좀 식히고 올 테니까 다들 잘 놀고 있어.”

뒤에서 체이트가 ‘누님’ 하고 나를 불렀지만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숲속 오솔길로 들어섰다.

원체 인적이 드문 길인 데다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동산으로 모여서 길목은 매우 한적했다.

나는 양지바르고 평평한 바위 위에 벌러덩 누워 잠시간의 여유를 만끽했다.

‘아아, 이 고요함.’

“엣취!”

……춥다.

아무래도 북쪽인지라 날이 쌀쌀했다. 북쪽 지방 토박이들은 추위를 아예 안 탔지만 수도 출신인 나는 경우가 다르다.

남들은 봄이 왔다고 하지만 나로선 옷을 몇 겹으로 껴입어도 추운 날씨였다.

‘그래도 한적하니 좋네.’

바람은 살랑살랑. 참새는 짹짹.

아, 평화롭다.

이 평화가 시한부가 될 수도 있다니. 솔직히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는 고난과 역경이 예정된 소설 속이니까, 밖에선 지금도 스토리대로 여러 일들이 착착 진행되고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내게 이 마을은 태풍의 눈과 같았다.

‘언뜻 고요해 보이지만 실은 뭔가 엄청난 게 휘몰아치고 있을지도 몰라.’

아직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아서 사건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을 뿐.

이 세계의 주인공은 성녀 코렐리아 폴린과 천덕꾸러기 황자 레오넬 헬리아스고, 코렐리아는 현재 태어나지도 않았다.

악녀 포지션엔 내 동생 셀레나 브링스턴이 있으며, 최종 보스이자 흑막은 이안 카히텐이 맡았다.

엑스트라인 나는 원래 죽을 운명이었고.

정말 흔하디흔한 로판 소설의 관계도였다.

‘어?’

그러다 문득 내게 가장 중요한 인물 하나의 결말이 쏙 빠져 있음을 깨달았다.

‘체이트는?’

감았던 눈이 절로 뜨였다.

‘이야기가 시작되면…… 체이트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런 의문은 가져 본 적 없다. 해피엔딩 소설 속 여주의 아버지니까 잘 먹고 잘살겠지. 막연히 좋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여주의 탄생 배경과 같은 회상 장면을 제외하고 체이트 폴린이 대놓고 등장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 당초 따로 거론된 역사가 있긴 했던가?

이전까지는 그저 세월이 흘러 기억하지 못한 것이라 여겼던 부분들이 돌연 불길하게 다가왔다.

위화감이 든다.

왜 체이트는 이곳에 있었으며 왜 그런 삶을 살았고…….

아니, 이런 게 아니다.

본래 인물의 삶은 가지각색이니 그 자체의 개성이 문제 될 게 아니었다.

요컨대, 문제라고 함은.

‘왜 하필 체이트가 코렐리아의 아버지인 걸까.’

체이트의 과거는 불명이다. 소설에도 나오지 않았고 체이트의 입으로도 들은 바가 거의 없다.

‘갇혀 살았다고 했었지. ……어디에서 갇혀 살았다는 걸까? 누구에게?’

그 아이는 의문투성이다.

이전엔 이야기에 깊이 엮여서 본래 운명으로 흘러가고 싶지 않다는 일념으로 체이트에게 과거를 캐묻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내 세계가 무너지는 걸 좌시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폴린이란 이름도, 아르키드네 신전에서 쓰이는 고대어에서 유래했지. 호, 혹시 체이트의 과거도 아르키드네 신전과 연관이 있는 건가?’

그렇다면 체이트를 지하에 가둔 것은…….

‘신전?’

오싹한 소름이 끼쳤다.

‘말도 안 돼. 체이트가 신전에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다면 딸인 코렐리아가 순순히 아르키드네의 성녀가 되었을 리가 없어.’

코렐리아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르키드네 신전의 추앙을 받았으며, 그들의 편에 섰다.

작중 묘사된 코렐리아의 괴팍한 성격으로 미뤄 보건대 그녀가 수동적으로 성녀직에 앉았을 가능성은 적다.

코렐리아를 억지로 성녀로 만들 방법이 과연 있을지…….

코렐리아는 제 핏줄의 과오를 바로잡아야 한다.

“허억……!”

뭐, 뭐지?

방금, 이상한 문장이 떠올랐다.

원작의 내용인가?

‘왜 갑자기……. 아니, 정말 그런 문장이 있었나?’

섬광처럼 꽂힌 기억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얼른 이성을 차리고 추론을 시작했다.

‘제 핏줄이라면 당연히 아버지인 체이트를 의미하는 거겠지. 체이트가 과오를 저질렀다? 과거에 말인가? 아니면 이후에 그 애가 무슨 짓을 저지를 예정이라든가?’

고민에 빠져있던 찰나.

바람 소리가 멎었다.

……어?

슬쩍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수풀 사이에서 거대한 호랑이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걸어오고 있었다.

……대체 왜 동산 옆 오솔길에 범님이 계시는 겁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잔칫집 분위기에 맞춰 떡이라도 한 상 준비했죠.

근데 또 자세히 보니 그냥 호랑이가 아니었다. 누런 털 사이사이로 시커먼 것이 줄줄 흐르는 게 마치!

“마물……?”

빙의 전 레티시아의 기억 속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내 눈으로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북부는 카히텐 신의 소멸 이후로 신앙을 경시하는 데다가, 대공이 이종족을 수용하고 외곽 수비를 강화해서 마물이 서식하기 힘들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마물 안전지대에서 이런 거대한 녀석과 마주치다니.

‘이안 카히텐, 결혼 안 했다고 놉니까?’

점점 가까워질수록 징그럽게 녹아내리는 얼굴이나 주위를 감싼 새카만 점액들이 선명히 드러났다.

일그러진 주둥이에서 뚝뚝 떨어지는 침조차 먹물처럼 까매서 마치 썩은 피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재빨리 바위에서 내려와 뒷걸음질 쳤다.

당장에라도 뒤돌아 달리고 싶었으나, 맹수 앞에서 함부로 등을 보여선 안 된다는 지식인 태양신의 답변이 머리를 지배했다.

솔직히 이 상황에서 다리가 제대로 움직여 줄까 싶기도 했고.

가뜩이나 젓가락 같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오금이 저려서 넘어지거나 주저앉지 않고 버티고 있는 스스로가 대견할 지경이다.

“크르르…….”

“저기, 우리 대화를 좀…….”

“크헝!”

“으허헙! 죄송해욧!”

‘죽는다!’

어떻게든 좀 더 살아 보겠다고 도망까지 쳤는데 마물에게 뜯겨 죽는다니, 개죽음도 이런 개죽음이 없다.

이대로 아무것도 못 하고 〈레티시아(27세, 엑스트라): 호랑이 마물에게 머리 뜯겨 죽음.〉이 될 수는 없었다.

나중에 황천길 앞 노점상에서 썰도 못 풀고 울어 젖힐 내 모습이 벌써 눈에 선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저승에서 이빨 털 사연 하나는 만들고 죽어야지!’

나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란 심정으로 가장 굵은 나뭇가지를 찾아들고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오, 오지 마!”

“크허헝!”

잘못했습니다! 오세요! 지금 너무 설레니까 초속 5센티미터로 천천히 오세요!

반쯤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끼힝…….”

마물이 갑자기 납작 엎드렸다.

전혀 귀엽지 않은 주제에 시무룩한 표정도 지었다.

내 패기에 질려 버린 건 당연히 아닐 테고.

난 천천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아주 천천히 눈만 뒤로 돌렸다.

사박사박.

깃털처럼 가벼운 발걸음.

그만큼 기척이 없는 상대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여기 있었군요.”

체이트가 말했다.

변성기가 끝난 그의 목소리는 나른하게 늘어지는 저음이었다.

“정말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시네요.”

“…….”

군청색 롱코트를 걸친 녀석이 한 걸음씩 걸어왔다. 그 자태에 홀려 있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오지 마! 위험……!”

순식간이었다.

머리 위로 음영이 졌다.

체이트의 손이 내 위에 닿았다.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다가, 이마를 살짝 누르고, 이내 눈을 가린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뭐랄까.

‘기시감.’

나는, 전에도 이런 상황에 놓인 적이 있다.

지금보다 덜 영근 하얀 손이 내 눈을 가리고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요, 누님.”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다 처리할 테니까.’

“제가 처리할 테니까요.”

“…….”

가로막힌 시야가 어둡다.

“누님.”

귓가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때보다 낮고 묵직한 목소리.

“계속 감고 계셔야 합니다.”

손이 떨어졌다. 체이트의 온기 또한 멀어졌다.

아주 깊고 끈적끈적한 침묵이 찾아왔다.

숲속을 습관처럼 휘돌던 바람조차 무겁게 가라앉았다. 세상은 나를 빼고 멈춘 듯했고, 체이트의 숨소리와 마물의 으르렁거림조차 들리지 않았다.

어둠. 그리고 고요.

불안이 엄습했다.

“체이트……?”

구명줄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이 없다.

“……체이트!”

한 발을 내디디며 다시 이름을 불렀다. 손을 들고 더듬거렸지만 녀석의 소맷귀는커녕 숲의 잔가지조차 걸리지 않았다.

‘체이트가 없어.’

이지를 잃은 머리가 불확실한 사실을 확신하며 감각을 집어삼켰다. 엎어 둔 두려움이 고개를 들이밀 즈음, 끈기 없는 눈꺼풀이 바싹 올라갔다.

한동안 어둠에 먹혀 있던 시야가 흐릿했다.

초점이 온전히 잡히기도 전에 두 눈이 다시 손아귀에 갇혔다. 몹시 다급하고, 거칠고, 무례했다.

그런데도 난 그 온기에 기나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고 있으라니까.”

코끝까지 덮은 손에서 피 냄새가 훅 끼쳤다. 뾰족하게 날 선 목소리가 말미에 웃음기를 매달고 속삭였다.

“하여간 말 안 듣지.”

난 체이트의 팔을 꽉 붙잡고 물었다.

“끄, 끝났어……?”

“아뇨, 아직…….”

성미 급하게 그의 손을 잡고 끌어내리자, 머리 위에서 끙 하고 앓는 듯한 침음이 들렸다.

“체이트, 이게 다 뭐야……?”

마물의 형체는 온데간데없었다. 여기저기 널린 시커먼 잔해들이 마물이 존재했었다는 사실만 알려줄 뿐.

내 뒤에 있던 그는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채 고고했다.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굵은 나뭇가지에 걸린 검은 살점이 주룩 떨어져 질척이는 소리를 냈다.

볼 근육이 딱딱해졌다.

“네가 그랬어?”

“…….”

“어떻게? 아니, 그보다.”

난 숨을 크게 고르고 물었다.

“우리…… 전에도 이런 일 있었지?”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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