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3월의 시작.
봄의 초입.
남부는 벌써 후끈했다.
본디 습윤한 바닷바람이 쉴 새 없이 몰아치고 사시사철 싱그러운 녹음이 우거진 곳이었다.
그 중심에 위치한 아르키드네 대신전 역시 푸른 생기로 가득하긴 매한가지였다.
북풍한설을 몰고 온 사내가 주변 기온을 영하로 떨어뜨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설원을 걸친 듯 새하얀 남자였다.
신전 석조 기둥 위의 페디먼트를 올려다보는 눈빛만은 푸르렀으나, 남부의 뜨거운 바다보다는 북부의 빙설에 가까운 벽색이었다.
그런 자가 남부의 대신전 앞에 서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선은 차갑고, 숨결은 단조로웠다.
‘어디서든 한결같으시니 좋군.’
옆에서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연신 훔쳐내던 보좌관이 주군의 잘빠진 측면을 힐끔거렸다.
얼룩 한 점 없는 화이트 코트에 청색의 스리피스 정장을 빠짐없이 갖춘 주군은 단정하다 못해 강박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덥지도 않은가.’
일평생을 북부에서 나고 자란 보좌관은 한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다는 이곳 날씨가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나 그건 저분도 다르지 않다.
저분이야말로 북부의 상징 그 자체가 아닌가.
북부 카히텐 영지의 유일무이한 주인, 이안 카히텐.
돌연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헉.”
시선이 마주쳤다.
차디찬 은발이 가볍게 휘날리며 수정구슬 같은 벽안이 느리게 깜박거렸다. 구체 관절 인형이 자아를 갖고 움직이듯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떠났다고?”
온통 백색과 청색으로 뒤덮인 남자가 물었다.
“예. 저희가 도착하기 직전에 멀리 외출하셨다며 기별이 있거든 연통을 준다고 했습니다.”
“외출?”
짧은 비소가 냉기처럼 흘러나왔다.
“틀렸다, 제스.”
이안은 자연스럽게 코트 주머니를 뒤져 궐련 한 개비를 물었다. 그의 수석 보좌관, 제스트리아 빈델이 재빨리 라이터를 꺼냈다.
은발벽안의 미남자가 아지랑이 같은 연기를 내뱉으며 손끝으로 재를 툭툭 쳤다.
“외출이 아니라 도망이겠지.”
붉은 입술이 비뚜름히 올라갔다.
“신전 앞에서 그런 표현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전하.”
“쪽지 한 장 남기지 않았어. 목적지마저 불명이지. 이걸 단순 외출이라 일컫는 건 조금 우습지 않나?”
“그건…….”
“신전 놈들이 꼴에 대주교라고 고상한 인상을 남겨주고 싶은 모양인데.”
툭. 반쯤 피운 궐련이 바닥에 떨어지고는.
그대로 구둣발에 짓이겨졌다.
“예의를 모르는 개들을 존중할 의무는 없지.”
이안의 매끈한 얼굴에 은은한 분노가 서렸다.
그는 거래를 위해 이곳까지 왔다.
신전은 이안의 북부 통치권을 인정하고, 이안은 그 대가로 북부의 포교를 허락하고.
솔직히 이안 입장에서는 퍽 달갑지 않은 거래였다.
그러나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외교적으로 독립된 지위를 갖기 위해선 신전과의 오랜 갈등을 지우고 새로운 발판을 닦아낼 수밖에 없었다.
하나 고심 끝에 이안이 대신전에 당도했을 때, 그를 공공연한 북부의 주인으로 인정해줄 계약의 당사자, 아르키드네 대주교는 자리에 없었다.
이번 남부 행차를 결정하는 데 든 비용이며 시간이 얼마인가.
무의미하게 자본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그가 제일 싫어하는 일이었다.
‘일방적으로 거래를 파기하는 것은 눈감아줄 수 없는 교만이고.’
“과거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
10년 전, 그의 약혼자가 실종되었을 때.
브링스턴 후작의 덜덜 떨리던 목소리가 여직 귀에 선했다.
‘제 여식은 도망친 것이 아닙니다! 일평생 대공 전하와의 혼인만을 꿈꾸던 아이가 어찌 감히 도망을 치겠습니까!’
그럼 어디 납치라도 당했다는 말인가? 제깟 게 무엇이라고?
설사 납치라고 한들, 그 또한 이안의 알 바는 아니었다.
중요한 건 거래 대상이 사라졌고, 계획이 수틀렸다는 사실이지.
그때는 예상 밖의 사태에 심기가 뒤틀린 나머지 후작가를 멸문시킬까도 싶었으나, 지금 돌이켜 보면 약혼자의 실종은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덕분에 당초 약속했던 브링스턴 후작가의 다이아몬드 광산과 제국 수도로 가는 항만을 혼약 없이도 얻어낼 수 있었으니까.
구태여 번거로운 짐을 얹지 않고 원하는 바를 취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거래는 없었다.
브링스턴 후작의 사회적 체면을 고려하여 여태 수색이 이어지고는 있지만, 이 역시 도의적인 의무일 뿐이다.
약혼자의 생사가 불명이라는 핑계로 지긋지긋한 계모의 결혼 압박을 떨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거양득.
이젠 아예 5년쯤 더 조용히 있다가 어디 머나먼 타지에서 시체로 나타나 주면 좋겠다 싶은 것이 현재 심정이었다.
제 약혼자, 레티시아 브링스턴이 말이다.
죽었으면 좋겠다.
오래전 죽고 없어서 그 흔적만 겨우 남아 있기를.
그리 소망하였다.
‘하나 이번엔 경우가 다르지.’
레티시아는 거래를 보증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나 아르키드네의 대주교는 그 존재 자체가 거래의 주역이었다.
이안은 그의 공증이 필요했다.
“찾아.”
“예?”
“대주교가 사라진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야. 흔적이 남았겠지. 이 잡듯이 뒤져서 추적해. 그리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말을 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서 내 앞에 데려와.”
“…….”
보좌관 제스가 눈을 끔벅이다가 무릎을 휘청거렸다.
또 시작이다.
또 앞뒤 안 가리고 물어뜯기 시작했어.
하여간 저 도사견…….
“전하, 아직 어리다고는 해도 신전의 주인 되는 자입니다.”
광신도한테 계란으로 맞고 싶으십니까?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꾹 참고 제스가 모기만 한 소리로 덧붙였다.
“저쪽에서 말을 번복하면 어쩌시려고요.”
“그럴 것 같나?”
제스의 말대로 아르키드네 대주교는 아직 연식이 어렸다. 그런 자가 대륙 내 최다 신도를 보유한 아르키드네 신전의 수장이 되었다는 것은, 오로지 능력 하나만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그런 인재의 주변엔 항시 질투와 적의가 도사린다. 그 점을 이안은 익히 알고 있었다. 자신 또한 그처럼 ‘타고난 자’였으니까.
바닥에 깔린 신도들이 어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과 거래를 결심한 윗대가리들은 그들의 주인을 진정으로 염려하지 않을 것이다.
이안은 신앙심 깊은 자의 도덕과 선을 신뢰하지 않았다.
결국 인간이다.
자신처럼 욕망하고 갈구하는 인간.
그렇다면 원하는 것을 쥐여 주기만 하면 된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원하는 것 또한, 스스로 쟁취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찾아.”
“……알겠습니다.”
제스는 차마 주군의 명을 거역하지 못했다.
* * *
한편, 북부 넴페르 산맥 너머 델린 남작의 영지.
체이트와 나는 대치 중이었다.
“누님.”
“대답해.”
“…….”
나긋나긋하던 목소리가 바람소리와 함께 멎었다. 이내 그가 눈썹을 늘어뜨리고 미소 지었다.
“예……. 단 한 번.”
“……!”
“오래전이었어요.”
언제인지는 알겠다.
8년 전, 그가 처음 사라진 날.
뭔가 찝찝한 꿈을 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꿈이 아니었던 거다.
“성력이란 거, 원래 사람의 기억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거야?”
“아니요. 그저 봉인해 두는 것뿐, 계기만 있다면 어떻게든 기억은 돌아옵니다.”
“계기…….”
“아무나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
역시 체이트는 보통 성력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건가.
그의 과거가 아르키드네 신전과 연관돼 있을 거라는 추측에 점점 확신이 더해간다.
남의 기억을 멋대로 건드렸다는 것도 기분이 나빴지만, 그보다는 체이트가 가진 힘의 크기가 더 중요했다.
‘만약 체이트가 코렐리아와 동급의 성력을 가지고 있다면…….’
코렐리아가 부재한 상황에 그가 세계의 구원자 역할을 대신하지 못할 것도 없다.
“체이트, 너 말이야.”
“예.”
“옛날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질문을 꺼내기까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나로서는 한번 빠져나온 운명의 소용돌이에 다시 접근하는 위험한 일이니까.
“…….”
체이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죄송합니다.”
입을 다물었다.
* * *
이후 몇 번 다른 식으로 질문을 던져 봤지만, 체이트의 입은 풀을 붙인 것처럼 꽉 다물렸다. 더 강하게 따져 물어도 나올 것도 없어 보였다.
‘결국 지금은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시도해 볼 수밖에 없나.’
남한테 혼인 강요하는 거, 썩 유쾌한 일은 아닌데 말이지…….
오솔길을 지나는 내내 우리는 조용했다.
‘생판 남이랑 걸어도 이것보다 더 어색하진 않겠는데.’
체이트는 내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고, 난 그 질문이 아니면 더 할 말이 없었으므로 우린 정말 조용히 걷기만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먼저 입을 뗀 쪽은 체이트였다.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맥락도 없는 소리였다.
“어, 뭐가?”
겸연쩍은 기분이 가시지 않은 난 뻘쭘하게 주춤거렸다. 그러자 체이트가 아래쪽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엥, 내가 뭐 잘못했나?
“누님.”
“으응.”
“그러다 넘어지겠어요.”
“응?”
체이트의 시선을 따라 눈을 내렸다. 정말 같잖게도 종아리가 달달 떨리고 있었다.
뭐야, 나 진짜 쫄보네. 하하.
허탈한 웃음이 흘렀다.
“이거 그냥 반사적인 거야. 시간 지나면 괜찮아져.”
“괜찮긴.”
체이트가 허리를 숙이고 내게 등을 보였다.
“업히세요.”
“쪽팔리게 무슨!”
“안아서 갈까요?”
“…….”
업혔다.
체이트는 나를 가뿐히 업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와중에 주먹 쥔 손으로 아래를 받치는 매너를 잊지 않았다.
이런 거 보면 애가 참 인기는 많게 생겼는데.
‘써먹질 못하네…….’
애석한 기분에 잠긴 것도 잠시. 다시 조금 전의 잔상이 뇌리를 스쳤다.
새카만 마물의 잔해, 체이트의 손끝에서 느껴지던 피 냄새, 오싹할 만치 느긋한 시선.
체이트는 최상위 포식자처럼 서 있었다.
얘가 포식자라니. 그저 쬐그마한 고양이 수인인 주제에.
……무의미한 부정인 거 안다.
마물을 일시에 굴복시키는 ‘신성력’의 진가를 보았으니 이젠 그를 함부로 저평가할 수 없다.
‘어쩌면 때마침 날 찾아온 것도 우연이 아닐지도…….’
“체이트.”
난 등에 업힌 채 그를 불렀다.
“네, 누님.”
“너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
“누님께서 너무 오랫동안 안 돌아오시기에 찾아다녔습니다.”
“여기 은근히 찾기 힘든데.”
“예. 힘들었습니다. 장한 짓 했으니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세요.”
잔망스럽게 말하는 녀석의 머리를 콩 두드렸다. 그러자 꼭 쥐고 있던 어깨가 가볍게 들썩였다.
이 녀석, 드디어 편하게 웃네.
“있잖아.”
“네.”
“너 아까는…….”
“아, 누님.”
체이트가 말허리를 자르고 걸음을 멈췄다.
“다 왔네요.”
“…….”
“내려 드릴까요?”
어느새 마을이었다.
소박한 피크닉에서 왁자지껄 바비큐 파티가 된 현장을 보며 어서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궁금한 건 언제든 물어볼 수 있지만 쪽팔림은 평생 가는 법이니까.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