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나는 마을로 돌아가자마자 한스 아저씨에게 마물의 출몰 소식을 알렸다.
즉시 자경단이 꾸려졌으며, 민간인은 동산에서 빠르게 피신하라는 대피령이 떨어졌다.
결국 피크닉은 애매하게 끝나 버렸다.
“레아, 그 마물 놈은 어디 갔니?”
“……정신이 없어서 기억이 잘 안 나요. 도망치기 바빴거든요.”
“그래, 무사하면 다행이지.”
마물의 잔해는 체이트가 모두 치웠다.
오솔길에서 흔적을 지우기 전, 그는 내게 처음과 마찬가지로 눈을 감고 있으라고 했다.
내가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자, 한 손으로 내 머리를 끌어안고 시야를 차단한 채 모든 일을 마쳤다.
“그런데 이상하구나. 여긴 마물이 노릴 만한 게 없을 텐데.”
“왜요?”
“너도 알다시피 우린 신전과 거리가 멀잖냐.”
한스 아저씨가 남쪽의 넴페르 산맥을 가리켰다.
“마물은 신관들만 보면 정신을 못 차려. 남부랑 수도에서 이따금 출몰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 북부에 몇 남은 것들은 대공 전하께서 토벌대를 꾸려서 주기적으로 처리해 주시고.”
아, 그래. 그랬었지.
가장 불손한 것과 가장 신실한 것, 양극단은 오히려 통한다고 하던가? 마물은 신앙이 있는 존재라면 그저 사족을 못 썼다.
굳이 신관이나 사제가 아니더라도 성력을 가진 신도나 마을의 추앙받는 성녀들 역시 그들의 주요 먹잇감 중 하나였다.
역으로 그런 마물을 처리할 힘 역시 신성력이었고.
하지만 여기 북부는 성력보다 마력을 주요 원천 에너지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애당초 마물이 매혹적으로 느낄 만한 대상 자체가 많지 않으니, 자연히 그들의 개체 수도 현저히 적었다.
실제로 지난 몇 년간은 마물의 흔적조차 볼 일이 없었다.
“체이트.”
한스 아저씨가 사라진 후, 내 옆을 굳건히 지키고 있던 그에게 말을 걸었다.
“예, 누님.”
“혹시 마물이 튀어나온 것도 네 성력 때문이야?”
“……예.”
“그렇구나.”
그럼 8년 전에 내가 마물에게 당할 뻔한 것도 체이트와 함께 있었기 때문일까.
“죄송합니다.”
그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왜 죄송해?”
“저 때문에 누님께서 위험에 처하신 겁니다. 그날부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려고 했는데.”
그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네 탓이 아냐. 뱀 굴 앞에서 피리를 불어댄 것도 아니고, 모기가 피를 빨러 오는데 사람이 죄송해하는 거 봤어?”
“…….”
“네 의지로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일일이 사과하지 마. 물론 내 기억을 봉인한 대가는 톡톡히 받아낼 거지만.”
“뭐든지 할게요. 전처럼 화가 풀릴 때까지 때리셔도 됩니다.”
“말 함부로 하지 마. 빗자루라면 진작 단단한 걸로 바꿨으니까.”
“괜찮아요.”
체이트가 깊게 머리를 숙였다.
“그렇게 해서 용서받을 수 있다면.”
“……됐으니까 돌아가서 안마나 해줘.”
난 그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옆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한숨 같은 웃음이 자잘하게 그의 입가에서 흩어졌다.
“얼마든지요. 그런 거라면 평생이라도 할 수 있어요.”
“평생은 좀…….”
난 팔짱을 낀 채 입술을 당겼다.
아직 앞날은 불투명하고 얻은 건 없고 우리는 휩쓸려 가는 중이지만, 체이트는 여전히 내가 아는 체이트였다.
“난 언젠가 네 과거에 대해 다시 물을지도 몰라. 네가 남부에서 뭘 하다 왔는지도.”
미래가 내가 아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 내가 그것을 바로잡아야 할 책임을 느꼈을 때.
그때는 나 스스로 품을 팔아가며 다른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그땐 제대로 답해줘. 준비할 시간은 넉넉히 줄 테니.”
“…….”
체이트의 시선이 멀어졌다.
그의 붉은 눈이 노을 진 넴페르 산머리를 응시했다.
저 산맥을 중심으로 기차를 타고 빙 돌아가면 카히텐 영지로 갈 수 있다.
거기서 조금만 더 아래로 내려가면 황성과 브링스턴 후작가 타운하우스가 있는 수도에 다다를 것이고, 그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면…….
“너, 남부로 간 건 맞지?”
그간 체이트와는 여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서신엔 모두 남부의 휴양지 주소가 찍혀 있었다.
이 녀석 내가 준 돈으로 바닷가에서 바람직하게 잘 살고 있나 보다 생각했는데.
“혹시 거기서 딴짓했니?”
“딴짓이라면, 이를테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방금 겪은 일로 미뤄볼 때 체이트가 아르키드네 신전과 연이 있을 가능성은 더 커졌다.
만일 체이트가 유년 시절에 남부의 신전에 감금돼 있던 거라면, 나는 이 아이를 다시 끔찍한 악몽 속으로 밀어 넣은 꼴이 된다.
“…….”
그의 과거에 관해 물으면서도 그의 과거를 알기가 두려웠다.
그가 ‘나 때문에’ 괴로운 3년을 보냈을까 봐.
“가령…….”
난 목소리를 한 톤 높여 명랑하게 조잘거렸다.
“야매 신학자를 만나서 성전 공부를 했다거나, 야매 치유사를 만나서 신성 다루는 법을 익혔다거나, 야매 수도승을 만나서 폭포수 아래에서 성법을 깨우쳤다거나?”
말을 돌리려는 의도적인 장난이었다.
체이트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가 싶더니, 도로 꾹 다물렸다.
보아하니…….
‘저거 또 웃참하네.’
“조금 더 현실적이고 창의적인 생각을 하실 순 없으십니까?”
“…….”
네가 이젠 돌려서 멕이지 않기로 작정을 했구나.
대체 현실적인데 창의적인 발상은 뭘 먹어야 할 수 있는 걸까.
“……아!”
난 짓궂게 물었다.
“너 여자 신관이랑 연애했니?”
응, 이건 그냥 내 희망 사항.
“야, 괜찮아. 요즘은 속세도 나쁘지 않다고 잘 설득해 봐.”
“누가 있답니까?”
체이트가 갑자기 턱을 치켜들더니, 흉부의 셔츠 단추가 터져 나가기 직전까지 크게 한숨을 쉬면서 나를 개한심하단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니면 아닌 거지, 저렇게까지 미련한 가축 보듯 눈을 흘길 필요가 있단 말인가.
거 사람 상처받게 하네.
“누님은요?”
“어?”
대뜸 튀어나온 질문에 나는 잠시 움찔거렸다.
“전에도 말했잖아. 난 눈이 너무 높아서 결혼은 글렀다니까?”
“그럼 만약에.”
체이트가 괜스럽게 뜸을 들이다 물었다.
“만약에 누님의 이상에 걸맞은 남자가 나타난다면, 결혼하실 겁니까?”
“내 이상형?”
얘가 난데없이 무슨 헛소리래.
“예. 전에 말씀하신 대로 키 180센티미터 후반에 듬직하고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내가 나타난다면 말입니다.”
와, 얘 기억력 장난 없다.
난 스스로 주절거렸는지도 가물가물한 말들을 끄덕끄덕 주워 담고서 대꾸했다.
“그런 남자가 날 좋아한다면야 물론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있어도 사실 결혼은 못 할걸.
하지만 없을 게 분명하니 구태여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하신다는 말씀이시죠?”
“뭐어…….”
추궁에 가까운 물음에 말을 얼버무리다가 문득 이게 아닌데 싶었다.
“그래서 남부에 애인은 없다는 거야?”
“없습니다.”
“숨겨 둔 자식도 없고?”
“그런 게 대체 왜…… 없습니다.”
“저런.”
벌써 3월 초순이다.
‘차라리 여주가 칠삭둥이라는 설정이라도 붙어주면 좋겠네. 그럼 몇 개월은 더 벌 수 있는 건데.’
원래 스토리에선 코렐리아가 대체 어떻게 태어난 거지? 이런 목석같은 놈을 대체 어떤 엄청난 여자가 녹여 먹은 거야?
그 비법이라도 좀 알고 싶다.
‘그래야 다른 여자애들에게 전수해서 가능성이라도 좀 만들어 보지.’
이대로 가다간 파국이다.
“체이트, 너 혹시 ‘우심결’이라고…….”
“싫습니다.”
“에라이! 너는 싫습니다 말고 할 줄 아는 말이 없냐?”
“아뇨.”
체이트가 고개를 살짝 틀고서 내게 말했다.
“좋아해요.”
“…….”
여상한 표정과 덤덤한 시선. 고백이라기엔 담백하고 장난이라기엔 낯간지러운 느낌에, 난 그만 목을 움츠렸다.
“그것참 고맙네.”
왠지 좀 어색해졌다. 그냥 나도 너 좋다고 하면 될 걸, 대체 이게 뭐라고 이렇게 망설여진담.
큼큼. 난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몇 번 한 뒤에 체이트의 등을 두드렸다.
“그러지 말고 좋은 사람 있으면 언제든 말만 해.”
“일전에도 수십 번은 넘게 말씀드렸지만, 천지가 개벽해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이번에도 역시 내가…….”
“예.”
녀석이 웃으며 내 말을 가로챘다.
“누님께서 혼인을 안 하시니까.”
“허.”
또 내 탓인가.
한 대 칠 요량으로 주먹을 움켜쥐던 차에 체이트가 말을 이었다.
“아, 이젠 아니겠네요.”
“응?”
“이상형이 나타나면 혼인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거야…….”
“누님, 혼인하실 수도 있겠군요.”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린가.
결혼이야 이미 매칭 실패로 저 멀리 물 건너갔고, 설사 있다고 해도 이 시골구석에 갑자기 체이트가 말한―그리고 아마 내가 말했을―키 180 후반의 듬직하고 돈 많은 권력남이 떡하니 튀어나올 리도 없는데.
결국 다 뜬구름 잡는 헛소리고, 체이트의 말도 안 되는 변명 레퍼토리에 불과했다.
* * *
북부 최고의 오지라퍼, 마리안느 델린 남작 부인은 오랜 단골 카페의 주인이 솔로라는 게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저렇게 예쁘고 앞날이 창창한데 제 짝 하나 없이 늙어 죽을 거라니!
그건 이 마리안느‘괄호 치고 사랑의 메신저 괄호 닫고’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단란한 가족 식사 시간, 델린 남작 부인이 남편인 델린 남작에게 한탄했다.
“여봉, 내가 종일 고민을 해봤는데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음, 이 송어 맛 기가 막히는군.”
“우리 레아 양을 도와줄 좋은 방법이 없을까?”
“아니! 생선찜에 고추를 넣으니 맛이 훨씬 담백하군!”
“아이, 참, 여봉봉! 내 말 듣고 있어?”
“역시 한스 포포니가 잡은 게 제일 신선해.”
“…….”
델린 남작 부인이 조용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식탁은 잠시 소란해졌다.
이윽고, 남작 부인이 다시 물었다.
“여봉봉봉, 글쎄 어떻게 해야 할까?”
“우음, 우리 쟈기. 그럼 루퍼트 연분 맺어 줄 때 썼던 방법은 어때?”
“……아!”
델린 남작 부인이 손뼉을 쳤다.
솔직히 남작가 장남이라는 것 빼고는 가진 게 하나도 없던 루퍼트였다.
심지어 싫다는 카페 주인을 몇 년이나 졸졸 쫓아다녔던 녀석이 어떻게 결혼까지 골인했느냐 하면.
“우리 애가 얼굴은 괜찮지.”
바로 낯짝이었다.
루퍼트 델린은 머리도 나쁘고 성격도 더럽고 근거 없는 자신감만 충만한 머저리지만, 허우대 하나만큼은 썩 쓸 만했다.
델린 남작 부인은 곧장 레아 핀볼트의 인상을 떠올렸다. 조금 흐릿하긴 해도 이목구비 하나하나 따져보면 확실히 귀엽고 청순한 미인상이다.
초상화가에게 밋밋한 인상에 음영으로 포인트를 조금 주라고 부탁하면 약간의 단점도 금방 보완될 거다.
그렇게 만든 레아의 초상화를 ‘우심결’의 매칭 조건에 추가하기만 하면…….
“금방 좋다는 사람이 나오겠지? 꺄야, 레아 양이 결혼이라니!”
남작 부인이 기쁘게 외치고는 델린 남작의 볼에 키스했다.
“고마워요! 역시 우리 여봉봉봉봉이 최고야!”
“응? 으응. 그치?”
아내의 눈치를 살피던 델린 남작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다 불현듯 작은 걱정거리 하나가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허락은 받고 저러는 거겠지?’
“…….”
아무렴, 사람이 초상권이 있는데 설마 무턱대고 남의 개인 정보를 기재하겠는가. 비록 백치미 넘치는 루퍼트 델린의 친모긴 하지만, 그 정도로 무식하진 않겠지. 허허.
델린 남작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로 했다. 그보단 내일 눈가에 파란 멍이 올라서 면구한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게 걱정이었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