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로체, 우리 카페에 변태가 있다.”
내가 아무렇지 않은 척 드립커피를 내리며 말하자, 로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본인 말씀하시는 거죠?”
“오늘도 건방짐이 도를 넘는구나.”
갓 내린 커피를 들이밀자 로체가 겸허하게 제 잘못을 인정했다.
“죄송합니다. 제발 제게 그 위험 물질만은 권하지 말아 주시죠.”
“…….”
쟨 내가 내린 커피가 무슨 독약이라도 되는 줄 알더라. 그래 봤자 반 실링 원료값으로 5실링씩 받아먹는 흔한 커피일 뿐인데.
“그래서 누가 변태라는 겁니까?”
“저기 오른쪽 구석에 앉은 남자.”
밀짚모자를 푹 눌러쓰고 작은 스케치북을 들고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자꾸 날 쳐다봐.”
“저 손님 혹시 커피 시켰습니까?”
“어, 그랬을걸?”
“그럼 이해가 가네요.”
다시 말하지만 쟨 내가 내린 커피가 독약인 줄 안다.
“헛소리하지 말고.”
“헛소리라뇨. 옛날에 살쾡이가 유리컵을 동강 낸 사건 잊었습니까? 그것도 한 손님이 레아 양의 커피를 잘못 먹고 자기도 모르게 컵을 집어던져서 생긴 우발적 사고 아니었습니까.”
“음.”
고리짝 사건까지 끌고 오니 정말 할 말이 없는걸?
난 조용히 커피를 폐기했다.
“오늘 음료는 네가 만들어. 내가 설거지할게.”
“제 쓸모가 갈수록 늘어나니 문제로군요.”
커피 내릴 때 말고는 손에 물도 안 묻히는 게 무슨.
난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시고 재차 수상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스케치북을 제 얼굴 위까지 들고 연필을 굴리던 남자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아, 정말 수상하긴 한데 심증뿐이니 난처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살쾡이가 안 보이네요.”
“응. 내가 심부름 보냈어.”
체이트는 시내까지 원두 심부름을 보냈다. 이런 일이 아니면 녀석은 도통 내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체이트가 없는 현재. 이 틈에 착착 진행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난 주문이 비는 타이밍을 맞혀 로체에게 한 가지 부탁을 전했다.
“혹시 시간 되면 기차표 좀 구해줘.”
“기차표요? 또 그 살쾡이를 어디로 보내려고요?”
로체가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물었다.
“응. 이번엔 두 장. 나도 갈 거거든.”
“오?”
로체의 눈에 아이 같은 호기심이 서렸다.
“드디어 제게 경영권을 넘기시는 건가요?”
“헛소리 마. 이건 내 카페야. 아무도 안 줘.”
“아쉽네요.”
“허.”
난 가늘게 뜬 눈으로 로체를 흘겨보다가 말을 이었다.
“수도로 가는 왕복표 두 장이랑, 중도에 환승해서 북부로 돌아올 표 한 장. 이렇게 구해줘.”
“……설마 그 한 장이 레아 양 겁니까?”
“응.”
“무슨 짓을 꾸미시려는 건지 원.”
로체가 혀를 끌끌 찼다.
“길게 있지 않을 거야. 그동안만 카페를 맡아줘.”
“어찌 되었든 돌아는 오시겠다는 거군요.”
“당연하지. 이건 내 카페래도?”
내 결혼으로 체이트의 핑곗거리를 일소하는 것도 힘들고, 북부에서 체이트의 짝을 찾아주는 것도 힘들다면.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내가 그 애의 연애사에 도움은커녕 방해만 되는 존재라면…… 차라리 눈앞에서 사라져 주는 게 낫겠지.’
체이트를 두 번 떠나보낼 수 없으니 이번엔 내가 떠나기로 한 것이다.
문제는 녀석이 시스콤 기질이 있다는 건데…….
아무리 눈치가 없는 나라도 이쯤 되면 깨달을 수밖에 없다.
체이트는 나를 좋아한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애당초 애정이 궁핍했던 아이를 데려다 품었으니 그의 가족애가 남다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성인이 다 돼서까지, 연애도 고사하고 내게만 달라붙는 건 아무래도 정상은 아닌 거겠지.
‘지난 3년간은 어떻게 버틴 건지 모르겠네.’
이번 계획에서도 내가 ‘혼자 잠시 나가 있을게!’ 하면 체이트는 무조건 따라나설 게 뻔하다.
하여 나는 체이트를 꼬드겨 동반 여행을 가는 척하면서 환승역에서 몰래 빠지기로 결심했다.
따돌릴 자신은 있었다. 이래 봬도 도망에는 도가 텄으니까.
게다가 이번엔 오래 숨어 있을 필요도 없다.
고작해야 보름 남짓. 아니, 되도록 올해가 끝날 때까지가 좋겠다. 확실하게 해두는 편이 좋으니까.
그동안 체이트가 알아서 인연을 찾길 바랄 수밖에.
‘아무래도 내가 뭔가를 적극적으로 시도하면 할수록 어그러지는 느낌이니까.’
엑스트라가 괜히 함부로 나대는 것도 소설 입장에선 곤란한 일이지.
사실 지금 수습에 열을 올리게 된 것도 내가 나댔기 때문이 아닌가.
이럴 거면 차라리 소설이 알아서 해결해 주길 기대하고 잠시 손 놓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안 되면 뭐…… 완전히 다른 계책을 고심해 봐야지.’
체이트의 힘을 빌리는 건 아직도 차선책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때는 나도 내 비밀을 얘기해야겠지. 안 그러면 체이트는 평생이라도 입을 닫고 있을 것 같으니까.
‘걘 얼굴부터 비범한 주제에 자꾸 평범해 보이려고 애를 쓴단 말이야.’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해보았다.
내가 브링스턴가로 돌아가 이안 카히텐을 회개시키고 흑막 짓을 못 하게 막는다면 어떨까?
왜 그런 거 있잖은가.
빙의한 21세기 유교 걸이 청학동 훈장님처럼 흑막을 잘 가르치고 달래서 새 사람 만들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
단역이긴 하지만 아무튼 난 흑막의 약혼녀였다. 그런 이야기를 만들기엔 썩 적합한 지위를 갖고 있단 말이지.
‘하지만…….’
소설과 현실은 느낌이 달랐다. 남이 할 땐 왠지 해 봄직해 보이는 게, 막상 내 일이 되면 한없이 막연해지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게, 내가 아는 이안 카히텐은 소위 말하는 ‘사연 있는 흑막’이 아니었다. 그냥 곱게 돌아버린 미친놈일 뿐.
실례로 그가 세상을 멸망시키려던 이유는 작중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냥 정해진 악역이라는 거지.
‘……어릴 땐 멀쩡했었던 것 같은데.’
레티시아의 기억에 그가 남아 있었다. 유년 시절에 단 한 번 본 기억이지만 레티시아 입장에서는 꽤 강렬했는지 그의 얼굴은 여직 머릿속에서 생생했다.
‘그때도 사실 미친놈이었는데 티가 안 났던 걸까?’
일단 내가 본 이안은 저세상 도른자였다.
나는 빙의 후에 단 한 번, 이안 카히텐을 맨눈으로 목격한 적이 있다.
이 마을에 정착하기 전이었고, 도망한 지 며칠 되지 않아 하루하루가 불안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내 행색은 남루하기 그지없었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길거리 비렁뱅이처럼 입고 다녔던 탓이었다.
난 그날도 허름한 회갈색 망토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사람이 붐비는 시가를 걸었다.
정오의 태양이 뜨거웠다. 약간의 경험을 통해 인적 드문 밤길이 추적자에겐 더 유리하다는 사실을 익혔으므로 사람이 없는 길은 아예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예상치 못했다.
대낮의 시가지 한가운데서 사람이 죽어 나갈 것이라고는.
사람들의 비명이 째지게 울려 퍼지다가 일시에 멈췄다. 숨을 삼킨 듯 억지로 눌러 참은 느낌. 누군가가 침묵을 강제하고 있었다.
원처럼 빙글 둘러싼 인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엄지로 망토 위를 올렸다. 마차가 옆으로 쓰러져 있고, 그 옆에 마부 복장을 한 남자가 죽어 있었다.
본능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참고 눈을 돌렸다. 처참한 시체 앞에 장승처럼 선 사내가 보였다.
푸른빛이 도는 은발과 빙산을 끌로 깎아 박은 듯한 청색 눈동자.
피부가 눈처럼 새하얀 사내였다.
‘정말이지…….’
티끌만큼의 감흥도 없는 목소리가 시가지를 압도했다.
‘말을 모는 실력이 형편없더군.’
고작 말을 잘 몰지 못해서.
그게 사람 하나의 목숨을 앗아갈 이유가 될 수 있나?
불가해한 와중에 제복을 입은 기사 하나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어찌할까요, 전하.’
‘치워.’
‘전하.’
그 한마디에 나는 남자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다.
겨울을 모티프로 만들어진 이 세계의 악역.
이안 카히텐이다.
‘카히텐 대공……!’
그의 정체를 깨닫자마자 나는 등을 돌렸다.
처음에는 태연한 척 걸었지만, 모퉁이를 돌자마자 여유는 바닥이 났다. 난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달리고, 또 달렸다.
단순히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가 무서웠다.
줄곧, 무서웠다.
저 칼의 다음 희생양이 내가 될까 봐.
“레아 양?”
“으응?”
로체가 내 어깨를 툭 치며 유리창 너머를 가리켰다. 난 긴 회상에서 빠져나와 앞을 시선했다.
“레아 양이 부탁하신 표는 조만간 준비해 드릴게요. 그것보다…… 살쾡이가 돌아온 것 같은데요.”
“……아.”
체이트가 입구의 종을 울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누님, 무슨 일 있습니까?”
통유리창 너머로 로체와 내가 속닥거리는 걸 봤는지 체이트는 오자마자 내 안부를 물었다.
난 무심하게 대꾸했다.
“아무 일도.”
그리고 화제를 전환할 겸 그에게 물었다.
“체이트, 우리 여행 갈래?”
“여행이요?”
“응, 나도 계속 시골에만 있다 보니 갑갑해서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어.”
로체와 시선이 교차했다. 조용히 하라고 눈짓하고 체이트를 향해 웃었다.
“같이 가자.”
“……단둘이요?”
“단둘이.”
체이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두근두근.
제발 캐묻지 마라. 캐묻지 마라…….
“음, 그럴까요?”
의뭉스러운 얼굴은 하던 녀석이 씩 웃으며 내 제안을 수락했다.
‘휴.’
나는 순조로운 시작에 속으로 안도했다.
물론, 이후에 내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체이트는 당황하고 화도 많이 날 것이다. 하나 머잖아 좋은 인연을 찾을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이건 결론적으로는 모두를 좋은 결말로 이끌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 * *
체이트는 태연한 척 카페 일에 몰두한 레티시아를 보며 생각했다.
‘이상한데.’
갑자기 여행을 가자고? 그것도 단둘이?
남의 의중을 지레짐작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도 없지.
체이트는 손끝으로 성력을 둥글게 응집시켰다. 그대로 손을 뻗어, 레티시아의 머리에 붙은 먼지를 떼어주는 척하며 신성을 걸어 두었다.
이제 레티시아에게 수상한 거동이 있을 시, 신앙이 깊은 영혼들이 곧장 체이트에게 상황을 전달해줄 것이다.
이들은 형태는 없으나 제법 믿음직한 수하들이었다. 일전 남부로 떠나기 전에도 이 영혼들에게 레티시아의 안전을 확인하도록 명했었다.
그들은 레티시아의 신변에 무슨 문제가 없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자신과 오래 함께 있었던 탓에 마물이 그녀를 노릴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써 온 능력을 이토록 저열한 목적으로 써먹을 줄은 몰랐다.
‘갈 데까지 갔구나, 체이트 폴린.’
체이트는 한숨 쉬었다.
이럴 바엔 차라리 고백하고 싶다.
하지만 연애 생각도 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다가섰다가 이 관계가 박살이 난다면?
동생으로조차 남아 있을 수 없게 돼 버린다면.
“…….”
체이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아니, 이번에야말로 진심일지도 몰라.
순수하게 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 것일지도.
만약 이 모든 게 자신의 기우에 불과하다면.
‘그땐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가드려야지. 아무렴, 누구의 부탁인데.’
원래라면 수도나 남부 쪽으로는 걸음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쪽은 북부와 달리 아르키드네의 신도와 사제가 차고 넘치니까.
체이트는 신전의 도망자 신세였다. 과거와는 조금 다른 의미의 도망자기는 했지만, 어쨌든 도망자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원래는 여기서 평온한 시간을 보내다가, 적절한 시기에 사실을 고백하고 함께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레티시아가 원한다면야.’
체이트는 그녀가 준 기차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철없이 가슴이 뛰었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