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델린 남작가의 응접실.
델린 남작 부인은 완성된 초상화를 보며 입을 벌렸다.
“와! 이틀 만에 이런 퀄리티라니, 역시 손 빠르기로 소문난 사람답네!”
“급행 추가 비용은 확실하게 챙겨 주셔야 합니다.”
밀짚모자를 쓴 화가가 애착 스케치북을 꼭 껴안은 채 말했다.
“그거 완성하겠다고 맛도 없는 커피를 몇 잔이나 시킨 줄 아십니까? 처음에 멋모르고 한 입 대자마자 그대로 프레스코 천장화의 일부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응? 그런가? 난 괜찮던데. 화장실도 잘 가구.”
델린 남작 부인이 콧노래를 흥흥거리며 레티시아의 초상화를 들어 올렸다.
시간이 급해서인지 색채를 다양하게 사용하진 못했지만 확실히 레티시아의 청순한 외모가 잘 드러나 있었다.
‘좋아, 이거면 조만간 남정네들이 줄을 서겠어!’
지극히 중매쟁이다운 시각으로 초상화를 바라보며, 델린 남작 부인이 집사를 불렀다.
“이 사진을 ‘우심결’에 회원 추가 자료로 제출해 줘요.”
“예, 마님.”
화가와 집사를 물리고, 델린 남작 부인은 소파에 길게 누워 생각에 잠겼다.
‘이제 레아 양이 내게 엄청 고마워하겠지?’
난 정말 착하고 사려 깊다니까.
델린 남작 부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3월 중순.
난 요즘 하루하루 쫓기는 기분이 든다.
마치 기말고사를 앞둔 대학생이 된 느낌. 그런데 교수님에게 오픈 북 아니면 절대 못 풀 고난도 서술형 시험을 예고 받은 느낌.
‘아, 스트레스.’
없던 두통이 생길 지경이었다.
“누님,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난 결리는 어깨를 두드리며 체이트에게 물었다.
“준비는 다 끝냈니?”
“물론이지요. 여행 가방은 모두 문 앞에 뒀습니다.”
체이트는 그리 말하며 익숙하게 내 뒤로 걸어와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 * *
로체에게 부탁한 기차표는 어제 전해 받았다. 수도행 두 장은 체이트에게 전해주고 환승 표는 나만의 비밀 공간에 숨겨 두었다.
도망갈 마음은 먹었는데 막상 실행하려니 긴장감에 자꾸만 근육이 뭉쳤다.
내가 어깨를 콩콩 두드리자 체이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요즘 많이 피로하신 듯한데 이대로 여행을 떠나도 괜찮을지 모르겠군요.”
“응? 아냐. 나 완전 괜찮은데.”
“괜찮긴.”
체이트가 보란 듯 뭉친 곳을 눌렀다.
“으헉!”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팠다.
“안 되겠어요. 욕조에 물 받아 놓겠습니다.”
“어? 안 그래도 되는데…….”
“라벤더 향과 장미 향, 둘 중 뭐로 할까요?”
“……장미 향.”
그래, 내일은 수도행 기차에 오르는 아주 중요한 날이다.
계획을 순탄하게 성사하기 위해 컨디션 관리에도 충실해야지!
“알겠습니다.”
체이트는 금세 반신욕을 위한 세팅을 마쳤다.
욕실 문 앞에서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부르라 말하는 그에게 알겠다고 답하고 옷을 벗었다.
따뜻하고 향기로운 물이 몸을 감싸자 금세 노곤해졌다.
‘확실히 체이트는 센스가 있어.’
이렇게 센스 좋고 안마도 잘하고 요리에 청소에 빨래까지 잘하는 미남이, 뭐가 부족해서 연애고 결혼이고 죄다 마다하는 걸까.
‘역시 내가 실수한 걸까.’
엑스트라면 엑스트라답게 얌전히 가던 길 갔어야 했는데.
그렇지만 나는 다시 돌아가도 그 아이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 작고, 어리고, 불쌍한 아이를.
다시 돌아가도 거둘 것이다. 다시 돌아가도 사랑해줄 것이며, 내게 내민 손을 외면하지 못하고 끝내 마주 잡을 것이다.
결국 내 오만한 동정심에 세상이 망해 버릴 위기에 처한다 해도.
“…….”
물속에서 나는 앞으로의 일을 위해 다시 한번 기억을 반추했다.
원작의 결말은 이러하다.
이안이 금지된 사술을 부려 대륙을 완전히 파괴하려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 코렐리아가 광명처럼 나타나 이안의 사술을 막아내고, 아르키드네의 현신으로 추앙받는다.
이후 레오넬이 그녀에게 프러포즈하는 로맨스 파트가 나오지만 지금 중요한 일은 아니니 대충 넘어가고.
아무튼 요점은 코렐리아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가공할 성력으로 이안의 사술을 막아냈다는 것이다.
“……꼭 그녀여야만 할까.”
아르키드네 여신이 다른 아이를 선택할 수는 없을까. 아니면, 이안의 사술을 막아낼 다른 방도가 있다거나.
하지만 여신의 선택 기준을 알 수도 없고, 이안이 사술을 쓴 목적 자체가 불분명하므로 양쪽 다 무턱대고 의존하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차라리 그 아이가 체이트 폴린이 아니었다면…….’
체이트 폴린이 아니라 그저 외로운 고아일 뿐이었다면.
이름 없는 엑스트라에 불과했다면.
나 또한 소설에 이름 한 줄 걸릴 구석이 없는 마을 사람 1이었다면.
그럼 난 구태여 체이트를 멀리 보낼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지금처럼 그가 원하는 대로 평생 함께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서로 신분이 들통날 염려가 없으니 굳이 누나 동생이라고 둘러대지 않아도 괜찮았겠지.
로체와 같은 알바생이라도 좋고, 그저 손이 많이 가는 동거인이라도 좋았을 거야.
그도 아니면…… 음, 부부라든가?
“……아휴. 주접.”
남세스럽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상이람.
이건 다 3년의 공백이 너무 길었던 탓이다. 체이트가 너무 훌쩍 컸기 때문이라고.
상체를 미끄러뜨리며 욕조 물에 얼굴을 빠뜨렸다. 뺨에 닿는 물이 어쩐지 따뜻하다 못해 데일 듯 뜨겁게 느껴졌다.
* * *
레티시아가 욕조 속에서 물장구를 치던 시각.
체이트는 조용히 레티시아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실내를 익숙하게 누비며, 침대 옆 서랍장 두 번째 칸을 열고 바닥을 훑었다.
언뜻 보기엔 텅 빈 서랍장처럼 보이는 공간. 그 표면을 손끝으로 세심하게 눌러보았다.
달칵…….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과연.’
레티시아는 3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돈을 은행에 맡기질 않으니 귀중품이나 현물 자산은 모두 비밀 공간에 숨겨 놓았다. 비밀 공간의 위치야 주기적으로 바꾸는 듯했지만.
체이트는 핀셋으로 이중 잠금 된 바닥의 걸쇠를 풀고 서랍 밑 합판을 뜯어냈다. 착시 효과를 이용해 만들어진 비밀 공간이 드러났고 안에는 번쩍거리는 금괴가 가득했다.
하지만 체이트에겐 죄다 쓸모없는 바윗덩어리에 불과했다. 진짜 찾으려고 했던 것은 이런 게 아니다.
손을 조금 더 안쪽으로 움직여 틈새를 뒤적이자, 금괴 사이에서 얇은 코팅 종이가 나왔다.
환승표 North-Gate2 편도(환불 불가)
“하하. 환승표라.”
주머니에서 제가 받은 표를 꺼내 비교해 보았다. 출발 날짜가 환승 표와 정확히 일치했다.
체이트가 레티시아의 기차표를 빤히 보다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심중에 애써 묶어둔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대체 왜 항상 이런 식이지…….’
가시가 박힌 것처럼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 * *
큰일 났다.
환승표가 없어졌다.
‘아니, 이게 왜 없지?’
혹시나 하는 맘에 서랍장을 탈탈 털어 봤지만 표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게 없으면 난…… 꼼짝없이 수도행인 건데?’
망연자실한 와중에 체이트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준비 다 하셨습니까, 누님?”
“자, 잠시만! 옷 갈아입는 중이다!”
다급하게 외치고 얼른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분명 안에 잘 보관해 뒀다. 내가 아무리 대충 사는 인생이라도 이런 실수를 할 정도로 게으르진 않았다.
‘누구지?’
누가 가져간 거지?
로체가 이 서랍장의 비밀을 알았다면 진작 돈 들고 튀었을 테니 걘 절대 아니고. 따로 도둑이 든 흔적도 없고.
‘설마…… 체이트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지난 3년간 타지에 있던 녀석이다. 이 서랍장에 비밀 공간을 설치한 것은 고작해야 반년 전의 일. 체이트가 알 리가 없었다.
“누님, 이러다 늦겠습니다.”
“간다, 가!”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밖으로 나오자 내 몫까지 캐리어를 짊어진 체이트와 눈이 마주쳤다.
“무겁지? 내가 들게.”
“아뇨. 안 무겁습니다.”
“무거울 텐데…….”
여행용이 아니라 도주용으로 싼 짐인지라 부피에 비해 묵직한 것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 예를 들면 손전등이나 휴대용 버너 같은 것.
“너 그거 다 들고 가면 죽어. 어제 재봤는데 내 몸무게보다 더 나가더라.”
“예, 깃털 같습니다.”
체이트는 짐들을 훌쩍 지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 뒤를 마지못해 따라나서면서도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지배했다.
‘어떡하지? 중간에 환승 티켓을 살까?’
아냐. 그러면 체이트에게 의심을 사는 건 물론이고, 위조 신분증까지 들켜서 브링스턴가로 택배처럼 송달될지도 몰라.
북부야 제국이랑 사이가 극악이니 자체적으로 운영되는 과정에서 서류상 빈틈이 있다고 쳐도, 본토의 행정 관리는 정말 철저했다.
‘이래서 로체에게 대리 구매를 부탁한 것인데.’
머릿속에선 폭풍이 휘몰아쳤지만 일단은 태연한 척하며 체이트를 졸래졸래 따라갔다.
1층 카페로 내려와 문을 열자 환한 햇살이 우리를 맞았다.
“날이 좋군요. 여행 날짜를 잘 잡은 것 같습니다.”
“어? 어어. 그러네, 여행…… 아, 하하. 재밌겠다, 여행…….”
가기 싫어!
이대로 가면 수도에 입성하기도 전에 검색대에서 잡힐 거다.
설사 무사히 수도까지 도착한다 해도 금세 브링스턴가와 연이 있는 귀족과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절대 안 돼!
난 결국 비장의 수단을 쓰기로 결심했다.
“어흑!”
“왜 그러십니까, 누님?”
갑자기 배를 잡고 주저앉자 체이트가 나를 돌아보았다.
“배가, 배가 너무 아프다! 복통이 있는 것 같아……!”
보다 현실감을 주기 위해 흙바닥에 등을 대고 데굴거리자 체이트가 얼른 짐을 내려놓고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아! 아이고, 나 죽는다!”
난 머리카락에 흙이 묻는 것도 개의치 않고 연기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몸을 열심히 움직이니 금방 아픈 사람처럼 창백해지긴 했다. 역시 저질 체력! 훌륭하다, 내 유리 몸뚱이!
이때다 싶어 달뜬 낯으로 힘없이 체이트의 팔을 붙잡았다.
“너무 아쉬워서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오늘 여행은 못 가겠다…….”
“…….”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체이트가 나를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눈물이 앞을 가리도록 아쉬우시면 가셔야지요.”
순간 체이트의 손에 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여주의 아버지가 독신을 선언했다